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이라는 단어는 시대의 핵심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단면을 폭넓게 함의한다. 갑과 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대, 약육강식-적자생존-우승열패의 논리,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가 그것을 국가와 국가의 구도로 옮겨와 정당화했다면, 지금은 사회가 그것을 두 팔 벌려 끌어안은 모양새다. 억울하면 ‘갑’이 되면 되잖아, 하는 담론을 ‘을’이, ‘병’이, ‘정’이 앞장서서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제국이 아닌 식민지에서도 우승열패의 담론이 심화되었고, 자강론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나보다 뒤처지는 ‘야만
우리 아빠는 강남구 한 아파트의 관리소장을 하고 계신데, 평소 주민들이 음식이나 물건을 나눠주고는 한다. 꼭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이지만. 어제는 집에 왔더니 거실에 치약이 가득했다. 불안한 기운은 역시, 뉴스를 보니 치약 이슈가. 참 대단해...— FOX-B (@FOXB_) 2016년 9월 27일조작 아니에요. ^^;; pic.twitter.com/gQN8ys91Pa— FOX-B (@FOXB_) 2016년 9월 27일자신을 강남구 모 아파트 관리소장의 아들이라고 밝힌 이가, 지금 거실에 치약이 가득하다는 내용의 글을 트위터에 올
어느덧 2년의 시간이 흘러, ‘2016년’ 4월 16일이다. 2년 전 나는 대학의 연구실에 있었다. 모니터 한 켠에 띄워둔 뉴스 속보 창을 계속 새로고침 해 나가면서 논문을 썼다. 지금은 어린이집에 간 아이의 방에 홀로 앉아 논문 아닌 글을 쓴다. 내 연구실 자리에는 새로운 젊은 연구자가 들어와 논문을 쓰고 있을 것이다. 작년에 라는 책을 쓰고서는 대학에서의 삶을 모두 그만두었다. 그래서 대학의 연구실이 아닌, 아이가 어질러 놓은 집의 난잡한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글을 쓰며 산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둡니다.며칠 전 오래 사용해 온 연구실 책상을 모두 비웠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동생이 뭐하는 거야, 학위가 아깝잖아, 그런 감정적인 행동은 그만둬, 하고 다급하게 연락해 왔지만, 저는 이제 교수 자리를 거저 준대도 싫어,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하고는 계속해서 책을 박스에 담았습니다. 모든 짐을 밖으로 옮기고는, 연구실 의자에 앉아 텅 빈 책상과 마주했습니다. 눈물이 쏟아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렇게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안녕히 나의 모든 것”하고는, 일어났습니다
2013년 여름엔, 참많은 비가 내렸다. 나는 그때 대학 연구소의 일을 돕다가 발목을 다쳐 한참을 누워 있었다. 상처가 조금 아물어 절뚝이며 병원을 오갈 수 있게 되었을 쯤, 학과선배 L에게 이른 아침부터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조조영화나한 편 보자는 것이었다.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 했던 나는 무척 기뻤고, 곧 그와 만났다. 마침 밤새 내린 장맛비가 그쳐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L을 만나 어떤 영화를 볼까, 하며영화관 매표소로 가는 도중에 학과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1년 후배인 조교실장 P였는데, 그는 학교에 큰일이 났으니 들
연재하는 동안 ‘지방시’ 맞으시죠,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혹시 지방시 필자가 맞다면 어느 토론회에패널로 참석해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대개의 경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전국에는 몇만 명의 지방시가 있고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하는 것으로답을 대신했다. 나 홀로 박복한 청춘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뿐 아니라 우리 사회 그 어디에도 지방시는 있다. 이것은 ‘헬조선’이나 ‘갑질’이라는 신조어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나 역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평범한 청춘일 뿐이다. 그래서 누가 지방시인지
학기가 10주차에 이르면 발표와 토론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들에게 조별로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해 발표하게 하고 모두와 함께 토론 시간을 갖는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한 번 다루었듯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특히 내가 말을 아낄수록 그렇다. 처음에는 토론자로 몇 번 참여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저 강요가 될 뿐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사회자의 역할을 맡는다. 가끔은 절실히 말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꾹꾹 참는다.지난 학기에는 어떤 학내 문제에 대해 토론하던 도중 ‘교직원’이라는 키워드가
2010년 즈음 박사 과정 중에 잠시 어학당에서 ‘한국어’ 강의를 했다. 내가이십 대 후반이었던 때다. 대학 입학을 앞둔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가르치는 일이었다.나는 어학 전공이 아니었지만 몇 주 간의 위탁 연수를 거쳐 해당 어학원에서만 활용 가능한 강사 자격을 받았다. 2010년을 전후해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가 성황이었다. 많은 학교들이 급히 어학당을 설치해 각국 학생의 유치에나섰고, 문학에서 어학으로 전향하는 주변 연구자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일본이나 카자흐스탄과 같은 나라로 일찌감치 떠난 이들도
맥도날드의 카운터 업무는 주로 나이 어린 크루들이 도맡아 한다. 나는 물류하차 업무를 하고 있기에 카운터에 설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장 여기저기에 잘 울려 퍼진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빅맥 세트 하나 주문하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운터 크루들뿐 아니라 거의 모든 매니저들이 손님과 햄버거에 함께 존대를 한다. “빅맥 세트 나왔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맥도날드뿐 아니라 그 어떤 매장에서든 사람과 물건을
두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나면 주섬주섬 뒷정리를 한다. 칠판을 지우고, 컴퓨터를 끄고, 출석부와 펜을 가방에 집어넣고, 마지막 시간이라면 에어컨이나 형광등도 끈다. 그러다 보면 종종 돌아가지않고 저 할 말 있어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이 몇 있다. 그들은 대개 글쓰기 첨삭이나 진로상담을 부탁해온다. 그렇게 일주일에적으면 1건, 많으면 5건에가까운 면담을 진행한다.나는 학기초마다 면담을 희망하는 학생은 언제든 찾아오라고 공지하고 있다. 나뿐아니라 대부분의 시간강사들이 그렇게 한다. 면담이 강제된 것은 아니고 그런다고 해
언젠가 개강을 앞두고 강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학과장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문 열심히들 써요, 강의평점 같은 거 적는 란은 이력서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강의 대충하란 말은 아닌 거 다들 아시죠?”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곧 둘 다 잘하라는 내용임을 알았다. 학과장의 조언은 일면 차갑게 느껴지기 쉬우나, 실상은 연민 어린 말이다. 그저 강의나 잘하면 된다, 고 하면 될 것을 젊은 강사들의 앞날을 고려해 강의와 연구의 우선순위를 잘 마련하라, 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야속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할 말
강의 첫 학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1교시 수업이 있던 어느날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정각이었다. 그러니까, 1교시의 시작과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꿈인가 싶어 잠시 멍하니있다가 이내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수를하고, 면도를 하고, 옷을 걸쳐 입고 가방을 챙겨 뛰어 나갔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거니 9시 5분이었다. 아마 얼굴에 물만 요란하게 묻히고 닦고, 10초만에 면도를 끝내고, 늘 입는 옷을 후다닥 입고, 강의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을 기계적으로들고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9시 30분에
강의실에서 처음 학생들과 마주했을 때, 나는 무척 두려웠다. 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무엇을 가르치면 안 될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가를 깨달았다. 약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정말이지 훌륭한 인문학을 만들어 냈다. 평범한 집단 지성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나의 지도교수가 되었고, 구원자가 되었다. ‘교학상장’,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한다, 라는 말을 항상 기억하며 강단에 선다. 이 글에서는 평범한 지방대시간강사의 시선으로, 학생들
완소, 버카충, 그리고 개이득강의실에서 나는 주로 교수님이나 선생님으로 불린다. 가끔은 ‘강사님’이라고 내 정확한 직위를 상기시켜 주는 학생들도 있고 간혹 저기요, 하는 말도 듣는다. 굳이 호칭을 어느 하나로 바로잡아 준 일은 없지만 ‘저기요’에게는 “여기는 식당이 아니잖아요.”하고 가볍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가끔 ‘형’이나 ‘오빠’라는 호칭도 듣는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곧 민망해 하며 사과하곤 한다. 처음에는 아이 뭐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하고 그저 멋쩍게 웃고 말았으나, 요즘에는 듣기는 참 좋
나는 지난 글에서 학생들의 가능성을 무한히 존중해야 함을 누차 역설했고, 그들을 ‘지도교수’나 ‘구원자’로까지 표현했다. 그러나 학생이 언제나 옳다는 감성적인 말을 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교학상장.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하는 관계에 있다. 교수와 학생 모두 스스로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서 채워나가야 한다. 어느 한 편이 자신과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혹은 사유하기를 멈춰 버리면 그곳은 더 이상 강의실이라고 할 수 없는 죽은 공간이 된다.강의 3년차,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첫 학기부터 한 번 이상은
좋은 강의를 한다는 것, 좋은 선생님이 된다는 것, 강단에 서는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그 객관화의 지표가 되는것이 ‘강의평가’다. 학기말에이르러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교수가 강의를 잘 했는가, 하는 내용을 몇 문항의 객관식과 주관식으로 평가하게된다. 2점 아주 나쁨, 4점 나쁨, 6점 보통, 8점 좋음, 10점아주 좋음, 하는 식이다. 물론 익명으로 이루어진다.대부분의 강사들은 강의평가 점수에 몹시 민감하다. 정교수의 경우 강의평점의높낮음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지만, 시간강사는 일정 점수 이하가 나오면 해당 학교에서 다시
'웹툰' 속 나는 ‘웹툰’을 무척 좋아한다. 포털에 연재되는 여러 웹툰을 요일에 맞추어 챙겨 보는 것이 삶의 작은 기쁨이다. , , , , , , , 등이 내가 즐겨 보는 작품들이다. 스무 살 무렵에는 가 좋아 ‘성게군 다이어리’를 사고 꽃이 예쁘게 핀 선인장을 책상 위에 올려 두기도 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또래들이 ‘성게군’과 ‘불가사리군’, ‘선인장양’의 매력에 빠져있던 때다. (마린블루스의 작가 정철연은
이전 글 보기 : 조별과제와 직무유기나는 학부생 시절 ‘조별과제’를 무척 싫어했다. 수강신청 기간에 강의계획서를 살펴보며 조별과제가 있는 과목을 우선 제외할 정도였다. 누구나 경험이 있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해 발표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새내기 때부터 몇 건의 조별발표를 거의 혼자 진행하며 나는 지쳐 버렸다. 한 번은 발표 당일에 4명의 조원 중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지 않아서 혼자 발표를 진행했다. 늦잠을 잤다는 조원은 그나마 양반이었고 두 사람은 수강철회와 군휴학으로 그
이전 글 보기 : 좋은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글쓰기를 가르치겠다고 대학 강단에 섰는데, 나는 무척 복잡한 심정이었다. 타인에게 어떠한 방식의 ‘쓰기’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생김새와 성격이 다른 것처럼 저마다의 글쓰기 역시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어느 모범 답안을 정해두고 획일화 된 ‘좋은 글’ 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한 사람이 일평생 체화해 온 체계를 억지로 바꾸는 작업이다. 그러면 글쓰기는 어렵고, 지루하고, 고된 행위가 될 것이다.모든 학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나는 강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