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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서 악몽까지, 볼펜의 역사

  • 입력 2015.11.17 12:32
  • 수정 2015.11.17 13:03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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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보험업을 하던 루이스 워터맨은 엄청난 계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서명만 완료하면 모든 계약이 성사되는 순간, 펜에서 잉크가 쏟아지며 보험계약 서류가 완전히 훼손되었다. 이 실수 때문에 계약은 수포로 돌아갔고 워터맨은 잉크가 쏟아지지 않는 펜 개발에 몰두했다. 그렇게 개발된 것이 만년필이다.

워터맨은 오랜 연구 끝에 만년필을 내놓았지만 이 만년필도 마냥 편하진 않았다. 주머니에 넣고 돌아 다니면 바지에 잉크가 잔뜩 묻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가방에 넣은 만년필이 터져서 가방 안의 종이를 모조리 더럽히는 경우도 빈번했다.
1930년, 헝가리에서 기자를 하던 라즐로 비로도 마찬가지였다. 만년필을 쓸 때마다 “우라질 만년필!” 소리를 여러 번 내뱉던 그의 머리 속에 하나의 생각이 반짝 지나갔다.

신문 인쇄용 잉크는 금방 마르잖아?

그런데 신문 인쇄용 잉크는 너무 찐득찐득해서 잉크가 펜촉을 통해 흘러내리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자 출신 라즐로 비로는 이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리고 운좋게 화학을 전공한 동생 게오르그가 곁에 있었다. 라즐로는 게오르그를 닥달해서 펜촉에 금속공을 붙인 펜을 개발해 냈다. 금속공이 지면과의 마찰로 회전하면서 종이에 잉크를 묻히는 시스템, 볼펜의 발명이었다.


볼펜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곳은 전쟁터였다. 영국 공군은 높은 고도에서 잉크가 솟구쳐 무용지물이 되는 만년필 대신 볼펜을 도입했다. 한국도 한국전쟁 때 몇 몇 종군 기자들이 볼펜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6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1962년, 5.16 쿠데타 1주년을 기념해서 당시 군정 정부가 국제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이 박람회에 참여한 광신화학 송삼석 회장은 한 일본 기업 참가자가 잉크도 없이 종이에 글을 술술 써내려 가는 길쭉한 펜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그는 즉시 일본 볼펜 제조사와 제휴하고 한국에 볼펜을 들여왔다. 이때 만든 펜이 우리가 익히 아는 ‘모나미 153’ 볼펜이다.


왜 153이란 숫자가 붙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분하다. 창업주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에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 예수는 베드로에게 바다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시켰고 그때 잡힌 물고기가 153마리더라'는 성경 구절에서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정가가 15원인 광신화학의 세 번째 제품이라는 뜻이 있다는 설도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떤 한 가지 설이 정확히 맞거나 틀린 것은 아니고, 153이라는 제품명에는 저 여러 이유들이 조금씩 가미되어 있다고 한다. '모나미'란 프랑스어로 '내 친구'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모나미 153 볼펜은 30억 자루가 넘게 생산됐고 말 그대로 한국인들의 일상에 필요불가결한 친구가 되었다. 수많은 연인들이 볼펜으로 사뿐사뿐 눌러 쓴 연애편지를 들고 우체통 앞에서 가슴 설레 했고, 까까머리 군인들은 내무반 침상에서 고참들 몰래 볼펜 끄적이며 눈물 젖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글로 먹고 사는 작가들의 경우는 호불호가 갈렸다. 작가 박영준은 문하생들이 볼펜으로 작품을 써 오면 정성이 없다고 집어던졌고 <객주>의 김주영 작가는 ‘잉크에 펜을 찍어 오는 그 시간에도 생각을 한다’ 며 만년필을 고집했지만, 고은 시인은 ‘물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볼펜을 반세기 동안 이용해 왔고 조세희는 볼펜으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썼다.
이처럼 다양한 추억을 담고 있는 볼펜은,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고문도구였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이 볼펜 한 자루로 수백 명에게 지옥같은 고통을 안겼다.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볼펜 심을 남자의 요도에 꽂거나, 볼펜 손가락에 끼우고 짓이기는 등의 볼펜 고문이 자행됐다.



박종철을 죽였던 박처원 치안감은 "빨갱이 수백 명을 저승길로 보낼 조서를 쓰느라 볼펜대를 쥔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배겼다"며 자랑까지 했다니, 볼펜이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광주항쟁 때는 북한 간첩이 독침을 가지고 누굴 찔렀느니 마느니 하는 일이 있었는데 독침이라고 주장한 것이 평범한 볼펜 한 자루였던 일도 있고, 김대중으로부터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이라는 볼펜을 받은 일이 내란음모의 증거로 둔갑한 적도 있었다.
연필은 쉽사리 지워지고 만년필은 고급스럽지만 번거로웠다. 가장 만만한 필기구였던 볼펜은 우리 사회의 바닥을 지탱하던 사람들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1992년 12월 자신의 왼팔에 유서를 볼펜으로 쓰고 투신한 여성 노동자 권미경 씨가 그랬듯이.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닌 미경이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하략)

그리고 죽음으로 역사를 바꾸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 버린 전태일의 유서도 볼펜으로 쓰였다. 아마 활자로 읽은 사람은 많겠지만, 전태일 특유의 빼뚤빼뚤한 글씨로 쓴 원문을 볼 일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하는 데 까지 하고 부딪치는 데 까지 부딪치다가 결국 스스로를 불사르기로 작정한 전태일은 어떤 심정으로 볼펜 꾹꾹 눌러가며 저 유서를 썼을까.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못 다 굴린 하지만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기며" 적었을 유서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들여다 보면 상처 무성했을 그의 손이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처럼, 필적은 참 많은 것을 추억케 한다. 추억할 것이 없다면 상상의 여지라도 남긴다. 그러니 시간이 난다면 한 번쯤 옛 편지함을 들춰보기를 권한다. 친구와 선후배가, 혹은 옛 애인들이 적은 볼펜 글씨들은 아마도 당신이 몇 시간쯤 행복하게 추억을 곱씹을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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