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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살아온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는 순간, 영화 <암살>

  • 입력 2015.08.05 13:46
  • 수정 2015.08.05 18:21
  • 기자명 버락킴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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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영화의 화두는 '기억'인 듯 하다.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다룬 영화들이 속속 스크린에 걸렸다. <소수의견>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했고, <연평해전>은 제2연평해전 당시 사투를 벌였던 참수리 357호의 젊은이들을 기억해달라고 외친다. 그리고, 최근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우리의 시선을 일제 강점기로 이끈다. 거기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무명의 투사들이 있다.

1920년 의열단의 박재혁 의사는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암살했다. 그가 붙잡혀 순국한 후, 그의 늦은 편지 한 통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전달되었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형편이 뜻대로 되가니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염려해 준 덕분인 듯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였다.
이처럼 담대하고 차분한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시대에 맞서 싸웠고 버텼다. 이름을 남긴 이도 있지만 어떤 이는 이름은커녕 삶의 이야기도 남기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최동훈 감독)

대한민국 최고의 상업영화 감독 중 하나인 최동훈 감독은 자신이 불러내고 싶은 기억을 세련되게 이끌어내고자 했다. 거기엔 그 시대 독립운동가들의 낭만적인 정서가 배어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과 죽음을 불사하는 초연함이 한몫했다. 최동훈 감독의 제작노트 속에 담겨 있는 박재혁 의사의 편지는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충무로에는 1920~40년대 경성, 즉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망한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 시대를 다루었던 작품들의 실제 흥행 성적을 보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최동훈 감독은 특유의 상업영화적 감각을 이야기에 접목시켜, 관객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최동훈 감독 작품답게, 초호화 출연진으로 구성된 다양한 등장인물은 영화의 큰 재미요소다. 이중 생활을 하는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정재 분)과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 대표적인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이 있고, 카와구치와 강인국을 암살하기 위해 소집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속사포(조진웅 분), 폭탄 전문가 황덕삼(최덕문 분)까지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에 살인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과그를 돕는 영감(오달수 분)이 얽히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에 조승우와 김해숙 등 굵직한 배우의 특별출연도 더해졌다.


그러나 <암살>에 최동훈 감독의 전작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가 이번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화 속의 '기억'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의미는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던 순간, 김구 선생과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나누던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기쁨보다 미안함을 먼저 느낀다는 김구에게 김원봉은 '사람들에게 잊혀지겠죠?'라는 씁쓸한 대사를 던진다. 그 물음은 그대로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이 되어 관객들에게 되돌아온다.
'기억'의 두 번재 의미는 영화 말미에 드러난다. 해방 이후 결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실제로 이승만 정권과 경찰 조직의 의도적인 방해 때문에 친일파 처단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영화 속에서도 이어져, 친일 행적을 한 염석진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애국지사라며 뻔뻔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국가가 실패한 염석진의 단죄는 16년 전의 임무를 잊지 않고 기억했던 조직원에 의해 이뤄진다. 이 부분에서의 기억은 첫 번째와 결이 조금 다른, 잊지 말자는 다짐에 가깝다.


영화 속 시대에서 7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이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독립을 위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그들의 후손 중 대부분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반면 친일파와 그의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사회의 상류층으로 화려하게 살고 있다. 매 해 광복을 기념하며 기억하자, 잊지 말자고 외쳤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지 않으며 살아왔던 것일까.
영화 <암살>에는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반전의 순간이 몇 번 있다. 그러나 <암살> 속에 있는 가장 커다란 반전은, 무엇보다 그들을 잊고 살아온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반전은 이야기의 흐름을 바꾼다. 우리의 망각을 자각했다면 이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부터 다시 시작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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