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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고문기술자 3인방

  • 입력 2017.08.29 15:20
  • 수정 2020.07.18 03:06
  • 기자명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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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에서 고문을 거론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셋 있습니다.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에서는 노덕술, 5공 시절에는 이근안, 6공 시절에는 정형근 전 의원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고문 피해자들에게 그들은 마치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 하나 자신의 고문 행각에 대해 제대로 된 사죄나 참회를 한 적도 없고 특히 노덕술과 정형근은 응당한 죗값을 치르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는 이들을고문기술자라고 기록하는데 이들 3인의 행적은 우리 현대사의고문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또 부상자(?) 치료를 핑계로 이들 곁에서 고문을 묵인, 협력한불의한 의사들의 반인륜적인 행위 또한 묵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1. 노덕술

1948 7 26, 정부수립을 20여 일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대형 고문 사건이 터져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세칭수도청 고문치사사건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해 1 24일 발생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저격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함북 무산 출신의 박성근을 혐의자로 체포해 중부경찰서에서 취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있던 노덕술이 취조실로 찾아와 박성근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했는데 박성근이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노덕술은 박성근의 시신을 한강에 버리라고 지시한 후 수도청 부청장 김태일의 도움을 받아 급히 몸을 숨겼습니다.

고문왕 노덕술

도망을 다니던 노덕술이 붙잡힌 것은 이듬해인 1949 1 25일 새벽이었습니다. 그해 1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 검거를 시작으로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에서 그를 서울 시내에서 검거한 것입니다. 검거 당시 노덕술은 무기를 소지한 채 경찰관 4명의 호위를 받아 또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노덕술은 도피 중에도 권력층의 비호를 받았는데 그가 구속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에 노덕술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지지부진한 재판 끝에 노덕술은 7 23일 만성기관지염 등 다섯 가지 병명을 이유로 공탁금 10만 원을 걸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무죄가 선고됐으며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1899년 경남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난 노덕술(창씨명 松浦 ) 1920년 순사교습소를 마치고 그해 경남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경찰에 입문했습니다. 일제 당시 그는 경남지역 여러 경찰서의 보안과, 고등계, 사법계 등에 근무하면서 주로 사상범, 즉 항일투쟁가들을 다뤘습니다. 말하자면 독립운동가 때려잡은 일제 앞잡이인 셈입니다. 동래경찰서에 재직 중이던 1928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 박일형을 체포해 고문했으며 그해 겨울에는 반일단체 혁조회관련자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해 고문했는데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말 옥사했습니다. 이밖에도 그는 동래·통영경찰서 사법주임 시절 수차례 반일단체 탄압에 나섰으며 일제 말기 평남 보안과장 시절에는 전쟁협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2. 이근안

남영동에서 20여 일간 고문을 당하는 동안는 항상 핏발선 눈빛이었고, 90kg이 넘어 보이는 거구로 칠성판 위에 묶고는 깔고 앉아 목을 조르고 물고문, 전기고문, 발바닥 구타 등을 쉼 없이 했다.” (전노련 사건 고문피해자 박문식 씨 증언. 한겨레, 1988.12.21.)

시멘트 바닥에 3시간가량 무릎을 꿇려 놓았다가 자신의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일도 있었다. ‘는 항상 눈에 핏발이 서 있었으며, 칠성판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자랑하기도 했었다.” (김태홍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증언. 동아일보, 1988.12.22.)

‘그’로부터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그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90kg이 넘는 거구에 칠성판을 발명한 고문의 대가 그. 그는 이 별명 외에도성명불상자’ ‘반달곰’ ‘고문기술자등으로도 불렸는데 그가 바로 5공 시절 고문왕 이근안 전 경감입니다. 이근안은 치안본부(경찰청 전신)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면서 각종 시국사범의 고문 수사를 지휘해온 장본인입니다. 이근안은 민주화가 되면 너희들이 나를 고문해라고 말했을 정도로 파렴치할뿐더러 목사가 된 후공안목사라는 딱지를 달고 있습니다. (* 현재 목사 직을 잃은 상태) 고문 경찰관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의 인생역정을 한번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1999년 구속 수감 당시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의 모습

이근안은 공군 헌병 출신으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습니다. 1972년부터 대공 분야에 근무하게 된 그는 매번 특진으로 승진을 거듭해 1984년 경감에 올랐습니다. 고문 혐의를 받고 잠적할 때까지 그는 근무 기간 대부분을 대공 분야에 몸담은 이른바공안통이었는데, 재직 기간에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은 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간첩검거 유공이 4, 1979년 청룡봉사상(조선일보사 시상),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1982국가안보 기여 9사단장 표창, 1986년엔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받은 표창의 이면에는 무수한 고문 피해자들의 피 울음과 절규가 서려있는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동안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은 그가 고문했던 고 김근태 전 의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1988 6 30일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김 전 의원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차례에 걸쳐 자신을 고문한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가 이근안임을 밝혀냈습니다. 김 전 의원은 이재오(서울민중연합의장, 현 늘푸른한국당 공동대표), 이선근(전노련 사건 관련자), 박문식 씨 등 3인을 통해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들을 고문한 이근안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김 전 의원의 제보를 받은 문학진 <한겨레> 기자(현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하남시 지역위원장)의 끈질긴 추적 끝에 <한겨레신문>의 특종보도(1988.12.21)를 통해 비로소 이근안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그의 신상이 확인되자 고문피해자들은 그를 불법체포 및 고문 혐의로 정식 고발했고 그는 마침내 수배됐습니다.

세상에 얼굴이 알려지자 이근안은 곧바로 잠적했습니다. 그러나 검경은 그를 체포하는 데 미온적이었습니다. 경찰은 검거 노력은커녕 오히려 그가 은신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치안본부 5차장이던 박처원 치안감과 동료 경찰관들은 조직적으로 그를 비호했습니다. 특히 박처원은 도피 중인 이근안에게 1,500만 원을 생활비조로 지급했으며 수배 중인 그가 퇴직금까지 받아가도록 도와줬습니다. 1992년 가을 당시 김수현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반장은 이근안의 집으로 찾아가 숨어 있던 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집 벽장에서 숨어 지내던 이근안은 1999 10 28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했고 1999 11월에 구속 기소됐습니다. 2000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 자격정지 7년이 확정됐는데 그가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것이랄 수 있습니다.

출옥 후 2008년 목사 안수를 받는 이근안 씨

2006년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돌연 성직자로 변신했습니다. 도피 시절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그는 옥중에서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이수한 후 2008 1030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음 아고라에서 그의 목사 안수 취소 움직임이 이는 등 반발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 전 의원 타계를 계기로 그의 근황을 전하는 보도가 잇따랐는데 2011 12 31일 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그는 2010년부터 각종 언론 인터뷰에 응해 과거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하는가 하면 목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대외활동에 나서 안보태세를 강조하는 등 과거 공안수사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공안수사관공안목사로 변신한 셈입니다.

3. 정형근

“1986 12월 크리스마스이브 전인 22일경, 정형근 당시 대공수사단장이 고문을 받고 있던 내 앞에 나타났다... 부하들이 순식간에 양쪽으로 3명씩 일렬로 서 차렷 자세로 허리를 굽히자 정형근은 이들을 향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15일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간첩이라고 불지를 않아?” 하며 소리를 쳤다. 정형근은 담배연기를 한 모금 내뿜더니심진구, 이제는 간첩이라고 불 때가 됐는데. 여기 잡혀오면 15일 이내에 다 불지 않는 사람은 없어. 여기가 어딘 줄 알아? 국회의원도 잡아다 줘 패는 곳이야. 간첩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돼.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죽어... 너 북에 갔다 왔지?” 하면서간첩 소리 나올 때까지 더 족쳐!”라고 말했다. 그러자 실장과 대머리에 눈이 치켜 올라간 부하가 몽둥이로 내 가슴을 후려쳤다...” (심진구, “간첩소리 나올 때까지 족쳐!”, 오마이뉴스, 2004.12.20.)

5공 시절 고문왕으로 이근안이 유명했다면 6공 들어서는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의 이름이 자주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심진구 씨를 비롯해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관련자 하영옥 씨 등은 정형근이 고문 현장에 나타나 고문을 지시하거나 혹은 고문수사관들을 격려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또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 관련자 양홍관 씨는 2004 12 14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정형근으로부터성기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의 고문 사실을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 전 의원은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한결같이 부인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문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심진구 씨가 그린 정형근 몽타쥬(좌), 정형근 전 의원(우)

2001 1 30일 검찰은 이른바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과 관련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서 씨로부터 북한 공작금 1만 달러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리면서 과거 검찰수사가 조작됐음을 시인했습니다. 검찰은 또 당시 서 씨의 진술이 수사당국의 고문 등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하면서 서 씨를 고문한 사람은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밝혔습니다. (경향신문, 2001.1.31.) 정형근이 서 씨를 고문했다는 사실은 안기부 직원이 직접 증언한 바도 있습니다. 그 직원은(형근) 국장이 고성을 지르는 소리가 (조사실)밖으로 새나왔으며 조사를 마친 뒤 들어가 보니 서 전 의원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습니다. (한겨레, 1999.11.20.)

안기부 재직 시절 고문 혐의로 10건 가까이 피소됐으나 그는 용케도 법의 심판을 비켜 갔습니다. 그는 무려 23차례나 검찰의 소환통보에 불응했고 마침내 검찰은 그에 대한 긴급체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직 국회의원 신분이어서 한나라당의 강력한 비호로 번번이 실패한 나머지 수사는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1983년 안기부 법률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는 안기부 요직(대공수사국장, 기획판단국장, 수사차장보, 1국장, 1차장)을 거쳐 1996년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공천을 받아 부산에서 3선을 했으며,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고문 의혹에 휩싸여온 그는 1999년 제네바 유엔인권위원회에 참석해 국내 인권단체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대체 그가 생각하는인권은 어떤 것일까요? 설마 고문 수사는 아니겠지요?

4. 불의한 의사들

1999 3월 브라질 의사협회는 의사들을 상대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1964~85년까지 군사독재시기에 정치범을 상대로 고문에 참여한 의사들의 면허취소를 위해 개최한 청문회였습니다. 당시 군사감옥에서 일했던 26명의 의사가 그 대상자였습니다. 대상자 가운데 쿠틴호(당시 58)라는 의사는 1969년 정치범 11명의 고문을 감독한 책임으로 기소됐습니다. 일부 의사들은 정치범들의 사망원인을 허위로 기재한 진단서에 서명한 혐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칠레의사회는 군사정권의 불법행위에 대해고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통해의사는 누구든 고문에 협조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만약 부득이 고문에 협조했다면 이를 의사회에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독일 나치점령 시절 강제수용소에서 의사들이 고문이나 인체실험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는데 아우슈비츠에서 악독한 인체실험을 한죽음의 천사요제프 맹겔레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일본 관동군 731부대 소속 의사들이 생체실험하는 장면

위에서 보듯이 의사가 고문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계된 경우는 적지 않은데 이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기부나 보안사, 치안본부 등에서 고문자들이 고문하다가 사고가 나거나 고문으로 난 상처를 송치 직전에 속히 치유하기 위해 의사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또 의사들이 진단서에 허위사실을 기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문 은폐에 도움을 준 사례도 있습니다. 안기부나 보안사에는 전담 의사가 상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체격이 건장한 남자로부터 눈과 얼굴을 얻어맞아 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온몸이 새빨갛고 얼굴이 퉁퉁 부었을 때 의사가 왔었다. 그는 피로 물든 내 눈을 보자 특별한 약은 필요 없고 시간이 가면 낫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를 보고 고문자들에게보다 더 소름이 끼쳤다. 약을 날라다 주던 한 직원마저마치 6.25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고 말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서울노동운동연합사건 서혜경 피고인 진술, 1987)

... 의사가아픈 데는 없느나면서 여기저기 쿡쿡 눌러 봐요. 간호사 아가씨에게 저쪽으로 가라고 한 뒤에 내 낭심도 보고.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주 무서운 거더라구요. 의사가운동을 하느냐고 물어서고등학교 때 유도 조금 했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수사관한테제법 단단한데 좀 다뤄도 괜찮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좀 패도 괜찮다는 말이었지.” ('총풍사건' 관련자 장석중 씨 진술, 신동아, 1999 4월호)

고문을 당해 눈 실핏줄이 모두 터지고 얼굴이 퉁퉁 부은 피해자를 보고별것 아니다거나 고문현장을 일컬어 마치 전쟁터의 야전병원 같다고 말하는 의사. 몸이 건강하니 좀 때려도 괜찮겠다며 고문 강도를 조언해주는 의사. 대체 이들도 의사가 되면서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을까요? 백색 의사 가운을 입고서 인술을 펼쳐야 할 이들이 고문 협력자로 전락한 것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비단 이뿐만이 아닙니다. 한 외과 의사는 브라질 의사처럼 진단서를 허위로 기재하기도 했습니다.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고문피해자의 모습

‘진도간첩단사건’ 연루자 석달윤 씨는 전남도경의 조사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전신이 푸른 상처로 얼룩져 있었고 특히 가슴 부위는 몽둥이로 찔려 숨을 쉬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조사과정에서 그가 구타를 당한 끝에 졸도하자 경찰은 급히 석 씨를 (광주)시내 대인동 소재안정남외과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 의사 안정남은 석 씨를 진찰한 후 상처 부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위궤양으로 4주간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진단했습니다. (진도간첩단사건 석달윤 씨의 경우, <국가보안법 피해자 증언대회 자료집>, 2004)

물론, 모든 의사가 불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당시 박 군의 시신을 부검했던 부검의 황적준 박사는 경찰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 하자 자신의 일기장을 공개하고 사직서를 냄으로써 은폐 사실이 드러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의사회는 칠레나 필리핀처럼 사과 성명 하나 낸 적이 없으며 고문에 협조한 의사들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한 바 없습니다. 이른바 온정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라도 의사회는 어두운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고문에 가담한 의사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물론 의사회 차원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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