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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 입력 2016.03.21 16:53
  • 기자명 비더슈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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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나중에 크면 꼭 2번을 뽑아라.”
부음을 들었다. 누가 오늘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아니고, 몇 년 전인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다. 그 분을 생각할 때마다 같이 떠오르던 이야기 하나가 있어 말하고 싶다. 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벌써 십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나는 지금 대학생이니, 그때의 내 나이가 대충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그 분은 학원 선생님이었다. 학원에 들어가면 벽 한 쪽에 큰 거울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거기에 누군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어렸을 때였으니 뭐가 뭔지도 몰랐고, 그냥 친구들이랑 선생님 남자친구라며 장난을 쳤던 기억만 난다. 사실 그 선생님에겐 남자친구보다는 남편이 더 어울리는 나이였는데,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뒤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우리는 사진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선거 포스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2002년 3회 지방선거에 서천군수 후보로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나소열 후보의 포스터였을 것이다. 그때 선생님이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이 하신 그 한 마디뿐이다.


“너희들은 나중에 크면 꼭 2번만 뽑아라.”


아!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 속에 실은 패배의 역사와, 승리를 꿈꾸는 희망이 동시에 있었음을 그때의 나는 결코 알 수 없었다.




민주당은 다수였던 적이 없다
선거를 할 때, 어떤 기준으로 기호가 붙는지 그 선생님이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 ‘2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총선이든 대선이든, 지방선거든 정당공천제가 있는 선거에 기호를 주는 방식은 모두 똑같다. 우선 지난 총선에서 3% 이상 득표했거나 의석이 5석 이상인 정당이 고정기호를 받는다. 이번 총선을 예시로 들면, 5석 이상이 있는 정당인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은 각각 기호 1,2,3,4번을 고정기호로 받는다. 만약 이들이 후보를 내지 않아도, 이 기호는 공석으로 남는다.
그 다음은 5석 이상 의석이 없는 정당이 기호를 가져간다. 이번 총선에서는 이에 따라 1석을 가진 원외 민주당이 5번을 가져간다. 다만 이 기호는 변동기호라서, 만약 어느 지역구에 원외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으면 이 기호는 다른 정당이 가져간다. 의석이 없는 정당은 가나다순으로 기호를 가져가고, 무소속은 추첨을 한다. 설명하려고 시작한 글이 아니다. 내 설명이 부족했다면 그래도 좋다. 요지만 파악해 두자. ‘기호의 배분은 철저하게 의석순’이다.
선생님의 저 말을 들었던 때는 2002년이었다. 대한민국이 1948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하고, 내가 저 말을 들었던 2002년까지 총선에서 ‘민주당계 정당’이 다수를 점한 적은 딱 세 번이 있었다. 1950년에 있었던 2대 총선, 1960년에 있었던 5대 총선, 1988년에 있었던 13대 총선이 그것이다.
역사 이야기를 조금만 해 보자. 1950년에는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했었다. 당시 대통령은 이승만이었으니, 1950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는 곧 이승만의 낙선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곧 발발한 한국전쟁을 핑계로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었으며, 1952년 재선에 성공했다. ‘이승만의 재선 저지’라는 2대 국회 최대의 목표는 이루지 못한 셈이다.



▲ 이승만은 국회의원 버스를 납치하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며 헌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1960년 5대 총선은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세력이 쫓겨난 직후였기에, 민주당이 233석 중 175석을 얻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자유당 세력 중 다수가 민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 자리를 얻었으며, 그렇게나마 겨우 유지되던 국회도 5·16쿠데타로 9개월 만에 해산되고 만다. 1960년의 승리는, 임기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단 9개월 동안만의 영광이었다.
1988년은 또 어땠는가. 전두환은 물러났지만 양김의 분열로 대통령은 노태우가 당선된 상황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양대 민주당이 합계 129석을 얻으며 민주정의당의 125석을 눌렀지만, 역시 9개월 만에 3당 합당이 진행되며 민주당의 다수 점유는 깨지고 말았다.



▲ 3당합당 당시의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민주당은 다수였던 적이 없다. 있다고 해도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다. 4·19로 이루어낸 혁명적 역사는 5·16으로 짓밟혔고, 박정희의 독재는 유신을 소리 높여 반대하던 학생들이 아니라 측근의 총탄으로 막을 내렸다. 민주화를 요구하던 서울의 봄은 광주의 아픔으로 짓이겨졌다. 민주주의는 늘 짓밟혔고, 패배했고, 짓이겨졌다. 민주주의는 그 아픔의 역사를 절절히 이끌고 피투성이 된 몸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기호 2번에 담긴 뼈아픈 역사
이미 말했듯이, 선거 기호가 어떻게 붙여지는지 그 선생님은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그 역설적인 아픔이 담겨 있다. 기호 2번은 짓이겨진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늘 패배해야만 했던 민주당의 상징이다. 60년 역사에서 단 세 번을 제외하고는 총선에서 승리한 적 없는, 그나마도 매번 짓밟히고 말았던 상징이다. 2002년에 내가 본 그 기호 2번은 그런 상징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꼭 2번만 뽑으라고 말했다. 나보고 민주당을 뽑으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은 민주당이 총선에서 다수를 점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말했다.

“꼭 2번만 뽑아라.”

1948년, 1952년, 1956년, 1960년 3월 (무효), 1963년, 1967년, 1971년, 1972년,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7년, 1992년, 2007년, 2012년. 민주당이 대선에서 패배한 해다.
1948년, 1954년, 1958년, 1963년, 1967년, 1971년, 1973년, 1978년, 1981년, 1985년, 1992년, 1996년, 2000년, 2008년, 2012년.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해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이 숱한 패배를 겪으면서도 그들이 60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의문을 품곤 한다. 게다가, 역사 전반에서 우리는 ‘민주당’이 외치던 이상과 비슷한 쪽으로 흘러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을 하던 때와 비교해서, 현재의 민주주의는 분명 진보해 왔다. 패배만 숱하게 겪은 우리가, 어째서 이런 사회에 살 수 있게 되었는가.
2002년의 입장에서 의문을 던져 보자. 아니, 그보다 더 전인 1997년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져 보자. 우리는 어째서 하루 날 잡고 모여 투표라는 신성한 의식을 치를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몇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치르는 행사로 만들어 냈는가. 대통령 욕 한마디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던 그 시절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사회를 만들어 냈는가. 패배만을 겪은 우리가.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몇 번의 승리로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하게 파괴되고 짓이겨졌다. 우리 사회를 발전으로 이끌어온 힘은 시민의 힘이었으며, 곧 ‘과정’의 힘이었다. ‘결과’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과정’이 모든 것을 바꿔 왔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고, 부마항쟁은 유신정권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은 시민 사회가 전두환을 향한 날카로운 외침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6·10은 대한민국에 실질적 민주화를 가져왔다.
어떤 항쟁과 시위도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다. 4·19는 5·16에, 부마항쟁과 광주는 각각 박정희와 전두환의 총칼에, 6·10은 노태우의 당선에 무너졌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패배했지만 그 과정만큼은 저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회는 점점 느리지만 우리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제 최소한 삼선개헌이나 유신부활을 입밖에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그 정도 사회에는 왔다. 지켜지진 않았지만 보수가 복지를 논하는 시대에 왔고, 진보정당이 영향력을 가지는 사회에 왔다. 적어도 그 정도는 성장했다. 우리의 ‘과정’이 만들어 낸 힘이었다.
내가 포스터를 봤던 2002년 지방선거는 전반적으로 한나라당의 승리였다. 충청남도에서 새천년민주당의 기초단체장 당선자는 두 명밖에 없었다. 그래도 서천군수는 내가 봤던 포스터의 기호 2번 나소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해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 2번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전임 대통령은 김대중이었지만 새천년민주당이 다수당이 아니었기에 노무현 후보는 기호 2번을 달고 나왔다.



그리고 있었던 2004년 17대 총선, 기호 2번 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을 등에 업고 299석 중 152석을 차지하며 과반을 차지했다. 그리고 2006년, 제4회 지방선거에서 기호 1번 열린우리당 나소열 후보는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2007년에는 기호 2번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8년에는 기호 2번 한나라당이 299석 중 153석을 가져가며 과반을 얻었다. 그들은 다시 기호 1번이 되었고, 민주당은 다시 기호 2번이 되었다.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는 기호 2번 민주당 나소열 후보가 출마해 3선에 성공했다.
또 2012년, 19대 총선에서 기호 1번 새누리당은 300석 중 152석을 얻으며 제 1당이 되었으며, 같은 해 18대 대선에서 기호 1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3선 제한에 걸린 나소열 후보는 2014년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못했으며, 그는 현재 보령서천 지역구에 공천을 받아, 기호 2번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렇게 패배하고 승리하며, 우린 2002년 그날 이후의 세상을 보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잘 져야 한다
우리의 패배는 일상이었으며, 우리의 승리는 예외였다. 이번 선거도 마찬가지의 위치에서 치러질 것이다. 야권은 분열되었으며, 새누리당은 손쉽게 과반을 점할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라는 게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로서 가장 합리적은 추측은 다시 기호 1번 새누리당의 탄생으로 직결된다.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패배가 곧 정치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패배한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60년간 그랬듯이 다시 정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과정’의 힘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107석을 넘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107석을 승패의 기준으로 잡은 것이며, 스스로 이번 선거에서 과반을 점유할 수 없다고 예측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은 이제 ‘지는 전략’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질 거니까 깽판을 치는 사람이 있고, 어차피 질 거니까 멋지게 지는 사람이 있다. 지는 것은 똑같지만, 때로 어떻게 지느냐가 다음의 승리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에는 ‘잘 지는 전략’이 있는가. 그 ‘과정’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이제까지 역사를 견인해 온 그 ‘과정’의 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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