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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재벌 회장님들은 '기부천사'였다

  • 입력 2016.12.07 16:00
  • 수정 2016.12.07 17:31
  • 기자명 정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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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국정조사에 출석한 재벌 총수들

한국에서 재벌들은 공공의 적이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에 봉건적인 경영세습, 골목상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가뜩이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재벌 총수들이 어제 (6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증인으로 TV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의 특혜와 국민의 애국심을 자양분 삼아 성장해놓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는 소홀하다는 것이 재벌을 향한 국민들의 보편적인 시선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국정조사를 지켜보면서 재벌에 대한 이러한 시선이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청문회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최태원 SK그룹 회장·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구본무 LG그룹 회장·손경식 CJ그룹 회장·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8대 대기업 총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증인 선서하는 총수들

국정조사에 출석한 재벌 회장님들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분들이 아니었다. 베일을 벗고 TV 앞에 나타난 회장님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배려심 넘치며 누구보다 통 큰 나눔을 실천해온 분들이었다.

이날 의원들의 질문은 총수들이 최순실/미르재단/K스포츠재단 등에 전달한 자금이 정말 ‘삥’을 뜯긴 것인지, 대가성 뇌물인지를 가려내는 데 집중됐다. 최순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돈을 기부한 목적이 무엇이었나? 결재를 누가 했나? 대가성은 없었나? 말은 누가 사줬나? 회장님들의 답변은 놀라웠다.

그들은 입을 맞춘 듯 하나 같이 박근혜/최순실 콤비에 대한 상납에는 대가성이 전혀 없었으며, 그저 '좋은 일'에 쓰이는 돈인 줄로만 알았다고 답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회장님들의 말씀을 정리하면,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는 채 오너에게 보고도 없이, 오너의 결재도 없이 회사돈 수십~수백억을 직원 아무개가 마음대로 기부했다고 한다. 그저 '좋은 일에 쓴다는 믿음'만으로 말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보통 사람들은 돈 만원 기부하는 데도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이는데 우리 회장님들은 회사돈 수백억을 기부하는데 한점의 의문도, 한치의 망설임도 없으셨다. 이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다.

워렌 버핏의 기부가 어쩌고, 빌 게이츠의 기부가 어쩌고 하면서 우리 회장님들을 욕하던 사람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나라에도 워렌 버핏 못지 않은, 빌 게이츠보다 몇 배는 더 따뜻한 기업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다.


이재용 부회장은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들은 겸손했다. 하루 종일 쏟아진 의원들의 질문 세례에 회장님들은 "죄송하다", "송구하다", "부족했다", "앞으로 잘하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이날 국정조사의 주인공이었던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저보다 훌륭한 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경영권을 넘기겠다”며 재벌 2세 답지 않은 겸손을 보이기도 했다. 저렇게 겸손한 기업인이라니, 그래서 정부가 저 사람을 위해 국민연금 6천억 원을 날려먹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아무 관계도 없는 정유라에게 8억짜리 말을 사서 독일로 보내줄 정도로 인심 좋은 한화는 왜 1년차 고졸사원 수십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 겁박해 쫓아낸 걸까? 최순실 일당에게 아무 조건도 없이 500억 넘는 돈을 기부한 삼성은 왜 반도체 공장에서 병을 얻어 사망한 황유미 씨에게는 고작 500만원으로 입을 막으려 했던 걸까? 누군지도 몰랐던 최순실에게 수십억 회사돈을 건넬 정도로 넉넉한 한진은 왜 회사가 어렵다며 아무 잘못도 없는 노동자 수백 명을 하루 아침에 해고했던 걸까? 허구헌 날 정부의 압박에 당하기만 했다는 약골 전경련은 왜 노동자 앞에만 서면 그렇게 목소리가 커지는 걸까?

난 도대체 모르겠다. 우리 경제를 지탱한다는 재벌 회장님들의 마음씨가 이렇게나 고운데 노동자들의 삶은 왜 이 모양인 건지. 생면부지 남에게도 그렇게 친절한 분들이 왜 자기 회사 노동자들에게는 그리도 표독스러운 건지. TV 앞에서는, 권력 앞에서는 그렇게 심약하고 맘씨 좋은 회장님들이 회사로 돌아가면 왜 그렇게 달라지는지.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재벌의 모습은 국정감사에 나왔던 회장님들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슬프다. TV 속 저 따뜻한 회장님들의 모습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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