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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황옥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입력 2016.09.12 11:04
  • 수정 2016.09.12 11:42
  • 기자명 버락킴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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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을 연출한 김지운 감독에겐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의열단장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정채산(이병헌)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도 있었다. 특별출연만으로도 엄청난 아우라를 뽐낸 이병헌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멋스러웠던 정채산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지 않았던가. 의열단원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선택도 가능했다. 가령,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김상옥을 빗댄 김장옥(박희순)이라든지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폭탄을 운반하는 작전을 맡았던 김시현을 빗댄 김우진(공유)을 더 집중적으로 그릴 수도 있었다.

<밀정> 속 정채산(이병헌)과 김우진(공유)

그랬다면 훨씬 더 강렬하고 뜨거운 영화가 됐을지도 모른다. 또, 영화 홍보에도 한결 수월했을 테고 흥행에도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의 선택은 의열단과 일본 경찰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했던 조선인 출신 일본 고등경찰, 그러니까 밀정 이정출이었다. 결과적으로 경쟁작인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함으로써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어느 정도 증명해냈지만, 굳이 꽃길을 피해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인터뷰에서 답을 찾아보았다.

"이정출을 중심에 놓은 이유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정신적인 이중국적자의 내면에 흥미를 느꼈다. 항일, 친일로 변신하는 인물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공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정채산이라는 인물이 극적이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수 있지만, 이정출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다. 한 나라의 시스템이 정상적이지 않을 때 개인도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개인에게 직접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황옥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위장 잠입했는지, 밀정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인물의 마음이 궁금했다."

<스포츠경향>, ‘밀정’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이정출을 택한 이유는?

황옥(1887~?). 다른 등장인물들도 역사 속 진짜 이름을 언급했으니, 이정출에게도 진짜 이름을 찾아줘야겠다. 김지운 감독이 꽂혔던 인물은 바로 역사 속 '황옥 경부 사건'의 주인공 황옥이었다. 그는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역사학계에서도 독립운동가인지 밀정인지를 두고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논란의 인물이다. 회색 지대의 인물을 영화적으로 다룬다는 건 김지운 감독에게도 부담스러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업을 이루지 못한 시대적 아픔이 깊은 상흔을 남긴 채 현존하지 않던가. 그로 인해 역사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이 여전히 강퍅한 위세를 떨치고 있기에 <밀정>은 자칫 잘못하면 고립될 여지가 충분했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날아든다. 큰 피해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번화가 한복판에서 발생한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제는 경악했다. 곧이어 의열단원 김상옥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공안 당국의 추적은 집요했고 결국 1월 22일 아침 김상옥은 사살되고 만다. 이 추격 장면이 <밀정>의 첫머리에 등장한다. 한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을 김상옥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의열단은 김상옥을 주축으로 '대암살 파괴'를 계획하고 있었고 폭탄을 국내로 반입시킬 작전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면서 계획이 뒤틀려 버린 것이다.

상황이 바뀌자 의열단은 김시현을 책임자로 한 두 번째 계획을 시도한다. 김시현은 자신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하는 걸 도와준 황옥을 작전에 끌어들이려 한다. 비록 일본 경찰 신분이지만, 믿을만한 인물이라 판단한 것이다. 김원봉은 황옥을 신뢰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데려오게 한다. 황옥을 직접 만나 본 김원봉은 그를 신뢰해도 된다고 판단하고 작전에 투입한다. 특히, 경찰 신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산다. 하지만 폭탄을 안둥현까지 운반한다는 의열단의 계획을 수포가 된다. 3월 15일 황옥을 비롯한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고 도주했던 김시현마저 일본 경찰에 붙잡힌다.

작전이 새나갔던 것일까? 아니면 밀정의 짓일까? 도대체 누구인가. 설마 황옥인가? 재판 과정에서 황옥은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낸다.

황옥의 법정 증언, <동아일보>, 1923년 8월 9일

판사 상관이 물어도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황옥 일이 위험한 상황이면 말했겠지만, 경성에 온 폭탄은 모두 내 손에 들어왔으므로, 상해에서 실행 단원이 오면 그때 모두 잡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소.

판사 이번 일로 피고의 신변이 의심스럽게 된 것은 언제인가?

황옥 13일이오.

판사 13일부터 그랬으면 그때부터 검거하여 의심을 푸는 것이 좋지 않은가?

황옥 일부 검거로는 의심을 풀 수 없으므로 전부 검거하여 공을 세우려 했소.

판사 피고가 잡히기 전에 왜 미리 전말을 알리지 않았는가?

황옥 최후까지 성공을 기대했기에 말하지 않았소.

조한성, 『한국의 레지스탕스』에서 발췌

김시현의 입장에선 황옥을 의열단의 작전에 끌어들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황옥은 의열단원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라 생각하고 김시현에게 접근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공적을 독차지하고 경시(警視)로 승진하는 달콤한 꿈을 꿨던 황옥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다. 작전이 노출되고 밀정이라는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경찰 내부의 알력 다툼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스파이 역할을 했던 황옥의 교묘한 줄타기가 실패로 귀결된 것이다. <밀정>은 양쪽의 입장 차이를 절묘하게 배합해 영화적으로 표현해낸다.

김지운 감독은 회색 지대에 위치한 회색 인간 이정출, 그러니까 황옥을 구원한다.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나는 의열단이 아니라 의열단을 검거하기 위해 비밀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라는 황옥의 진술을 역으로 활용한다. 김지운 감독은 황옥이 실제로는 독립운동가였고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을 것이란 희망을 영화 속에 투영했다. 아직 그의 정체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대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니 충분히 가능한 접근이다. 또, 김원봉이 "황옥은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한 자"라고 소개한 예도 있고 황옥이 김상옥과 김지섭 등 의열단원들의 피신을 도운 정황이 있어서 더욱 헷갈린다.

황옥의 최후 진술, <동아일보>, 1923년 8월 13일

천진에 출장 갔다 경찰부에 돌아와 과장들에게 책망을 당하고 아무도 나의 심사를 알아주지 못함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까지 하려고 했소. 그러나 이번 사건을 교묘히 운용하여 대대적으로 검거를 하는 동시에 나의 수완을 보이면 책망하는 부장이나 과장이나 경무국장까지도 나를 칭찬하고 경시까지 승급도 시켜주리라 믿었소. 나는 굳은 결심으로 사실을 말하지 않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이 경성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소. 그런데 결국은 경찰국에서 모든 사실을 탐지하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까지 압수하여 오늘과 같이 의열단을 이용하려던 내가 공범자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오.

조한성, 『한국의 레지스탕스』 에서 발췌

어느 쪽이 진실일까. 황옥은 정말 의열단원들을 모두 검거하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친일파였을까. 아니면 조국과 민족에 대한 마음의 빚을 안고 살면서 의열단을 비밀리에 도왔던 독립운동가였을까. 어쩌면 어느 쪽에 속하지 않은 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진짜 회색 인간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를 아는 모든 사람은 아버지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이정했다. 아버지의 진정한 생각과 행동은 하늘과 땅, 그리고 당신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른다"는 황옥 큰 딸의 말처럼 진실은 어쩌면 황옥 그만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는 김지운 감독의 예리한 접근과 송강호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모순된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수많은 개인들의 심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라는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황옥이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 했고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더욱 풍성한 시각을 제공해준 <밀정>을 계기로 더욱 다양한 시선들이 출현하길 기대해본다.

P.S. 일본 당국이 황옥의 진술을 부인하며 그를 밀정으로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서 황옥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공안 당국이 주도하는 공작 수사에 대한 일본 내의 여론이 악화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를 수습할 유일한 해법이 황옥을 밀정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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