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사늑약(1905)의 전문. 일제는이 강제 불법 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2015년 영화 이 천만대 관객을 모으면서 사람들에게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시기 역사를 새삼 돌아보게 한 것은 뜻밖의 덤이라고봐도 좋겠다. 이 잘 만들어진 한 편의 활극은 흥미진진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인과로서의 ‘지금, 여기’의 문제를환기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잊힌 이름인 약산 김원봉이나 친일파, 의열단, 반민특위와 같은 현대사의 몇몇 장면들과 함께, 오늘 우리가 누리고있는 이 혼곤한 자유의 근원을 잠깐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해방
▲김치를 만드는 과정인 김장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며 가족간 협력 증진의 중요한 기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3년 12월 5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정부간 위원회’에서 한국의 김장문화(Kimjang: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를 인류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김장
▲영친왕 이은망국의 황태자에겐 자기 삶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고종의 일곱째아들로 1907년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에 황태자가 되었고, 1926년순종이 죽은 뒤에는 이왕의 지위를 계승했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 이야기다.1907년, 통감(統監)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후견인으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은은 일본인으로 살았다. ▲1907년 황태자가 된 이은은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일본의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1940년 육군 중장이 되었다
▲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1896~1934). 세계한민족문화대전1934년 9월 20일, 랴오닝성 환인(桓仁)현 대랍자구(大拉子溝)에서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1896~1934) 장군이 매복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했다. 향년 38세. 이십 대 초반에 무장 항일투쟁을 시작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총을내려놓지 않았던 사람, 양세봉은 전투의 현장에서 죽었다. 그는 조선혁명군으로 싸운 다섯 해 동안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과 80여차례 전투를 벌여 일본군 1천여 명을 죽였고, 흥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를 승
ⓒ한국포장재재활용사업조합아파트 단지 안에서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들거나 재활용 쓰레기를 가득 담은 수레를 밀고 가는 남자들을 만나는 것은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출근 시간에 쓰레기봉투를 쓰레기장의 폐기물 보관 용기에 서둘러 집어넣고 종종걸음을치는 젊은 남자를 보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제 더는 집안일이 여자 몫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하는 일이 된 것이다. 퇴직하기 전에만 해도 내가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내가바빠서 손이 모자라거나, 내가 하던 작업을 정리하느라고 가끔 쓰레기장에 들르는 일이 고작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국립국어원얼마 전, 어떤 인터넷 언론 기사에서 아내를 ‘와이프’라고 쓴 걸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에 게재된 기명 기사에 ‘와이프’가 여러 차례 쓰였다. 개인 블로그도 아닌 공식 기사에 당당히 쓰인 ‘와이프’는 그러나 천박하고 무례해 보였다. 신문이나 방송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매체라는 사실을 기자는 깜빡 잊었던 것일까. 공식 기사에서 그런 외국어를 쓰는 게 실례라는 걸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니, 어쩌면 그 기자 세대에서는 그 정도는 일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공적 장소에서
“학대·차별 없었다”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95세 강제징용 피해자의 남은 소망은▲ 군함도. 미쓰비시가 운영한 이 탄광의 일부도 산업혁명 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일본은 여기서 강제동원과 희생을 지워버렸다. ⓒ 위키백과조선인 강제 노동의 역사적 현장인 군함도(하시마)가 다시 뉴스에 불려 나왔다. 일본이 이 섬에 대한 ‘역사 왜곡’을 시도하자 외교부에서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하면서다. 외교부의 항의는 일본이 2015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등록할 때 한국인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알리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는 타이항산 폔청전투에서 전사 순국했다. ⓒ밀양시▲ 타이항산 연화산 아래 윤세주 열사 초장지. 돌비에 ‘조선 민족 영령’이라는 글귀를 한글 풀어쓰기로 새겼다. ⓒ김태빈1942년 6월 3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 석정 윤세주(1901~1942)가 타이항산 석굴에서 순국했다. 허베이성 폔청에서 일본군의 제팔로군 소탕 작전에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은 지 닷새 만이었다.폔청 전투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 타이항산맥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타이항산 전투 가운데 후자좡 전투·싱타이 전투(1941)와 함께
▲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로 입성해 기자회견을 하는 백선엽 당시 1사단장 ⓒ다부동 전적기념관 야외 전시 사진최근 한국전쟁의 ‘영웅’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한 백선엽(1920~ ) 예비역 대장과 관련 뉴스가 뜨겁다. 언론이 올해 100세가 된 백 대장을 불러낸 것은 그가 사망하게 되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기 때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한국전쟁 영웅’ 사이한국전쟁 초기 전세를 뒤집은 ‘낙동강 다부동 전투(1950)’를 비롯해 ‘평양전투(1950)’와 ‘중공군 춘계공
▲ 광주 시민들은 항쟁 기간 다섯 차례에 걸쳐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어 의지를 다졌다.1980년 5월 27일, 신군부 수뇌부가 투입한 계엄군은 광주 재진입 작전을 펼쳐 시민들의 항전을 제압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47개 대대 2만 317명으로 편성한 계엄군이 5개 방면을 통해 광주로 일제히 진입한 이 작전의 계엄군 측 공식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이었다.일요일인 5월 18일, 학생 시위대와 7공수 부대의 충돌로 시작된 시위는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과 비무장 시민을 향한 발포로 다수의 시민이 사망하면서 자위를 위한 항쟁으로
ⓒ노무현 사료관2009년 노무현이 떠난 이후, 그해 5월 24일과 29일에 썼던 두 편의 글로 그를 추억·추모하고자 한다.노무현, 남은 자들의 성찰과 참회 (2009. 5. 24. 작성)▲ 노무현의 눈물. 그를 생각하는 국민감정은 애증이 교차할지 몰라도, 그의 진정성은 누구나 인정한다.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접한 곳은 서울 교사대회로 가는 전세버스 안에서였다. 누군가가 그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무섭게 차내 TV의 뉴스 채널은 그의 죽음 주변을 계속해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망 사실을 확인해 줬고, 이내 그가
* 2011년 4월 25일 작성된 글입니다.▲ 해마다 고독사도 늘고 있다고 한다. ⓒMBC 화면 갈무리많은 사람에게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되어 세상을 뜨는 게 인생이다. 자식이나 부모는 인간의 삶에서 대부분 거치게 되는 사회적 지위니 그게 대수로울 일은 없다. 그러나 시절이 하 수상하니 그런 지위로 사는 일도 예사롭지 않아졌다.“자식들 짐 되기 싫다”고 하며 말기 암을 앓고 있는 부부가 음독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암에 걸려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60을 갓 넘긴 아버지와 50대 중반의 어머
▲ 세계 언론자유지수 지도. 색깔이 진할수록 언론 자유 상황이 나쁜 나라다. ⓒ 국경 없는 기자회 국경 없는 기자회(RSF : Reporters Without Borders)가 발표한 ‘2020 언론자유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41위에 이어 42위를 기록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60~70위대로 떨어진 순위는 문재인 정부 들면서 40위대를 회복한 뒤 이 순위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참여정부 당시 31위로 최고 순위를 기록했던 우리나라는 박근혜 정부 때부터 하락을 거듭하여 2016년에는 70위로 떨
▲ 김부겸 후보가 15일 오후 9시 52분쯤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총선 패배를 선언했다. ⓒ연합뉴스미래통합당 소속의 정치인들이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나 ‘폭주’, ‘폭정’ 같은 원색적 표현으로 비난하기 시작한 것은 자유한국당 시절부터였으니 그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표현의 정합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정치인의 언어와 표현이란 그 정치적 편향성만큼이나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했다.‘폭정’과 ‘생지옥’, 주권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예의 표현은 그들의 주관적 정서이면서 동시에 자당 지지자들에게 상대
1960년 4월 19일은 화요일이었다. 전날, 평화적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고려대학생들이 경찰과 공모한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로 다친 뒤라 분위기는 잔뜩 격앙돼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나둘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섰고 이내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 사망 186명, 부상 6026명▲ 혁명은 4월 18일,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타도'로 바뀌고 있었다.애당초 ‘부정선거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외쳤던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는 경찰의 폭력 진압 앞에
▲ 군과 하나가 된 시위대가 계엄군의 탱크에 올라서 환호하고 있다. ⓒ4월혁명회▲ 3.15 대통령선거 포스터. ⓒ국사편찬위원회▲ 마산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 경찰은 최루탄으로 이를 막으려 했다.▲ 시위대가 중앙청을 향하고 있다.4·19 혁명 60돌을 맞는다. 한국전쟁의 상처도 채 아물지 못한 1960년 벽두에 들불처럼 타오른 청년 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분노는 독재자 이승만의 노욕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민주 정부를 세워냈다.그러나 새 정부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분출하는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
▲ 수운 최제우1864년 3월 10일 오후 2시, 대구 남문 밖 아미산 아래 관덕당 뜰에서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가 참수됐다. 죄목은 ‘사도난정’,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동학으로 바꾸고 세상을 헷갈리게 하고 어지럽힌 죄’였다.1860년 4월 깨달음을 얻고 동학의 가르침을 시작한 뒤 불과 4년 만에 그는 불꽃 같은 삶을 형장에서 마감했다. 향년 40세. 1863년 12월에 체포돼 다리뼈가 부서지는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뒤였다. 두 눈을 부릅뜬 그의 머리는 사흘 동안 대구 남문 밖 길가(오늘
▲ 로잘린드 마일스 (파피에, 2020)“역사적 기록이 보여주는 대로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도 여성들이 극도의 성폭력, 즉 그들의 육체는 오직 남자와 관계할 때만, 남자의 쾌락을 위해서만, 자식을 낳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제2부 여성의 몰락(204쪽) 중에서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일명 ‘n번방 사건’)은 인터넷 및 통신 기술(ICT)을 활용한 성범죄의 급속한 진화와 함께 성범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둔감을 날것으로 드러내줬다.이 사건 주범들
지난 3월 26일 4·16재단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다. 책자인 듯해 뜯어보니 다. 나한텐 안 보내줘도 괜찮은데, 중얼거리며 꺼냈더니, 손바닥만 한 비닐로 포장한 손수건 같은 게 나왔다. “4·16공방에서 세월호 엄마들이 정성껏 만든 컵받침”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때는 2014년이었다. 역 광장에서 촛불이 켜지고, 그해 4월은 아프고 더디게 흘렀다. 날마다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끝내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아이들 곁에 가 보지 못했다. 부지런한 이웃들은 멀다 하지 않고 팽목
* 2017년 3월 27일 글을 재발행합니다.▲ 1923년 10월 24일, 박열과 가네코는 대역죄로 기소됐다. 사진은 공판이 열리던 재판정의 모습1926년 3월 25일 일본의 최고재판소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기소된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과 그의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결심 공판이 열렸다. 정복과 사복 차림의 경찰 200여 명과 헌병 30명이 법정 출입자를 삼엄하게 검문하는 등 법원 안팎을 통제하고 있었다.박열-가네코 부부,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다재판장은 선고 전에 일어설 것은 명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