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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체국'에 가도 사랑을 찾을 수 없다

  • 입력 2014.06.30 14:56
  • 수정 2014.06.30 15:07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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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말로 구미에서는 50여 개의 우체통이 철거된다고 한다.

출근길, 학교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신호대 옆 우체통이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 제자에게 쓴 편지를 부친 우체통이다. 우편물 투입구 앞에 안내문 하나가 붙어 있었다. 길이대로 뉘어서 붙여놓은 ‘우체통 철거 안내문’이다.

그 동안 고객님께서 이용해 주신 우체통이
수집물량 저조로 인하여 2014년 7월 1일자로
철거 예정이오니 양지하시기 바라며,
향후 우편물을 발송하실 경우에는
인근 도량우체국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교 앞 우체통이 철거된다

안내문에서 말하는 ‘수집 물량의 저조’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애당초 아이들을 겨냥해 학교 앞에 설치한 우체통이지만 요즘 아이들이 언제 편지를 쓰는가 말이다. 안내문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이번에 철거하게 될 우체통이 관내에 50여 개라고 한다. 철거되는 우체통 수만큼 우리 삶에서 편지로 나누는 교유는 줄어들게 될까.

우체통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부터다.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우체통은 1993년의 5만7천여 개를 정점으로 점점 줄기 시작하더니 2013년에는 1만9121개로 쪼그라들게 되었다. 우체통을 줄인 것은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개인 통신장비의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우체국 업무도 편지나 연하장 배달보다 택배와 지로용지 집배로 바뀌게 되었다.

▲ 감옥에서는 봉함엽서를 쓰는 경우가 많다. 고 윤영규 선생께서 구치소에서 보내주신 편지.

지난해 인근 우체국에서 봉함엽서를 사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우체국 직원들조차 봉함엽서를 잘 알지 못했다. 이러저러하다고 설명했더니 며칠 있다 와 보라고 했다. 사나흘 후에 갔더니 본청에 가보란다. 맥이 빠져서 알았다고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는 봉함엽서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체국과 봉함엽서의 추억

봉함엽서라면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보낸, ‘검열필’ 스탬프가 찍힌 편지(뒤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편지지와 봉투를 하나로 묶은 이 엽서는 수형생활을 하는 이들이 즐겨 쓴다. 전교조 초대 위원장이셨던 고 윤영규 선생이 수감 중일 때 보내주신 봉함엽서가 지금도 내 서랍 속에 남아 있다.

고교를 졸업하고 입대하기 전까지 두어 해 동안 나도 엽서류를 즐겨 썼다. 나는 우체국에 가서 엽서나 봉함엽서를 샀고, 이런저런 일상과 젊음의 번민을 담은 이야기를 중언부언한 엽서를 친구들에게 부치곤 했다. 봉함엽서는 따로 봉투에 넣을 일도, 우표를 사 붙일 필요도 없으니 무료한 20대 젊은이에게 아주 생광스러운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향의 시골집 옆이 우체국이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지은 슬래브 건물로 인근에서 일제 때 건설된 면사무소보다 훨씬 세련된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유치환의 연시 ‘행복’을 외우던 시절부터 내 머리 속에 각인된 우체국의 모습과는 달리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대리석 카운터 너머 몇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우체국은 늘 한산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 유치환 ‘행복’ 중에서

▲ 우체통의 변천. 내겐 빨강과 초록을 쓴 놈이 제일 친숙하다. ⓒ 사이버우정박물관

건물의 상단 중앙에 날개 달린 빨강색 ‘우’자 모양의 우체국 심볼이 박힌 우체국 건물 앞에는 요즘과는 달리 빨강과 초록으로 단장한 우체통이 매우 조신하게 서 있었다. 당시의 집배원은 정모(正帽)에다 어깨에 메는 가죽가방을 메었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했다.

우체국과 이어지는 기억의 자락은 꽤 깊다. 70년대 후반에 고향에도 전화가 들어왔다. 몸통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원을 부르는 ‘자석식’ 전화기였다. 두 자릿수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교환원이 연결해주었는데, 젊은 여성이 듣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고 통화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전화 덕분에 도회에서 들어온 젊은 여자 교환원과 지역 청년과의 로맨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1년에 공기업 한국전기통신공사(KTA)가 설립되면서 통신업무가 체신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우체국이 더 이상 전화와 관련된 업무를 취급하지 않게 된 것이다. 대신 요즘 우체국은 미래창조과학부의 우정사업본부 소속 기관으로 우편물의 접수·운송·배달 같은 본연의 우정 사업 외에도 우체국 예금·우체국 보험 등 금융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다. 우체국마다 ‘365코너’가 운영되고 있는 것은 그래서다.

▲ 새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마련했지만, 언제쯤 다시 여기에다 만년필을 눌러 편지를 쓰게 될까.

그러나 우리 세대에게는 여전히 우체국과 우체통이 환기하는 것은 교감의 본능이다. 이수익 시인이 ‘우울한 샹송’에서 노래한 우체국은 바로 그런 곳이다. 우체국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 애정(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가는 곳이다.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할 것 같은 곳, 시인이 그걸 노래한 때는 1969년이었다.

시인이 우체국을 노래한 지 어느새 45년이 훌쩍 흘렀다. 더 이상 사람들은 우체국에서 ‘잃어버린 사랑’ 따위를 찾지는 않는다.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대신 연인들은 휴대전화로 육성을 나누고 혀 짧은 문자메시지로 교감한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지하듯 연인들도 몇 마디 문자로 이별을 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침에 동네 문구점에 가서 필기구 몇 자루와 한지로 만든 편지봉투를 한 묶음 사 왔다. 지난 번 편지 쓸 때는 찾지 못했던 몇 종류의 편지지와 함께 그걸 서류함 한쪽에 갈무리한다. 만년필에 잉크를 다시 넣고, 김미숙이 낭송하는 ‘우울한 샹송’을 들으면서 언제쯤 다시 편지를 쓰기 위해 서랍을 열게 될까를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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