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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전 오늘, 한강대교가 끊어졌다

  • 입력 2016.06.28 12:30
  • 수정 2016.06.28 13:37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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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국군은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28분, 한강대교(인도교)가 폭파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시간 30 분 만이었다.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수도 서울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한강대교가 끊어지면서 100만 서울시민의 발이 묶였다. 병력과 물자 수송이 막히면서 북한군을 저지하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지 못한 국군 6개 사단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중화기와 차량 등 다량의 군수품을 북한군에게 내줘야 했다.
전쟁 발발 뒤 정부의 공식 발표는 6차례에 걸쳐 있었다. 6월 25일 정오엔 국방부의 담화문 발표가, 6월 26일 새벽 6시엔 무초(John Muccio) 미국 대사의 입장 발표가, 같은 날 아침 8시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성명 발표가 있었다.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6월 27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라디오를 통해 3번 발표되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 전에 서울을 떠났다. 공식 ‘피난민 제1호’다. 그는 이날 새벽 2시에 각료나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에게 알리지 않은 채 경무대를 빠져 나와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대구에 도착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을 받고 열차를 돌려 대전에 내렸다.

공식 '피난민 1호' 대통령, 녹음방송으로 시민 기만
특별담화는 충남지사 관사에 여장을 푼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것을 녹음해서 송출하는 방식으로 방송되었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을 떠나려던 서울시민들은 짐을 풀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이 수복되던 9월 28일까지 석 달 동안 꼼짝없이 북한군 치하를 견뎌야 했으며, 부역자라는 의혹을 받으며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서울에 잔류한 서울 시민 105만 명 가운데 56만 여명이 부역자 혐의를 받고 검거되었다.)
서울을 버리고 달아난 대통령에게 기만당한 시민들이 짐을 풀고 주저앉은 27일 오후 2시, 국방장관 신성모가 한강을 건넜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주무 장관인 국방장관이 100만이 넘는 서울시민들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국군 병사들이 서빙고 나루터에서 선박을 이용해 철수하고 있다.


6월 28일 새벽 1시께 국군의 미아리-홍릉 저지선이 무너지고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는다. 그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대교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새벽 2시에 서둘러 한강을 건넜다.
6월 26일에 있었던 육군본부 회의에서 한강대교 폭파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공병들은 대략 2800~3600 파운드의 폭발물을 교량에 설치한 뒤 폭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육군 참모총장이 한강을 건너고 28분이 지난 뒤 한강대교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졌다.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하겠다는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막대한 인명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한강대교를 끊을 만큼 당시 상황이 긴박한 것은 아니었다. 한강 이북의 국군 전력(중화기, 중장비)을 한강 이남으로 체계적으로 후퇴시킨 다음에 폭파해도 늦지 않았다. 그랬다면 한강 이남에 좀 더 튼튼한 방어선을 짤 수 있었다.
김홍일 장군이 6월 29일에 간신히 한강 이남에 한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7월 3일까지 북한군을 한강 일대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사흘 동안 머물렀기 때문이다. 나룻배로 철수한 병력이 세운 방어선으로 5일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서울 시내로 들어오는 인민군 탱크. 잘못된 정보로 인해 한강다리는 서둘러 폭파되었다.


북한군 탱크가 한강대교에 도착한 것은 한강대교가 폭파되고 7시간 30분이 지난 뒤였다. 한강대교가 폭파되는 시점에 북한군은 여전히 서울 북쪽 외곽에 있었다. 한강대교 폭파는 그나마 유지되던 국군의 한강 이북 지휘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한다.
이승만은 한강대교 폭파로 여론이 들끓자 폭파 실무 책임자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최창식 대령은 1950년 9월 부산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명은 ‘적전비행죄’였다.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는 대령에게 책임을 전가한 이 사건은 14년 후에야 바로잡혔다. 1964년 11월 법원이 고 최창식 대령의 무죄를 확정했다. 최창식 대령은 사후에야 복권됐다. 폭파명령을 내렸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한 달 뒤인 7월 27일 경남 하동에서 전사했다.

전쟁 중에도 계속된 이승만의 패착
수도와 시민을 버리고 떠났던 무능하고 비겁한 지도자 이승만의 패착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다. 고위 장교들의 부정과 착복으로 9만~12만에 이르는 국민방위군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1951)에 이어 거창, 산청, 함양 등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는 소홀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는 집착했다. 자신의 재선을 확실시하고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임시 수도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해 국회의원을 연행, 구속한 ‘부산 정치파동’(1952)도 그 중 하나였다.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이다.



ⓒ연합뉴스TV


그런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오늘날 수구·보수 세력의 구애는 눈물겹다. 4·19로 파괴된 동상이 새로 세워지는 등
‘국부’로 ‘건국의 아버지’로 그는 다시 태어나고 있다. 독재와 친일 등 역사적 과오를 지우고 미화하려는 이들의 역사 왜곡은 마침내 역사 교과서 국정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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