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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hot)하다’와 ‘뜨겁다’ 사이

  • 입력 2014.07.07 10:27
  • 수정 2014.07.07 11:09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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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 알파벳과 우리말 접미사 ‘-하다’의 이종교배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게 벌써 4년 전이다.[슬림(slim)하고 샴푸(shampoo)하다? 바로가기] 세계 최강국의 언어이면서 국제어의 지위를 얻은 영어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주류 언어로 등극한 지 오래다. 영어 능력은 취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스펙일 뿐 아니라, 주류 상류 사회로 진입하는 필요조건이 되었다.

'핫하다'와 '뜨겁다', 알파벳과 한글 사이

그럴수록 우리말에서 가장 생산적인 조어 능력을 자랑하는 접미사 ‘-하다’와 결합한 영자는 늘어만 간다. 아직까지 사전에는 ‘데이트하다, 드라이하다, 패스하다’ 같은 말만이 올랐지만, 우리 사회에 널리 통용되는 이 이종교배형 용언은 계속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거듭 확인하거니와 접미사 ‘-하다’와 영자 알파벳의 결합을 자연스러운 국어의 변천과정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긍정적으로 보면 국어의 의미 범주가 확대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 측면, 영어가 우리말 낱말의 영역까지도 침범한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제시한 것처럼 ‘래디컬(radical)하다’, ‘니힐(nihil)하다’, ‘터프(tough)하다’ 따위의 말은 얼마든지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다. 우리말 대체가 어렵지 않다는 것은 굳이 그걸 영어와 섞어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말과 영어를 섞어 쓰는 데 어떤 자의식도 갖지 않게 된 것 같다.

이런 현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이들은 영어와 우리말 사이의 뉘앙스가 다르다는 걸 강조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무심하게 쓰는 이들이 두 말의 미묘한 차이까지 의식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라리 익숙하지 않은 표현으로 말하고자 하는 걸 강조하려고 한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언중들은 말을 하는데 들이는 노력을 가능한 한 줄이려 한다. 이른바 언어의 ‘경제 원칙’이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이 경제 원칙에 따라 사람들은 ‘신라[sin-ra]’라 발음하지 않고 ‘실라[sil-la]’라 발음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음운현상이 생기는 이유다.

그러나 요즘 유행처럼 쓰이는 말들은 그런 경제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올리다’거나 ‘살리다’라고 말할 상황을 ‘업(up)시키다’, ‘가라앉다’나 ‘내리다’로 쓰면 족할 장면에서 ‘다운(down)되다’를 쓰는 걸 경제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말은 ‘핫하다’다. 영어 ‘hot’에다 접미사 ‘-하다’를 붙인 이 말은 그예 뉴스에까지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스포츠 신문이나 연예 뉴스를 다루는 온라인 언론에 그치지 않는다. 그건 방송은 물론, <한겨레> 신문과 주간지 따위에도 아주 늠름하게 올랐다.

첫 스윕 첫 5연승 롯데, 6월 최고 핫했다 - <스포츠조선>
상속자들 박신혜 김우빈 “키스보다 강렬하고 포옹보다 핫하다” - <SBS>
손승원 “별명 ‘애드윅’, 아기 같다고 형들이 붙여줘…아직 핫하다 - <TV데일리>
아찔하게 짧아야 ‘핫’하다 SHORTS - <여성동아>
‘화신’ 정웅인 “대세 인정…내가 요즘 핫하다” - <OSEN>
이승기♥윤아, 20대 톱들의 커플 탄생…그야말로 ‘핫하다’- <OSEN>
지금 페이스북에서 가장 핫한 남자, 유준호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영화제는 여름보다 핫하다 - <씨네21>

스포츠나 연예, 대중문화 기사에서 보는 ‘핫하다’와 달리 일간지, 그것도 정치 기사에서 보이는 ‘핫’은 묘하다. 한글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영자 쓰기에도 매우 고집스런 원칙을 지니고 있는 <한겨레>에서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국무총리실은 기자 입장에서 그렇게 핫한 취재처가 아니다. - <한겨레>


이제 영어는 우리 일상 깊숙히 들어와 있는가

▲ 경북 영양군의 브랜드슬로건

이들 매체에 쓰인 ‘핫하다’를 우리말로 옮기면 어떨까. 단순화하면 ‘뜨겁다’나 ‘맵다’로도 족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다소 뉘앙스가 다른 말로도 옮길 수 있을 터이다. <다음>에서 찾은 ‘hot’는 무려 서른 가지 이상의 뜻으로 새겨지고 있으니 말이다. 고추로 유명한 경북 영양의 브랜드슬로건이 ‘핫 영양’인 것도 비슷한 의미망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사실 ‘핫하다’는 사실 그리 ‘뜨거운’ 느낌을 주는 단어는 아니다. 청각에 주는 자극의 강도로 치면 ‘뜨겁다’에 쓰인 된소리 앞에 ‘ㅎ’쯤은 명함을 내밀 형편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그걸 의도적으로 선택하기 시작한 것일까.

‘뜨겁다’라는 낱말이 주는 느낌이란 단순히 거기 쓰인 자모의 조합만이 아니다. 그것은 학습된 의미와 결합되면서 입체적인 느낌으로 바뀌어서 소통되는 것이다. 영자 ‘핫’이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결국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환기할 만큼 영자가 우리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인지 모른다. 한때의 유행어만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그래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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