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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9일, 그날부터 광장은 우리의 것이었다

  • 입력 2015.07.09 10:50
  • 수정 2015.07.09 11:53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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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광장의 역사가 없었다. 무슨 기념일이든, 모모한 날이든 엄숙한 단상 앞에 열지은 의자들의 집합이 있었을 뿐이고, 고유의 명절에 남녀노소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다는 동이족의 문화는 오랫동안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그 뜻을 나누고 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하나가 되어가는 광장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1987년 7월 9일 그 광장이 탄생했다.
1987년 6월 9일 6.10 항쟁의 불이 당겨지기 전날, 연세대 시위에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은 그 때부터 한 달을 더 살았다. 이한열의 친구와 선후배들이 전두환 정권과 사생결단을 내던 한 달이었다. 이한열은 무의식 상태에서나마 그 모든 것과 함께 한 후 죽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장례식이었다.


연세대 교정에서 올려진 그의 영결식에서 문익환 목사는 잊혀지지 않는 명연설을 한다. 그것은 유려한 문장과 유창한 달변으로 구성된 연설이 아니었다. 그저 호명이었다. 이름들의 나열이었다. 아니 이름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외침을 들으며 사람들은 가슴에서 끌어올려지는 가래 같은 울음을 터뜨린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진성일 열사여. 송광영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박종철 열사여... 광주 2천 영령이여....”


학생들도 있고 노동자도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아무런 순서도 없이, 이유도 없이 머리를 스쳐가는 구름 같은 삶과 죽음들을 불렀다.
그 많은 죽음들 가운데에서 부산의 아들 박종철이 물꼬를 트고 수백만의 손과 발이 연 물길 위에서 광주의 아들 이한열은 어머니와 함께 광주로 향했다. “한열아 가자. 이제 우리 광주로 가자.” 광주에 가기 전, 이한열은 한곳으로 향했다. 그의 상여를 멘 사람들, 그 상여를 지키고자 인간띠를 두른 사람들, 그리고 지난 6월의 승리를 만끽하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역사 앞에서 용감했던 학생에 대한 고별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 1987년 한국에서 밥 먹고 살아가는 자로서 이건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수천 수 만 수십 만 갈래의 흐름이 되어 한곳에 모였다. 서울 시청 앞이었다. 사람들의 홍수였다. 그리고 사람의 사태였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한 끝의 거리낌도 없이 대한민국 국민들은 오래간만에 열어젖힌 광장의 주인이 됐다. 누군가의 통제가 통할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을 어떻게 하자고 할 엄두도 안 나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인파였지만 그 속에는 질서가 있었고 평화가 있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났지만 가슴 속으로는 뿌듯함이 솟았다.
이한열의 상여 앞에서 시민들은 조기 게양을 외친다. 프레지던트 호텔, 플라자 호텔 등 주변의 모든 건물의 태극기가 조기로 바뀌었지만 시청만큼은 완강하게 버틴다. 이때 시민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서울 시청의 태극기의 높이를 낮추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정권이 눈을 부라리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릴 뿐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나라의 주인이었고, 자신들의 광장에서 그 등기 절차를 마친다.


역사는 기억으로 유전된다. 시청 앞 광장은 이 날 이후 우리의 광장이 된다. 빼앗겨도 다시 찾아야 할 광장이 된다. 월드컵의 붉은 함성도, 촛불의 바다도 87년 7월 9일 오늘의 광장의 후예들일 뿐이다. 누군가 물꼬를 트고 여러 사람의 손과 발이 물줄기를 만들고 마침내는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이치는 변함이 없다.
잃어버린 우리 고대사(?)를 찾아야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으나 1987년 7월 9일만 잃어버리지 않아도 우리 역사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어기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들고 일어나 싸우면서도 약탈 하나 일어나지 않았고 수 만 명이 엉켜 싸우면서도 큰 파괴와 손상 없이 독재자를 굴복시켰고 자발적인 의지로 자신들의 광장을 만든 역사는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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