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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보다 해몽이 좋은 남북 합의문

  • 입력 2015.08.26 10:07
  • 수정 2015.09.03 14:52
  • 기자명 오주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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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대치 상황은 벼랑 끝까지 치닫는 듯 했다. 박근혜 정권과 김정은 정권은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갑자기 회담을 하겠다며 남북이 마주 앉았다. 43시간의 기나긴 회담을 마친 남과 북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고위당국자 합의내용>을 발표했다.

몇 줄 안 되는 ‘합의문’의 위력
몇 줄 안 되는 합의내용의 위력은 컸다. 먼저 남과 북의 대치상태를 평시상태로 바꿔놓았다. 휴전선 부근 주민들은 대피가 해제되어 일상으로 복귀했고, 최악의 사태를 걱정하던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안도했다. 불안해서 움츠러들었던 강남의 돈은 다시 거리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사퇴 압박을 받아오던 김관진 안보실장은 졸지에 무능하다는 딱지를 떼고 영웅으로 재 탄생했다. 언론들은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던 박근혜 대통령을 위대한 승리자로, 한국의 대처로 만들었다. 수많은 공약 파기로 인해 박 대통령에게 달려있던 ‘무원칙’이라는 꼬리표도 자취를 감췄다. “박근혜의 대북 원칙이 통했다”고 외치는 언론들 사이에서 무원칙의 대통령은 순식간에 원칙의 대통령으로 둔갑했다.


합의내용을 부풀려 자화자찬하는 일도 시작됐다. 회담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합의내용 중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은 제2항이다. 박 대통령이 이번 회담을 통해 요구한 두 가지(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와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합의내용 제2항과 남측 회담 대표였던 김관진 실장의 항목 해석을 비교해 보자.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당한 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합의내용 제2항)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지뢰 도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와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김관진 안보실장 주장)

꿈보다 해몽이 좋다더니
합의내용과 이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해석은 크게 달라 보인다. 합의내용에는 도발, 사과, 긴장완화, 노력, 약속과 같은 말이 없다. 누가 지뢰폭발 사고를 일으킨 건지 주체를 밝히지 않았다. 항목만 보아서는, 단순히 인명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겠다는 정도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떠오른다.


남측이 물러선 부분도 있다. 제4항 “북측은 동시에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기로 한다”는 부분을 보면 그렇다. 남측이 해제해야 할 것(전군비상, 한미연합작전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 북한정권은 이것을 두고 자국민들에게 “전쟁에 겁먹은 남한이 통사정해서 해제해 준 것”이라고 선전해댈 것이 뻔하다.

회담 결과를 ‘완승’으로 포장하려는 이유
이처럼 왜곡에 가까운, 부풀린 해석을 내놓는 이유는 뭘까? 이번 남북 간 군사적 긴장고조로 보수 중도층이 결집하는 효과를 확인한 청와대가, 회담결과를 완승으로 포장해 상승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보이슈가 터지면 박 대통령이 유리하다. 이는 이미 다수 사례를 통해 입증되었다. 취임 직후에 터진 인사 문제 때문에 지지율이 40%대로 급락했지만, 2013년 4월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태가 일어나며 남북 간 대치상황이 전개되자 지지율이 10% 포인트 이상 급등한 바 있다. 또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이 불거지며 추락하던 지지율이 2014년 신년기자회견에서 북한을 언급하며 통일은 대박을 외치자 상승세로 돌아서기도 했다.
안보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 여론은 대통령에게 쏠린다.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다. 때문에 어떤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지율이 추락하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일부러 안보이슈를 터뜨리기도 한다.
이번에도, 벌써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반등할 조짐을 보인다. 목침지뢰와 북한 포격에서 비롯된 군사적 긴장상황은 메르스 사태로 30%대까지 추락했던 지지율을 40%대로 끌어올렸다. 리얼미터의 일간 집계에 따르면 긴장이 고조됐던 지난 21일의 경우, 지지율은 42.4%까지 치솟았다.

이산가족상봉 카드 빼든 이유는?
지금처럼 합의내용을 정권에 유리하도록 포장할 경우, 이번 회담 타결로 인한 효과는 클 것으로 예상된다. 박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은 한동안 상승곡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안보문제는 야당이 쉽사리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는 이슈다. 문재인 대표는 합의 결과가 왜곡과 포장되는 것은 문제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이번 합의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번 남북 긴장사태와 합의 타결의 최대 수혜자는 박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다. 박 대통령은 추락하는 지지율을 끌어올려 임기 후반기 국정운영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찬스를 잡았고, 김 위원장은 북한군부와 주민을 결속시켜 체제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담 타결 효과가 언제까지 갈까? 안보이슈로만 끌어올린 지지율의 효과는 수개월도 지속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간파했는지, 남과 북은 이산가족상봉을 합의내용에 집어넣었다. 안보 이슈의 효과를 연장하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다. 여론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도발로 인한 회담에서 갑자기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가 나와 어리둥절한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남과 북 모두 당장 부담 없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가 이산가족상봉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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