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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강의’와 ‘강의 평가’ 사이에서

  • 입력 2015.08.05 13:49
  • 수정 2015.08.05 13:54
  • 기자명 309동1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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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강의를 한다는 것
, 좋은 선생님이 된다는 것, 강단에 서는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그 객관화의 지표가 되는 것이강의평가. 학기말에 이르러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교수가 강의를 잘 했는가, 하는 내용을 몇 문항의 객관식과 주관식으로 평가하게 된다. 2점 아주 나쁨, 4점 나쁨, 6점 보통, 8점 좋음, 10점 아주 좋음, 하는 식이다. 물론 익명으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강의평가 점수에 몹시 민감하다. 정교수의 경우 강의평점의 높낮음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지만, 시간강사는 일정 점수 이하가 나오면 해당 학교에서 다시 강의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내가 몸담은 학교는 10점 만점에 8점 아래의 강의평점을 받으면 해당 학기에 1회의 경고조치를 하고, 다시 그러할 경우 퇴출시킨다. 결국자기 만족의 범주를 넘어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첫 강의를 시작한 나는 그러한 분위기를 물론 감지하고 있었지만, 앞선 글에서 밝혔듯 어떠한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 평균 이하의 강의평점이 나올 경우 강의를 그만두는 것은 물론 아카데미의 모든 삶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소 가혹할 수는 있겠으나, ‘강의연구는 그 어떤 우선 순위 없이 함께 해 나가야 한다. 어느 한 편을 감당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면 하루바삐 그만두는 것이 나를, 가족을, 나와 관계 맺을 연구자와 학생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강의를 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대학국어 강의를 앞서 맡았던 선배들은 내게 종종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고, 나는 내가 마련한 여러 기준에 더해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어느 선배의 조언에 따라 나는 학기초에면담에 대한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모든 학생은 3월 중으로 가능한 면담 날짜를 나와 협의해서 잡자, 는 것이었다. 1학년 학생들이었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분위기였고 나는 그래야 하는가 보다, 했다. 일러 준 선배에 따르면 강의평가 항목에는면담을 했는가’, ‘면담 가능 시간이 공지되었는가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학기 초에 모든 학생과 면담을 하지 않으면 해당 항목의 점수가 크게 낮게 나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국어를 강의하는 선배들은 대부분 학생들과의 면담으로 학기 초에는 정신이 없었다. 나는 30여 명의 학생들 모두와 면담 약속을 잡았고, 3주차부터 공강 시간에는 항상 그들과 만났다.


개인 연구실이 없었기에 빈 강의실을 미리 물색해 보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학생들과 만났다
. 1차 과제인 자기소개서를 첨삭해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학생들의 글을 보면 그가 어떠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종종 대학 생활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차피 나도 겪은 시행착오였기에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 시간씩 넉넉히 면담 시간을 두었는데, 10분만에 끝나기도 했고 드물게는 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학생과의 면담은 어느덧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있었다. 월급이 더 나오는 일도 아니었건만, 공강 시간에는 항상 그들과 만났다. 한 번은 지도교수와 오후 2시에 약속을 해 놓았는데, 학생과의 면담이 길어졌다. 평소 같으면 그 어떤 약속이든 취소하고 지도교수를 만나러 갔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지도교수께 전화를 드려 약속 시간을 30분가량 늦추고, 계속 면담을 진행했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이해해 주실 거야, 하고 그저 믿었다. 내가 지금 눈앞의 학생이 두려운 만큼 내 지도교수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해 버렸다.
면담을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가 지도교수를 뵈었다. 한없이 작은 선생님에서, 다시 한없이 작은 학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학생과의 면담이 길어졌는데 도저히 먼저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이 누구보다도 두려웠어요 선생님, 했다. 지도교수가 그때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기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 이처럼 학과 교수에게 당돌함이나 맹랑함을 보인 바가, 아무리 기억해 봐도 없다.
특히 지도교수와의 약속은 절대적이다. 내 선배는 약속이 있어서 차를 몰고 서울로 가다가, 서울 톨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지도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있으면 잠깐 오라, 는 말에 선생님 제가 지금 밥을 먹으러 나왔는데 곧 들어갑니다, 하고 톨게이트를 지나 유턴해 다시 엄청난 속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어떤 용건인지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저 선생님께서 보자고 하시는데 제자 된 도리로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이었다, 고 했다. 나는 그 일화를 듣고 질려 버렸지만, 동시에 무척 존경스러웠다. 그를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제자 된 도리였다. 단순히 두려웠기 때문이라면 그는 톨게이트를 유턴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지도교수보다 두려운 것은 역시, ‘학생이다. 그리고 그것이제자 된 도리이자선생 된 도리라고, 믿는다.
면담을 거듭하며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불편함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학생이 내게 이건 대체 왜 하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그는 시작부터 뭔가 불만에 찬 얼굴이었고 그다지 의욕이 없었다. 나는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 스스로면담이라는 행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 어떠한 비판 없이 선배의 조언을 수용한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싫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학생에게 나와면담할 것을 강요했고, 이것은 원하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엄연한 폭력이었다. 모두가 원하고 있을 것이며 시간을 내 주는 쪽은 나다, 라며 시혜적인 행위로 나 스스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영부영 학생을 보내고, 나는 무척 부끄러웠다. 좋은 인문학 수업을 만들어 가자고 다짐해 놓고, 조별과제 때를 비롯해 실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가장 반인문학적 인간은 어쩌면 나(강사) 자신인지도 모른다.
예정된 면담을 4월초까지 모두 마쳤다. 중단하고는 싶었으나 이미 공지한 내용이었고 막바지에 이르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 이후 학기부터는 희망자에 한해 신청을 받았다. 여전히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하는 선배 강사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중간고사 이전 한 주를 면담과 자율학습 시간으로 두었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기 힘든 시기이기에 차라리 원하는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면담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학생들의 만족도는 높았고, 나 역시 즐겁게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즐거운 면담이 몇 있다
. Y학생은 등산이 취미라고 했는데, 면담을 위해 강의실로 가다가 나는 그러면 우리 같이 등산이나 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가 대학에 오고는 근처에 아는 산이 없어서 항상 아쉽다, 고 하기에 내가 자주 가는 동네 뒷산이 있어서 가볍게 말을 꺼냈다. Y는 몹시 기뻐했고, 우리는 함께 왕복 1시간 내외의 평탄한 산길을 걸으며 그의 대학원 진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E학생은 자신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며 울먹울먹했다. 만날 때부터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가장 성실하게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보통은 이럴 때 힘내라는 말을 해주곤 하는데 사실 그건 너무 뻔하고 내게 가장 힘이 되었던 어느 선생님의 말을 내게 전해줄게, 내가 고등학교 때였는데 방송국에서도 온 무척 큰 행사가 있었어, 전교생이 모두 강당에 모였지, 그런데 어느 젊은 선생님께서 나중에 내게 그러시더라고, 수백 명의 학생이 모여 있는데 이상하게 그 중에 너만 눈에 들어오더라 반짝반짝 하고 말야, 내가 무언가 눈에 띄는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어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지, 그런데 나는 그때부터 내가 평범한 한 인간이면서 자아를 가진 무척 특별한 인간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알았어, E 너에게 이 말을 해주는 건 강의실에서 가장 반짝반짝 하는 게 바로 너이기 때문이야, 너는 내가 가장 먼저 이름을 외운 학생이야, 너는 특별하단다. 공치사가 아니라,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E는 눈이 조금 더 부은 채로 웃으며 돌아갔다. 지금도 가끔 자신의 근황을 전해 오는 감사한 제자다.
J,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 학생이다. 그다지 긴 시간 면담을 하지도 않았고, 그가 특별한 고민을 들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래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더 없니, 하고 묻자 그가 툭 던지듯이 했던 어느 한 마디, 나는 그것을 붙잡고 남은 학기를 버텼고, 지금도 버티고 있다.
교수님은 무척 행복해 보이세요, 내가 행복해 보인다고? 왜지?, 강의를 할 때 교수님처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분반 친구들과 가끔 교수님의 이야기를 해요 우리도 열심히 공부해서 후배들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그런대로 행복한 삶일 것 같다고요.
에피소드 1 2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강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도망쳤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J는 내게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구원 받은느낌이었다. J를 보내고 나는 한참을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학회에서 첫 논문을 발표했을 때, 처음 보는 연구자가 내게 와서 연구 정말 열심히 하셨네요 덕분에 저도 연구의 방향성을 잡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했고 나는 그 말을 붙잡고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욱, 나는 행복했다. 그래서 연구실에서도 강의실에서도 어떻게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정말로 행복했다.
첫 학기의 강의평가 점수는 10점 만점에 9.56이 나왔다. 그 해의 우수강사로 선정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집에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서 이불로 입을 막고 소리를 질렀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지만, 계속 강의해도 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어떤 근거를 만든 것이 너무나 기뻤다. 학기를 거듭하며 강의평가도 조금씩 올라서, 지난 학기에는 9.76을 받았다. 하지만 강단에서 비로소 어떤 여유를 조금 가지게 된 것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학생이 여전히 나의 지도교수이며
,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방시 2를 굳이 쓰는 것은, 지금의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언제나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한 인간이 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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