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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두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 입력 2015.07.03 10:05
  • 수정 2015.07.03 10:16
  • 기자명 BIG 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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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 : ‘많은’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폴리(poly)’와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의 변형태인 ‘아모리(amory)’의 합성어로, 서로를 독점하지 않는 다자간(多者間) 사랑, 즉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뜻하는 말.



동시에 두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여느 해보다도 봄이 일찍 찾아왔던 작년 이맘때 쯤, 한 남자를 앞에 두고 던졌던 질문이다. 사실상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내 쪽에서 답은 이미 'Yes'로 정해져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관계 속에서 욕망이 충족됐다고 생각될수록 더욱 커지는 욕심과, 안정을 원하면서도 불안정을 갈구하게 되는 내 안의 모순 속에서 끝없이 표류해왔다. 나와 한때를 공유했던 이들은 끊임없이 물어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고. 그러나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미워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바닥이 어딘지 알지 못한 채 끝없이 하강하고 있는 나의 마음만이 미웠을 뿐. 그 말인 즉슨, 나는 그들을 한번도, 제대로,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일까.
나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다. 연애를 할 때 남자를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종류의 자만심과 이기심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상대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그럴 필요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다 해도 나에게 돌아올 테니까. "다른 여자 만나서 바람 피워도 된다"는 나의 말은, 무언가를 용인하고 포용하는 형태의 언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히 나의 이기심에 기반을 둔 자전적 선언에 가까웠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에게서 만족을 얻어낼 수 없을 땐 동시에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둘 모두를 버려둔 채 다른 사람이 내민 손을 잡아버리기도 했다. 도덕적으론 옳지 못했으나,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도덕은 사회가 강제한 기준, 윤리는 내가 세운 가치다.) 그렇게 해서 내 욕망에 조금이나마 솔직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저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었다. 이 같은 행위에 '폴리아모리'라는 어설픈 개념을 차용한 것은 어쩌면 비겁한 변명이었다.



어린 날의​ 경험
당시 내가 좋아했던 남자아이에게 받은 문자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동시에 두 명을 좋아해. 너도 좋아하는데, 그 애도 좋아해." 그는 솔직했고, 단호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이상하게도 '고마움'이었다. 그의 잔인한 경쾌함에 진심으로 고마웠다. 열여섯의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엔 아무런 죄도 문제도 없다는 것을. 당시의 깨달음엔 어떠한 철학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그가 나 말고도 좋아한다던 여자아이에 대한 감정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밉게만 보이던 그 여자아이가 왠지 모르게 더 이상 밉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이상한 이음새로 전용되었다. 영화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뿐"이라는 대사가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오면서,​ 연애와 결혼이라는 화두에​ 대해 정상적으로, 막힘없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친구와는 특히. 실컷 수다를 떨다가도,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반쯤 닫아버리게 된다. 상대와 사고의 기본 전제부터 다를지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를 꺼냈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니까. 가장 내밀한 연인과의 사이에서도 분명한 한계를 느낀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기 이전에 주고받았던 관계와 사랑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이제 사랑하느냐 마느냐 하는, 감정적인 문제로 치환되어 버리기 일쑤다.
과시적 사랑에 대한 모순적 욕망, 권태 상황에 대한 병적인 회피, 감정의 지속성에 대한 깊은 회의감으로 가득 찬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어쩌면 영영 이겨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또 다시 수많은 도덕적 배신과 윤리적 자위를 일삼을 테지. 견고해 보이는 바람벽에 바람이 드나들듯, 풍성한 사랑 속에서도 분명 수천가지의 은밀한 분노를 꿈꾸고, 배반의 욕망을 키워갈 거다. 간헐적 아픔은 있되, 맹목적 후회는 없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멈출 수 있는지의 여부는 나의 이성이 하는 일이 아니다.



과연 이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거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질문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파멸과 혼돈만이 남을지, 아니면 적당한 만족을 취하는 중간 정착지에 닿게 될지. 애초에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가 아닌 만큼, 계속해서 돌고 도는 쳇바퀴에서 힘겨워하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내가 현재 추구하는 그 무엇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행복이라는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건너, 사랑이라는 둘만의 공산주의를 지나서, 과연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내가 기대고 있는 사유의 종이가 너무도 얇고 흐릿해서, 그저 견뎌내야 한다는 애매한 결론에 매번 당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낙서협동조합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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