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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아날로그 소통와 디지털 소통의 조합

  • 입력 2013.12.19 16:16
  • 수정 2013.12.19 16:23
  • 기자명 버락킴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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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의 등장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응답하라' 시리즈 열풍의 일환으로 봐야 할까? 복고의 일시적 유행, 뭐 그런 것일까?


과거의 소통 방식이 대면(對面)이었다면, 지금의 소통 방식은 철저하게 非대면적이다. 인터넷을 통해, SNS를 통해 이뤄지는 소통이 전부다. 한때는 그것이 축복과도 같았다.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지인들의 찾아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 트위터를 통해 기존의 인맥을 뛰어넘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 말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연령과 지역에 관계없이 공통된 주제를 놓고 연대하는 새로운 형식의 소통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적처럼 여겨졌다.

자크 랑시에르의 말처럼, '인터넷과 SNS는 정보와 소통의 형식을 재분배하는 어떤 민주적 역할을 수행'했고,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를 유통시키는 수단을 다양하게 만들었으며 국가 지배의 형식들이 비밀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일을 지극히 어렵게 만들었'다. 또, '투쟁적 집회의 전통적 형식들이 퇴조하는 것처럼 보이던 순간에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새로운 형식들을 창안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반독재 혁명인 '아랍의 봄'을 떠올려도 좋고, 굳이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2008년 촛불집회를 상기해도 좋다. 이미 우리는 그 과정을 겪었다.

- <한국일보>에서 발췌 -


SNS에 기반둔, 혹은 SNS를 매개로 한 반(反)정부 시민저항들은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유의미한 사회적 변화들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공'했으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회의적이다. 물론 이 또한 거대한 흐름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대답을 보류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를 놓고 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분명히 SNS는 '우리'가 소수가 아니라 다수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용기를 북돋아줬고 위로가 됐다.

지난 총선과 대선을 치르면서, SNS에서 줄기차기 제기됐던 문제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SNS는 우리만의 리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로웠던 소수들에게 SNS는 분명히 위안이 되었지만, 그것이 안주(安住)가 되는 순간부터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막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외치긴 했지만, 그에 대한 방법론은 미비했다. 떠들수가 없어서, 정치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외면당하니까 SNS를 찾아온 것 아니었는가? 그런데 다시 '밖으로 나가'라니? 도대체 어디로 가란 이야기인가?

그러던 중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등장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분명 '아날로그'적이다. 키보드로 적는 건조한 글씨가 아니라, 쓰는 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기는 손글씨다. 유인물처럼 무한정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딱 하나의 원본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단순히 아날로그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이 회자되는 루트는 '페이스북'이라고 하는 SNS였다. 결국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절묘한 조합이 이뤄진 셈이다.

또 하나의 진화가 이뤄졌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밖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안팎의 자유롭게 왕래한다. 그에 따라 아날로그적인 소통으로 보다 따뜻한 교감이 이뤄지는 동시에 디지털을 통해 그 교감을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달한다.

- <한겨레>에서 발췌 -


"깨끗하게 못해줘 미안해요" 파업 청소노동자의 대자보 '뭉클' <한겨레>

현재 파업에 들어간 중앙대학교 청소노동자 중 한 명이 학생들에게 남긴 게시물을 보라. 우선, 삐뚤빼뚤 정교하지 않은 그 손글씨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된다. 컴퓨터의 활자화된 게시물이 주는 느낌과는 천양지차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메일로 편지를 쓰는 것과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손편지를 쓰는 것이 주는 울림의 차이랄까?

사람들에겐 광장이 필요하다. 왁자지껄 떠들고,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사실 그 공간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 그곳이 어디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모이는 순간 '광장'은 만들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우리들은 철저히 '개인'이 되었고, '파편화'되었다. 개인들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렸고,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인 셈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순간적으로 그 공간을 '광장'으로 만드는 마법이다. 그렇게 구성된 공간(광장) 속에서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소통이 이뤄진다. 그 소통은 단지 아날로그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디지털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아날로그 소통과 디지털 소통의 진화된 방식의 조합이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사유하는 시민들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이며, 이로써 우리는 캄캄하기만 한 2013년의 마지막에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크 랑시에르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단지 자신들의 집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일상적 업무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거리로 내려와 그곳에 자리 잡을 때, 그리고 두려움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권력과 맞서기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때, 침묵하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때 기존 권력의 권위는 발가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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