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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간 사람이 자수하기 전까진 아무도 집에 못 가!"

  • 입력 2016.07.22 10:23
  • 수정 2016.07.22 17:42
  • 기자명 박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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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확히 언제였는진 기억나지 않는다. 2000년쯤이었을 거다. 우리 반에서 도둑질이 일어났다. 그 일을 벌인 이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 반 학생들은 집에 갈 수 없게 되었다.

2. "다 책상 위로 올라가"

선생이 말했고, 모든 학생들은 책상 위로 올라가서 무릎을 꿇었다. 선생의 말은 저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선생이 말한 것은 "책상 위로 올라가" 뿐이었지만, (그 문장 안에는 "무릎 꿇어"같은 게 없었지만) 이런 종류의 일들에 너무 익숙했던 (한국)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 자동반사처럼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학생들이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자 공정하게도 모든 학생들에게 골고루 눈알을 부라리던 선생은 또 말했다.

"너네 중에 범인이 있는데, 누군지 자수를 해야 모두 집에 갈 수 있다."

선생은 '이 짓'을 통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3. 범인이 정말 우리 중에 있었다면?

범인이 정말 우리 중에 있었다면 선생의 '추궁' 방법론은 옳은가? 예를 들어 살인 사건이 났고 A그룹의 인물들 중 하나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강하게 의심된다고 해보자. 그러면 수사당국이 A그룹의 인물들을 모두 체포해도 그것은 정당한가? 만약 범인이 A그룹 중에 있다면 도주나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들을 단기간 체포해두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인물은 한 명뿐이다. 그럼에도 체포 과정상에서나 결과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나머지 인물들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되므로 이에 대한 고려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강력한 증거'가 있지 않는 한 (알리바이가 입증되지 않아도) 대부분의 인원들을 풀어줘야 하고, 알리바이가 입증된다면 그들을 더 이상 묶어둘 명분은 없다. 차후에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 그들을 다시 부르거나 체포하는 건 가능하겠지.

4. 범인이 우리 중에 없다면?

범인이 우리 중에 없다면 선생은 허탕을 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선생 입장에선 허탕인데,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책상 위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는 체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사 죄를 지었다고 해도 책상 위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는, 왠지 매뉴얼에는 적혀 있지 않은 법한, 이런 주먹구구식 교육 행태는 옳지 않다.

5. 다시 학교

경찰들에게는 수사권, 체포권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증거를 확보할 인적 자원들이 있다. 그런데 선생에게는 수사권도 체포권도 없었고, 지갑을 훔쳐간 범인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수집해줄 인적 자원도 없었다. 선생은 그저 범인의 죄책감에 기댔다. 그러니까 범인의 죄책감이 발현을 하기 전까지 범인이 아닌 모든 학생들은 그저 책상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선생은 학생들의 인권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범인을 잡겠다는 생각뿐이었다.

6. "눈 감아"

선생은 마치 눈을 감으라면 학생 전원이 눈을 감을 거라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믿음에 기대 범인이 자수를 할 거라 믿었던 거 같다. 하지만 "눈 감아"란 말에 눈을 감은 학생들은 실눈을 뜨기 바빴고, 이미 이를 간파했는지 어쨌는지 범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7. 발견된 지갑

어느 날인가 왠 녀석이 지갑을 발견했다고 오두방정을 떨며 교실에 달려왔다. 그 지갑은 남자 화장실 변기 속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나는 그 지갑을 발견한 녀석의 어리숙한 연기 때문인지 지금도 그 지갑을 훔친 놈이 그놈이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다.

8. 선생은 실패했다

선생은 단체에 책임을 물게 한 뒤 범인의 죄책감을 촉진시켜 자백을 유도하려 했지만 이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것과 무관하게 지갑은 엉뚱한 방식으로 발견되었고, 범인은 (나의 의심과는 무관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선생은 학생들의 인권은 인권대로 짓밟았는데,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도 못했다.

9. 선생은 어떻게 했어야 했나?

선생은 '너 때문에 다른 애들이 힘들다'라는 식의 죄책감을 만들었지만 나였으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거 같다. 우선 지갑 주인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을 만들었을 것 같고, 그것과 무관하게 뭣도 모르는 학생들을 위협하기 위해 경찰에게 신고할 거란 협박을 했을 거 같다.

"내일까지 지갑이 내 수중에 들어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고, 지갑을 훔친 학생은 법에 따라 처벌될 겁니다. 소년원에 가기 싫으면 알아서들 선택하세요."

엄한 애들을 학교에 남겨 둘 필요도 없고(어차피 효과도 전혀 없으니), 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범인과 한 그룹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체벌을 하는 건 인권 침해니까.

교권이 강하다는 건 동시에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찰의 권리가 강하면 시민들의 권리가 억눌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즘 양아치 같은 학생들을 언급하며 낮아진 교권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들을 자주 접하는데, 애초에 선생은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여선 안 된다. 양아치가 설치면 교칙대로, 법대로 하면 된다. 교칙이 약한 게 문제라면 바로 세우면 되지 않나? 너무 쉽게 얘기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너무 어렵게 얘기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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