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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는 착각

  • 입력 2015.11.30 13:30
  • 수정 2015.11.30 13:43
  • 기자명 묵혈(이승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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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두고 가장 많이 사용된 비유는 아마 ‘정보의 바다’일 것이다. 요즘은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90년대엔 속담처럼 돌아다니던 표현이다. 접근하기 힘들었던 정보들이 인터넷을 타고 한가득 몰려왔고,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대학교 수강신청을 비롯해서 많은 일들이 인터넷으로 이뤄졌고, 동시에 수많은 ‘나’들은 말할 곳이 생겼다. 서로가 소통하고 정보를 만들어내는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이 자리잡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애매하다. 지금 인터넷은 소통의 공간일까?
기술적, 물리적으로는 인터넷 내부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각자 평등하다. 그 누가 말을 하건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며,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임금의 하교, 전근대 정부의 벽보, 단상 위에 선 유력 정치인의 연설과 그 목소리를 키워주는 마이크와 스피커 세트, 유명 저자가 뒤덮는 베스트셀러 코너, 특정 권력이 독점하다시피 한 언론 매체 같은 것이 없다는 거다. 인터넷에서는 말 그대로의 난상토론이 가능하다(물론 여기에도 포털의 독점 같은 현상이 끼어들긴 하지만 일단 기술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지 살펴보자. 트위터 팔로워 수는 이미 권력과 동급으로 취급되며, 댓글, 좋아요, 공유 횟수는 기존의 유명인이 압도적으로 높다. 물론 유튜브를 비롯해서 인터넷 스타들이 등장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스타가 되는 방법 이외에 다른 통로가 하나 더 열렸을 뿐이지 그들이 스타가 되었다는 사실, 그들이 대중의 관심을 독과점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을 뿐이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별 것 없다. ‘나’가 갈수록 컨텐츠 생산자의 위치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서의 소통 방법은 이런 식의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변화해왔다.


처음엔 게시판이 있었고, 누구나 글을 썼다. 채팅방이 따로 있었지만 채팅방과 게시판의 기능은 달랐다. 각각의 이용자는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위해 더 상세한 정보, 더 참신한 표현을 선보이려 경쟁했다.

여기에 글과 글을 엮고 싶은 욕구를 반영해서 댓글이 생겼다. 댓글은 어디까지나 기존 글에 대한 자신의 의견 표현이었기에 기존의 게시판 글보다 무게감이 줄어들었다. 답글과 댓글은 다르지 않나. 댓글이란 게시글에 대한 호불호만 밝혀도 그 기능은 충분히 다 한 것이니까. 댓글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베플이 생기고, 추천수에 따라 상위 댓글들만 노출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요즘 베플은 벼슬 취급을 받는다.


그러면서 게시판에 쓰는 글도 호흡이 짧아졌다. ‘냉무’, ‘제곧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냉무’는 ‘내용무’를 줄인 표현, ‘제곧내’는 ‘제목이 곧 내용’을 줄인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제목과 글을 따로 쓰는 것이 불편해졌다는 표현이었다.

게시판의
글은 넘쳐나는데 아무도 봐 주지 않는 글이 늘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쓴 사람들은 자신의 댓글조차 묻혀버리는 것을 보며 자신만의 공간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블로그가 흥하고, 게시판이 몰락했다. 일단 나만의 공간에서는 내가 묻힐 일은 없다. 방문자 수와 조회수는 보이지만, 내가 글을 쓰면 일단 내 글이 가장 위에 뜬다.
블로그의 유행이 한바탕 지나간 이후, 더 짧은 글들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SNS다. 이용자들은 원하는 사람의 글을 보면서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댓글은 더 단순해져서 소감을 남기는 게 아니라 관심글, 하트, 별, 좋아요로 변했다.



이쯤에서 한번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요즘 SNS의 글들을 과거 채팅방의 대화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외형상 닮은 부분이 많다. 인터넷 초기에 크게 유행하던 채팅이 몰락한 배경에는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발달한 여러 메신저 프로그램도 있겠지만, 아마도 채팅 기능의 많은 부분을 SNS가 대체하게 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렇게 더 짧은 글과 더 쉬운 표현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컨텐츠생산은 뭔 짓을 해도 일단 오래 걸리니까. 생각을 하고, 표현해야 하고, 제대로 표현됐는지 훑어봐야 하니까 당연히 힘들다. 단순히 키보드나 마우스질, 탭을 몇번 하는지만 세어봐도 컨텐츠 생산보다는 만들어진 컨텐츠에 대한 좋아요가 더 편하다. 한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뒹굴거릴 수 있는 시대에 좋아요, 알티, 관심글, 공유는 한손으로 할 수 있지만 자기 글을 쓰는 건 여전히 한손으로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간단하게 해결해 주는 것이 좋아요와 관심글 아니던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업체들은 이런 고객의 욕구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한 것 뿐이다.
하지만 정보의 바다에서 정보는 줄어들었다. 좋아요 하나만 있지 싫어요, 별로에요, 아쉬워요도 없지 않은가(물론 페이스북 측에서는 상대에 대한 공격을 조장한다는 생각에 싫어요를 넣지 않았을 수도 있다. 포털 사이트 영화 별점 전쟁을 보면 뻔히 보이지 않는가. 5점과 0점의 전쟁). 하긴 이런 부분을 거세하고 사람들 마음 속의 불편함을 줄였기 때문에 페이스북이 그토록 거대한 성공을 거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좋아요도 어엿한 의사표현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어서 좋아요 한번 눌렀다가 필화사건을 겪는 일도 많다.(물론 이런 일은 대한민국 최고의 도덕성을 요구받는 연예계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고,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썼을때 거기에 좋아요만 찍어댔으면 후학이 자랄 수 있었을까? 학파를 형성하기는 커녕 그들 스스로의 주장들도 묻혔을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더 많은 표현과 주장들이 쏟아져나와야 뭐든 발전이 있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를 살고있는 우리에게는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생각의 표현들이 필요하다. 질과 양, 다양한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뭐 별게 대단하던가. 다 같이 모여서 생각하다 보니 그 중 하나는 쓸만한 것이 나와서 민주주의가 여태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정치를 말하던 사람들이 인터넷에 그토록 열광했었지 않나.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은 민주주의와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는 중이다. '존잘'은 넘쳐나는데 그 많던 ‘나’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요즘 좋아요를 찍을 일이 있으면 꼭 간단하게라도 댓글을 남기고, 트위터 리트윗은 인용리트윗이 아니면 거의 하지 않는다. 인용 리트윗을 하면 원 글에 대한 내 의견을 짧게라도 적어야 하고, 그럼 내 감상이 같이 남으니까. 출처를 밝히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얼마든지 남길 수 있다. 무턱대고 남의 글을 마구 퍼다가 범죄행위에 가까운 표절을 하던 것과는 다르게 만들어진 지금의 인용 리트윗 시스템이 좋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표현하기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낸 장치라고 할까.
어찌 보면 거대한 흐름인데 여기에 홀로 맞서서 역행하는 건 유행을 거스르고 고립을 자초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엄청 힘들기도 하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한번 권해보고 싶다. 좋아요를 넘어서는것. 조금이라도 당신의 의견과 생각을, 발자취를 인터넷에 남기는 것을 권하고 싶다. 김대중은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고 하지 않았나.



최소한 이러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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