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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에 ‘강간문화’가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 입력 2017.12.15 18:05
  • 기자명 한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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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얘기하자면 이 글에서 우리는 강간문화에 대해 알아볼 겁니다. 때문에 이 강간문화라는, 아주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들릴 단어가 이 글에선 많이 등장할 거에요. 아마 20번도 넘게 등장할 겁니다. 만약 당신이 강간문화란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멘탈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으실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강간문화를 피해 이 글에서 도망치시기 바랍니다.

▲강간문화 논란을 불러 일으킨 한 장의 포스터. 현재 해당 세미나는 성황리에 끝났다고.. ⓒ철페

얼마 전 고려대학교는 한 포스터 때문에 난리가 났죠. 고려대 페미니즘 소모임인철페회원들이 제작한 포스터였는데요. 거기엔강간문화를 비판한다는 말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습니다. 포스터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죠.

고려대학교 내의 강간문화를 비판한다고? 고려대학교엔 강간문화가 있다는 건가? 아니 근데 강간이 문화라니? 그럼 고대생들은 죄다 강간범이란 건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보통 우리는 강간을 싫어합니다. 강간은 세상에 둘도 없는 끔찍한 범죄이며 나는 그것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죠. 강간문화라는 단어는 바로 그 믿음을 건드립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화를 냈죠.

그런데 사실 강간에 대한 우리의 그런 인식, 감정, 믿음이야말로 이번 논쟁의 핵심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요? 설명 전에 우선 강간문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1. 강간문화가 무엇인가요?

꽤 많은 사람들이강간문화를 마치한자문화국물문화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한자문화는 한자를 주로 사용하는 문화, 국물문화는 국물을 즐겨 먹는 문화, 그러니 강간문화도 강간을 자주 하고 즐겨 하는 문화! 물론 강간문화라는 단어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없다를 논하기 전에 일단은 사실이 아닙니다.

강간문화라는 단어는 197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졌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여성에 대한) 강간, 또는 성폭력이 만연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을 가리킵니다. 이 환경을 만드는 건 대중문화, 미디어, 나아가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한 사회적 태도들이죠.

물론 넓고 추상적인 이야기입니다. 해서 다시 물을 수 있죠. 그렇다면 강간이 일어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사회적 태도(내지는 분위기)가 대체 뭐냐? 그게 뭐길래 국물문화나 한자문화와는 다른 강간문화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냐? 그게 진짜 있기 한 거냐?

2. 강간문화가 진짜 있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진짜 있습니다. 여기선 크게 두 가지만 얘기해보죠. (1)첫째는 강간과 강간 피해자에 대한 시선 문제입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서 우리는 강간에 대한 대중의 흥미로운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사에서 남성 응답자의 54.4%는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56.9%는여자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차를 얻어 타다 강간을 당했다면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47.7%는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거나, 모르는 남자의 차를 얻어 타거나,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게 왜 강간의 귀책사유가 되는 걸까요? 강간을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런 시선은 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그들의 입을 막습니다. 때로는 범죄자를 옹호하고 두둔하는 효과를 내죠. 강간범죄에 대한 사회적 용인’, 강간문화의 일종입니다.

(2)두 번째는 사회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저는 방금 강간범죄에 대한 시선을 문제 삼았는데요. 이번 이야기는 그 시선이 왜 생기는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죠.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돼지발정제 논란을 생각해 볼까요? 돼지발정제 이야기는 홍준표 당시 대선후보의 후보직 사퇴가 거론될 정도로 큰 논란이 됐습니다만, 문제는 이게 그리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독한 술을 먹이든 술에 이온 음료를 타든 여성을 인사불성으로 만들어섹스 한 번 해보자는 식의 이야기는 2017년에도 흔합니다.

ⓒjtbc ▲홍준표야 유명하지요. 그런데...

▲여전히 '술 취하게 해서 섹스 해보자'는 말은 흔한 유머입니다. ⓒSNS, 인터넷 커뮤니티 갈무리

그뿐인가요? 소위 말하는 남성들의 호모 소셜리티 속에서 여성들은 품평과 희롱의 대상, 혹은 따먹어야 할 대상으로 소비되곤 하죠. 으레 묻는했냐?” 같은 질문들, 먹고싶다 맛있겠다, 여성을 음식으로 비유하는 드립들. 뭔가 익숙한 풍경이죠?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문제 되고 있는 남톡방 사건들은 남성 호모 소셜리티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사진은 2016년 문제가 됐던 고려대 남톡방 사건의 대화 일부입니다.

두 사례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성에 의해) 여성이 섹스의 대상, 즉 성적 객체로 소비된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욕망이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죠. 왜 이런 일이 발생하고 또 대물림되는 걸까요?

우리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성에 있어서 여성의 욕망, 여성의 의사등을 가르치지 않아왔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보통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이 보호하거나 내어줘야 할 섹스의 대상이라 가르치고, 남성에게는 그 몸을 욕망하고 쟁취하라 가르쳐 왔어요. “대중문화, 미디어, 나아가 사람들의 관습적인 의식등을 통해서 말입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구현하는 편중된 재현 방식들. 그러니까 로맨스로 미화되는 폭력적인 상황들이나 포르노처럼 구성되는 성폭행 보도들,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며 이루어지는 각종 광고, 게임 같은 것들 대부분이 남성은 성의 주체, 여성은 성의 객체로만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의 욕망을 가르치지 않는 사회적 환경에 해당합니다.

<서든어택2>는 게임과 상관없는 여성 대상화를 보여줬었죠. 여성의 몸은 언제 어디서나 욕망의 대상으로 그려집니다.

성적 상상과 욕망을 모두 포함하는 성적 경험의 총체를 섹슈얼리티라 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섹슈얼리티는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있죠. 아까 말한 시선의 문제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여성의 욕망과 의사에 무관심한 사회가 여성의 욕망과 의사에 무관심한 강간을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시선은 언제나 주체의 입장을 따라갑니다. 이 편중된 상황이 바로 넓은 의미의 강간문화죠.

3. 강간문화의 의의는 뭘까요?

여전히 강간문화란 개념이 대중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라는 논제가 남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글에서 그건 잠시 미뤄두겠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부분은 철페 회원들이 강간문화를 왜 문제시했으며 그게 어떤 의의를 가지냐는 것이니까요. 이제 강간문화 이야기의 결론을 내봅시다.

강간문화 포스터를 가열차게 비판했던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에선 언어 성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고려대에선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남톡방 사건이 터지기도 했죠 성폭력 사건과 사건 이후 피해자 비난하기등으로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다뤘죠?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강간문화고, 철페 회원들이 고려대 내 강간문화를 비판하고 나선 이유였습니다.

▲학교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의 언어 성폭력은 흔한 일입니다. 이런 거랑..

▲이런 거죠. 위 두 사진은 고려대가 아닌 서강대 커뮤니티 서담의 캡처본입니다.

고려대가 특히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죠. 강간문화가 고려대의 것인 게 아니라 사회의 강간문화가 고려대에도 있는 거니까요. 남자의 경우가 더 취약하겠지만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강간문화에 몸담고 있을 때가 많죠. 그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긴 쉽지 않습니다.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요.

극단적인 강간범 조두순을 욕하는 건 쉽지만, 덜 자극적인 수많은 성폭력을 인지하는 건 어렵죠. 그게 문제인가? 하는 관습적인 의식이 있으니까요. 성폭력을 만들어 내는 사회적 배경을 짚어내는 건 더욱 피곤한 일입니다. 섹슈얼리티가 편중돼 있다고? 그렇지만 여자가 그렇게 취급되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하고 넘어가기가 쉽죠. 사실은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그냥 조두순을 욕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성폭력과 관계없다고 믿죠. 편리한 세상입니다. 아침에 단톡방에다 그 여자 봤어? 존나 맛있겠더라 따위의 농담을 던져도 저녁에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에 서명하면 우리는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강간문화란 단어의 의의요? 간단합니다. 이 짓을 멈추자는 거죠. 편리했던 세상이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말입니다. 그래도 일단 강간문화란 말은 좀 그만하라고요? 아직 안 도망가셨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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