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6월 6일은 사람들에게 현충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지난 역사 속에서 6월 6일은 치욕적인 사건의 날로 기록돼 있다. 1949년 6월 6일, 이날은 친일경찰들이 주도해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한 날이다. 이 사건으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는 두 달여 뒤인 1949년 8월 31일 자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전 화신 사장)을 시작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섰다. 이에 맞서 이승만 정부와 친일세력들의 방해 공작도 날로 심화돼 갔다. 친일기업
구한말 의병에서부터 일제 말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애국선열이 국권회복을 위해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만, 2017년 말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분은 총 14,830명(여성 265명 포함)입니다.애국선열 가운데는 단신으로 나선 분들도 계시지만 더러는 집안, 또는 가문 차원에서 집단으로 항일투쟁에 나선 경우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5대 항일가문’을 꼽는데,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가문, 안중근 의사 가문,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 우당 이회영 선생 가문, 일송 김동삼
* 본 글은 2017년 9월 9일 직썰에 발행된 정운현 님(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글입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 당시 남대문로 2가(현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쪽)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특위 해산 후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됐다.반민특위는 해방 후 제헌국회가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을 목적으로 구성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이다. 초대 위원장에는 임시정부 문화부장(현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한, 경북 고령 출신의 김상덕 의원이 선출됐다.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전 화신 사장)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적
* 2018년 9월 11일 직썰에서 발행된 글입니다.ⓒ역사편찬위원회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근원이다. 임시정부는 그에 앞서 3월 1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혁명의 결과로 태어났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모태 격인 3.1혁명은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로 만세시위의 깃발이 올랐다. 만약 그때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나오지 않았다면 3.1혁명 거사는 제대로 성사되고 또 확산됐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33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세월 속에 잊혀 기억의 저편으로
윤희순 의사 초상화한동안 우리는 여성독립운동가라면 유관순 열사밖에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분명 그렇지 않다. 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2018년 8월 15일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325명(외국인 4명 포함)이다. 그간 국민들이 잘 모르고 지낸 것은 국민 탓만은 아니다. 역사학계에서 열심히 밝혀내지 못한 탓이요, 보훈처에서 널리 홍보하지 않은 탓이며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이 오히려 더 크다. 최근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연구자도 생겨나고 기념사업회도 꾸려졌다. 이는 2015년에
1.1995년 1월 서울고법은 특별한 판결을 하나 내렸다. 당시 경기도 파주에 거주하던 박정훈 씨(당시 77세)가 국가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낸 건국훈장 수령권자 지정처분 무효확인 등 청구소송에서 박 씨의 손을 들어줬다. 박 씨의 조부는 대한독립단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벌인 의병 출신의 독립군 화남 박장호 선생이다. 화남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았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이 화남 선생의 손자로 보훈처에 유족으로 등록해 보훈연금을 받아왔다.박정훈 씨는 경기도 파주 적성면에 정착했다. 먹고 사는 데 바
단식 50일째를 맞은 지율스님‘지율스님의 '도롱뇽 단식' 등으로 인해 대구 천성산 터널 공사가 지연돼 6조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조선일보 기사는 허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 “’지율스님 때문에 6조원 손해’ 조선일보 기사는 허위”, 연합뉴스, 18.10.19.지율스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스님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두 차례, 무려 150일이나 단식을 하셨을까. 누가 뭐래도 스님처럼 목숨을 건 투쟁을 한 사람은 흔치 않다.지율스님을 생각하면 잊히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두 번째 단식이 100일이 다 돼 갈 무
신경군관학교 2기 수석 졸업생 박정희 (만주일보, 1942.03.24)1937년 봄 박정희는 5년제 대구사범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현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2년 뒤 1939년 가을 박정희는 돌연 만주 목단강 시로 가서 군관학교 시험을 봐 합격해 이듬해 4월 신경(현 장춘)에 있던 신경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을 동경했다.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승리한 일제는 이듬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제는 그해에 만주국의 장교 양성을 위해 봉천(현 심양)에 군관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독립유공자 다시 선정해야 한다’에 이 글을 쓴 게 1991년 가을이니 햇수로 벌써 27년이 지났다. 1988년 말부터 친일문제에 매료돼 하루 세끼 밥 먹는 것 말고는 내 머릿속은 온통 ‘친일파’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월급의 절반을 털어서 인사동 고서점과 청계 7~8가 고서점을 뒤지며 친일파 관련 자료를 사 모으던 때였다. 한 마디로 친일파에 미쳐서 반 정신줄을 놓고 살던 때였다.필자가 1991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로 파장이 적지 않았다.그 무렵부터 간간이 등에 친일파 관련 글을 기고하면서 만나
ⓒ역사편찬위원회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근원이다. 임시정부는 그에 앞서 3월 1일 거족적으로 일어난 3.1혁명의 결과로 태어났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모태 격인 3.1혁명은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로 만세시위의 깃발이 올랐다. 만약 그때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나오지 않았다면 3.1혁명 거사는 제대로 성사되고 또 확산됐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33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세월 속에 잊혀 기억의 저편으로 묻힌 탓이다.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연합뉴스말 그대로 염천(炎天, 몹시 더운 날씨)이다. 하늘은 불타고 땅은 익는 듯하다. 한낮엔 40도를 오르내린다. 전국이 다 그렇다. 거리에 사람이 없다. 여름한철 장사인 해수욕장도 마찬가지다. 전에 없던 일이다. 예사 자연재해가 아닌 것 같다. 이 폭염에 그가 떠났다. 진보 정치인의 대명사 노회찬이 떠났다. 올해 예순둘이니 평균수명으로 쳐도 20년은 더 살 나이다. 그런 노회찬이 불귀의 객이 됐다. 털털한 모습, 촌철살인의 재담, 이젠 모두 그림의 떡이다.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7월 마지막 주는 노회찬의 한 주였다
설조스님이 불교계 정화를 요구하며 33일째 단식하고 계시는 곳. 바로 옆에 조계사가 있다.한낮의 무더위를 뚫고 잠시 외출했다. 이 더위에 7월 23일 기준으로 33일째 단식투쟁을 하고 계시는 설조스님을 찾아뵙고자 해서였다.일전에 MBC 을 통해 불교계 몇몇 인사들의 파렴치한 행태가 보도된 바 있다. 현 조계종 총무원장, 해인사 주지 등 소위 힘 있고 돈 있는 권승(權僧)들이 문제다. 이전에도 늘 이런 인물들이 불교계를 욕 먹였다.언론의 의혹 제기에 대해 조계종 측은 진상조사 후 자체 처리하겠다는 모양인데 일이 지지부진한
1. 박정희의 ‘1962년 봄’박정희의 권력욕은 뿌리가 깊다. 당시로선 그만하면 선망의 대상이었던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교사를 때려치우고 만주로 간 것부터가 그 시작이다. 나이가 많아서 군관학교 입교가 거부당하자 혈서를 써서 보내면서 일제에 충성을 맹세했다. 비록 군인기질을 타고났다고는 해도 군관학교 수석졸업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수석졸업 특전으로 일본 육사로 유학을 가게 된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졌다.(참고로 만주군관학교는 두 곳이 있었다. 봉천(현 심양)에 있던 봉천군관학교와 신경(현 장춘)에 있던 신경군관학교가 그것이
개관논정(蓋棺論定). 즉,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고 나서 관 뚜껑 덮을 때 내려진다고 했다. 산 사람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 어렵다. 게다가 죽은 자에 대해 관대한 우리 풍습 때문에 죽은 후에도 당장은 쉽지가 않다. 따라서 제대로 된 인물 평가는 적어도 그의 사후 30년은 지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종필(JP) 전 총리의 사망을 두고 말들이 많다.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이라는 평가도 있는 반면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서 독재 권력에 부역한 반민주 인사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경위
‘물뚝심송’ 박성호 님의 빈소 영정사진고인의 부음을 접한 것은 5월 12일 오후였다. 노혜경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물뚝심송 님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고인은 12일 오전에 별세했다. 사인은 오랫동안 투병해온 구강암. 빈소는 일산 백석역 인근 일산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 월요일 오전 11시 반, 장지는 경기도 수원시 호매실동 선영)고인의 나이는 올해 만 50세로 그의 죽음은 너무도 때 이르다. 평소 나는 만 60세에 생을 마친 임종국 선생을 두고 늘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고 탄식하곤 했다. 그런데 그는 이보다도 열 살
남도의 섬 제주. 혹자는 제주를 아름다운 관광지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지 않다. 제주 사람도 아니면서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구석 하나를 들라면 제주가 아닐까 싶다. 주민의 10%가 집단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례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도 그리 흔치 않다. 그것도 외세 침략자의 말발굽도 아닌 동족 간의 총질로 무고한 목숨이 3만이 넘게 희생됐다. 며칠 전 그 제주를 1박 2일로 다녀왔다. 꼽아보니 그간 제주를 다녀온 건 모두 네 차례였다. 순수하게 관광 차원에서 다녀온 적은 단 한 차례
2019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현행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바뀐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올해 임정 수립 99주년 기념식에서 이같이 밝혔다. 임정이 100년 만에 제대로 된 생일을 맞는 셈이다. 늦었지만 잘 한 결정이다. (관련 기사: 대한민국 임정수립일, 내년부터 ‘4월11일’로 바로 잡는다)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 ⓒ연합뉴스오늘 하루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정을 이끈 여러 애국선열을 기억해두자. 1919년 3.1혁명의 결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국땅에서 수립된 망명정부
토지조사사업 중인 일본인들근 20년도 지난, 90년대 중반의 일로 기억한다. 어느 날 경남 지역 한 지방법원의 판사 명의로 된 편지가 한 통 배달됐다. 법원에서 온 편지여서 처음엔 가슴이 덜컹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 싶었다.편지를 뜯어보니 내게 자문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맡은 사건이 무슨 땅 소송사건인데 땅 주인의 이름이 일본식 이름으로 돼 있다고 했다. 원소유자가 일본인인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한 한국인인지도 불분명하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땅이 해방 후에 제3자에게 양
▲3월 26일, 뤼순감옥 내 사형장에서 순국 직전 한복 수의로 갈아입은 안 의사의 최후 모습(1910년) 2월 14일, 마침내 선고공판이 열렸다.공판개시 7일, 검찰관의 신문개시 석 달 반 만이었다. 방청석은 판결을 보기 위해 몰려든 방청객들로 가득 찼다. 오전 9시, 마나베 재판장을 필두로 검찰관, 서기, 통역이 입정했다. 안중근 외 피고인 3명은 법정 가운데 마련된 기다란 피고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기자들도 몇 사람이 방청석에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마나베 재판장이 판결문 주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최근 동아일보 창립자인 인촌 김성수의 건국훈장 박탈(서훈 취소)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인촌의 경우 독립유공 공적이 있다고 하나 나중에 친일 활동을 한 사실이 새로 밝혀져 훈장이 취소됐다. 인촌처럼 독립유공 공로 서훈을 받은 사람 가운데 나중에 친일전력이 새로 드러나 훈장이 취소된 사람은 20여 명에 달한다. 새 자료가 발굴되면 앞으로도 이런 경우는 더 나올 수도 있다.친일행위 드러나 훈장 박탈당한 동아일보 창립자훈장 박탈당한 동아일보 창립자, 그리고 남은 과제들독립유공자 서훈을 둘러싸고 제기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