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이름을 적을 때 저는 대개 뒤에 대통령을 붙여 줍니다. 이승만도박정희도 독재자이긴 했으나 어쨌건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됐거나 또 정당한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저는 대통령 호칭이 합당하다고생각합니다. 노태우도 광주학살의 책임이 있긴 하지만 어쨌건 직선 대통령이고 그 뒷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가없지요. 하지만 딱 한 사람 전두환만큼은 저는 대통령 호칭을 여간해서 붙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대한민국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고 휴전선 이남의 공화국 영토를 제 식솔들의 놀이터로 만들어버렸던 광주의
영화 중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법치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원리로 삼는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폐병으로 쓰러져가는 열 서넛 시다들의 권리를 제발 살펴 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육신을 스스로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전태일이 죽은 며칠 뒤부터 김재준 목사나 기타 한국 기독교의 거인들 (조용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이 제기했고, 문익환 목사는 “전태일이야말로 예
ⓒ연합뉴스사진은 2013년 대구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 현장입니다. 전과 40범의 한 남자가 쓰레기 문제로 다투다 이웃 노인을 주먹과 둔기로 때려죽이려던 찰나 이 청년이 몸으로 막아서 참사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 어떤 분과 쪽지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주변의 아픈 사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제가 예전에 를 맡으며 주워듣고 어깨너머 봤던 사건들과 유사한 일에 대해 물어보시더군요. 아무래도 개입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이것 저것 말씀하시고 누군가를 만나고 신고를 서두르시는 모습을 보면
몇 년 전 회사 사옥이 이전한지 얼마 안된 즈음이었다, 일단 이곳저곳을 뚫으며 먹을 만한 집을 찾던 중 정갈해 보이는 한 집을 누군가가 찍었고 우르르 들어갔다. 그런데 초입에서 반갑게 우리를 맞던 주인장과 우리 일행 중 한 선배가 거의 비슷한 탄성을 내질렀다. “어어어.....” 사연인즉슨 이 식당은 원래 2000년도 쯤 신촌에서 무척 잘 나가는 대박집이었고 매일 같이 이루는 문전성시에 돈을 갈퀴로 긁던 가게였다. 그러다 보니 당시 나와 선배가 함께 만들던 의 레이더에 걸렸고 방송을 타는 바람에 더 대박이 터져서 몇
한국 현대사에서 봄이라는 계절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4·19의함성과 총성 속에 스러져간 목숨들의 봄이 그랬고, 5·18 광주로 대변되는 80년의 봄도 그랬다.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라는 2천년 전 중국 여류시인 왕소군의 시구는 한국의 봄을 맞아 그렇게 여러 번 되풀이되곤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끔찍하고 떠올리기조차싫은 봄을 들라면 나는 1991년의 봄을 들겠다.1991년 초, 서울 명지대학교는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그 해 2월 명지대학교 당국이일방적인 등록금 인상안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대학교마다 들
존경하는 박준성 선생님이 쓰신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라는 책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얇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니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아프지만, 적나라하게 만나 볼 수 있다. 뻔히 알던 일이라 해도 마치 딴 사람처럼 치장하고 나온 동료를 대하듯 얼떨떨한 새로움에 젖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세기가 가도 '그날이 다시 오면' 엷어질지언정 지워지지 않는 느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래의 사건과 사람들처럼 말이다.1978년 2월 21일. 그러니까 34년 전 새벽에 동
바람이 끊이지 않고 몰아치던 지리산 자락, 전라북도 남원의 어느 집에서 한 남자가 죽었다. 남자 나이 쉰 다섯. 그는 식칼에 찔려 피살됐다. 살인자는 나이 서른의 가정주부였다. 치정관계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났고 돈 문제가 얽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한 관계였다. 그런데 그 원한은 무척이나 깊은 것이었다. 무려 21년 전 우물가에 물 길러 갔던 아홉 살의 소녀는 잠깐 이리 와 보라는 아저씨의 말에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갔고, 그만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아홉살 소녀의 고통과 놀라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느냐마는, 그 말문을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부장이 테러를 당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아파트 단지 앞.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던 쌍팔년의 8월 6일 오전,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은 심상치 않은 기운에 몸을 움츠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월간중앙에 '오홍근이 본 사회'라는 칼럼을 연속 게재하면서 군부독재의 그림자들을 비판한 후 협박에 시달려 오던 중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턴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글을 쓴 뒤에는 대놓고 자신을 미행하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그리고 그날도 몇몇의 발걸음이 저벅거리며 오홍근의 등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대공에서 나왔으니 좀 갑
1919년 3월 말, 수원 지역 만세 운동의 기세를 다시 달아오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3월 29일 수원 경찰서 앞에서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 남짓의 기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기가 찬 일본 경찰이 앳된 여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이를 지켜본 수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습격하는 사태가 빚어졌다.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군중. 출처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이후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에서는 3월 30일과 4월 5일 격렬한 만세 운동이 벌어졌
대학 1학년, 특히 1학기는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지식의 홍수에 휩쓸리는 시기였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름들, 사건들, 또는 배웠지만 영 내막이 달랐던 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나는 한 시인의 이름을 두고 크게 놀랐다.시인 김남주아니 이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단 말인가.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서정적이었고 부드러운 느낌의 시인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살벌하고 거부감마저 이는 시를 쓰다니. 궁금증은 풀어야 잠이 오는 건 이제나저제나 마찬가지였기에 선배를 붙잡고 물었다. "김남조가 이런 사람이었나요." 그러자 선배는
1921년 3월 19일. 한 화가의 개인전이 열렸어. 화가라는 이름을 달고 개인전을 여는 일 자체가 그다지 흔하지 않았을 시절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가일층 쏠린 데는 이유가 있었어. 매일신보 표현대로라면 “여성 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씨의 양화 전람회”였던 것이지. 이틀간의 전시회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몰릴 만큼 전람회는 대성황이었어. 수천 명의 관객을 동원한 화가 나혜석은 전도유망한 변호사 김우영의 아내였지. 조선에서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부부로 보였다마다. 그녀가 그로부터 28년 뒤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로 목숨을 다
어느 나라든 지하 세계는 있습니다. 제18대 대통령 당선인께서 대선 토론회에서 ‘지하 경제의 활성화’를 주창하셔서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한 기억이 새롭지만, 꼭 그 분의 표현을 들지 않더라도 공식적인 세상과는 또 다른, 으슥한 뒷골목의 문화와 음습한 지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법이죠. 그 지하 세계를 대표하는 단어 중 하나가 ‘깡패’ 되겠습니다. 자기들끼리는 건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간혹은 협객이라는 희한한 단어도 사용하는 모양입니다만 뛰어봐야 벼룩이고 기어봐야 바퀴벌레, 깡패는 깡패입니다.‘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결국
영화 '브레이브 하트' 스틸컷멜 깁슨의 원맨쇼(?)였던 에서 얘기를 시작해 보자. 여기서 멜 깁슨은 잉글랜드의 명군 에드워드 1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스코틀랜드의 영웅 윌리엄 월레스 역을 맡는데 영화 속에서 그는 에드워드 1세의 며느리, 즉 프랑스에서 시집온 이사벨라 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에드워드 1세는 “내 뱃속에 윌리엄 월레스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며느리의 황망한 속삭임을 들으며 경악 속에 죽어가게 돼. 그런데 이건 말도 안되는 얘기다. 이사벨라는 월레스가 죽던 당시 열 살인가 일곱 살인가 하여간 코흘리개
조선의 500년 수도 한양. 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서울에 동상을 세운다면 누가 적당할까? 많은 후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봉 정도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려 말 동북면 촌구석에서 군대를 훈련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이런 군대로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야망을 일깨운다. 결국,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다.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제갈량이었고 장자방이었다. 풍수가 좋다며 국토 남단 산골짝으로 들어가는 천도하자는 주장을 막았던 사람도, 안산 옆이 좋으냐 인왕산 아래가 좋으냐, 왕이 남향으로 앉느냐 동향으로 앉느냐 등의
말 한마디로 인생이 바뀐 사람은 많다. 역사를 바꾼 말 한마디도 부지기수다. 물론 말 한마디 때문에 없던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바싹 마른 들을 태우는 불씨 하나는 충분히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불씨 없이는 불이 나지 않는다. 1987년 6월 항쟁 때 사람들을 격동시킨 한 마디는 “탁 치니 억”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치안 총수가 4천만 국민을 상대로 팔팔한 청년이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고 엄숙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치를 떨기 시작한 것이다. 임오군란이 폭발하기 전 13개월 만에 급료로 받은 쌀에 모래가 섞인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최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말이 탐탁지 않다. 묘청은 조선의 밀레니엄적 인물이 되기엔 좀 자잘한 사람인 데다 묘청의 난이란 원대한 포부와 비전의 결과라기보다는 서경파와 개경파의 권력 다툼이 격화됐을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군가 네가 생각하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사건이 무엇이냐 물어온다면 대답하기 난감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50년래 역사를 바꾼 사건 하나를 들라면 기탄없이 이 사건을 들 것이다. 1949년 6월 6일. 대한민국 국립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흉가는 별 게 아니다.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으면 그 집은 흉가가 된다. 분명히 며칠 전에 멀쩡히 도배 깔끔하게 해 놓고 비워 놓은 집에, 에어컨 배관 구멍으로 새가 들어와 새똥을 갈기고 간 걸 본 적이 있다. 사람 손을 안 타면 집은 그렇게 금방 망가진다. 거미가 줄을 치고 벌레가 모여들고 쥐들도 대담해진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흉가가 되는 것이다. 흉가가 되면 가끔 사람들이 온다. 흉가 구경한다고. 곰곰히 떠올려보면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흉가들이 많고 그 중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흉가도 적지 않다. 나도 촬영차 그 몇 군데를
너도 잘 알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뉴욕은 수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두렵고 설레는 첫 발걸음을 내딛던 항구였어. 영화 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여주인공이 마침내 도착한 항구가 뉴욕이고, 영화 에서 마피아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이탈리아 꼬마 비토 콜레오네도 뉴욕을 통해 미국에 입성하지. 뉴욕 중심가의 마천루부터 뒷골목의 쓰레기장까지, 각양각색의 부자와 가난뱅이가 뒤섞인 대도시 뉴욕의 맨 밑바닥에는 당연히 미국에 갓 건너온 초보 이민자들이 있었단다. ‘자유의 땅’에서 자유로워지고 ‘기회의 땅’에서 기회를
아야와 센키치1933년 6월 17일 일본 제 2의 도시 오사카의 어느 거리에서 일본군 졸병 하나가 보행신호를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감행했다. 나까무라 마사까스 일병이었다. 이를 본 경관 도다 다다오의 입에서 "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이름도 살천스런 ‘일본 순사’의 벼락같은 호통이었다. 그런데 이 무단횡단자의 대응이 만만치 않았다.나까무라 마사까스 일병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순사의 스톱 명령에 저항했다. "나는 공무 수행 중이다. 그리고 나는 군인이다. 헌병이면 몰라도 순사 말은 들을 수 없다."고 ‘배를 째고’ 나온 것이다.
아득한 옛날 아프리카에서 어느 유인원이 두 발로 딛고 선 이래 인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와 멸종, 새로운 종의 탄생을 거듭하면서 지구상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그들의 화석과 유적은 인류의 이동과 당시의 생활상을 수십만 년 후의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를테면 70만 년쯤 전에 살았던 베이징 원인은 불을 피울 줄 알았고, 석기를 다듬어 사용했다. 그럼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물론 수십만 년 전의 땅과 바다는 지금과 많이 달라서 오늘날의 지도를 갖다 대는 것 자체가 무리겠지만 우리나라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