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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주기철 목사의 다섯 가지 기도

  • 입력 2015.04.24 18:36
  • 수정 2015.04.24 18:40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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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그들은 신념을 버렸다

기독교가 그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끝내 잃지는 않았던 이유는 거개가 욕망으로 타락하고 권세 앞에 머리를 조아릴 때에도 끝까지 욕망에 저항하고 권세에 맞서 싸웠던 소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 예수천당’ 따위의 주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다.”라는 예수가 가르친 기도를 드리며 왜곡된 현실과 약한 자를 짓밟는 억압자들에 대해 싸웠던 역사 또한 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권세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요, 권력자는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들”이라며 일부 정신 나간 선교사들이 딴 생각하지 말고 예수만 믿고 천당 티켓 따라고도 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부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구절을 되뇌며 대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유관순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그랬고, 독립만세에 가담하지 않은 가톨릭 성당에 뛰어들어 “당신들은 조선 사람들이 아니오?”라고 처절하게 부르짖었던 기독교인들이 그랬으며, 짐승보다 더한 일본 경찰의 악형을 받으면서도 독립 의지를 꺾지 않은 숱한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농촌에 뛰어들어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상록수>의 주인공 같은 이들이 그랬다.
그러나 일제의 통치가 끝이 없어 보이고 탄압도 거세지면서 조선 기독교도 점차 타협과 변절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신사참배 문제는 그 핵심이었다. 일제는 처음에는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기독교 교리를 존중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중일전쟁 이후 파쇼 체제가 공고화하면서 일종의 기싸움처럼 기독교에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 기독교는 속속 무릎을 꿇는다. 최초로 굴복한 것은 감리교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임원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모습. c 조선일보

1936년 양주삼 초대 총리사가 신사참배 수용을 선언했고 1938에는 최대 교파라 할 장로교마저 무릎을 꿇는다. 전국 27개 노회 대표 목사 27명이 단체로 신사참배를 강행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목사들은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문제도 신앙적인 문제도 아니라고 이해합니다. 또한,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우리 목사들이 솔선 이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장로 교회는 일제 시대 대부분이 우상 숭배에 반대한 것 같이 얘기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저 유명한 한경직 목사도 스스로 신사참배를 했던 죄인이라 고백했거니와 장로교 대부분, 장로교 지도자 대부분,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신도 대부분은 신사참배 대열에 가세했다.


주기철 목사의 다섯 가지 기도

그러나 앞서 말했듯 기독교가 2천년을 흘러온 것은 권세에 영합하고 굴종하는 세력을 거스르는 정의파들이 항상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다. 그는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이 가르치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 상과에 입학했지만 몸이 안 좋아 낙향했고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기도 한다. 이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됐고 고향에서 목회를 하다가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다. 그리고 그의 일생 중 가장 빛나고 가장 혹독했던 시간이 열린다.


아들 주광조(당시 5세) 씨를 안고 있는 주기철 목사. 1937년.

1935년, 장로교 목사들이 모인 금강산 온정리 수련회에서 주기철 목사는 일제라는 미쳐가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적이 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침례인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간통한 헤롯왕을 그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통치자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침례인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다 하였고, 그 후에야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왜 못 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 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이 설교는 끝맺지 못했다. 설교를 듣다 기절초풍을 한 일본 경찰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난리를 치렀던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신사참배 반대를 선언했다. 이 정도 되면 일제의 눈엣가시가 아니라 눈에 뿌리를 내린 나무 같았을 것이다. 일제는 툭하면 주기철 목사를 잡아 가둔다.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에 찬성한 평북노회장이 심은 기념 식수를 도끼로 베어버리자 주기철 목사를 잡아들였고 경상북도 의성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기독교인들을 일망타진할 때에도 그 배후 혐의로 먼 평양까지 찾아가 주기철 목사를 끌고 왔다.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서 재연된 대부분의 고문은 이때 자행된 것이다. 해방 이후에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기독교인들처럼 주기철 목사는 그야말로 ‘빵잽이’였고 모든 일의 배후였다.
그때 그를 괴롭힌 것은 고문만이 아니었다. 고독감도 있었다.

“70여 명의 동지가 하루 아침에 다 잡혀 왔고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동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일본에 항복하곤 했다.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두 사람의 동지가 나가버리고,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나가버리고... 12월이 다 돼 가니까 그 수많은 동지가 다 나가버리고 마지막 네 명이 남아 끝까지 항거했는데, 그때 받았던 정신적인 고독감, 외로움은 정말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독재 정권의 고문 기술자들도, 기업의 노조탄압자들도 심지어는 인간을 차별을 금지하는 법에 반대하는 바리새인같은 기독교인들도 즐겨 내세운 수법 중의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아니 다 넘어왔는데 왜 너만 이러니?” 일제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곤죽이 되도록 고문한 다음에는 반드시 속삭였을 것이다. “아무개도 넘어왔다데쓰. 이러면 너만 다친다데쓰.”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민족 전체를 억누르고 짓밟는 권세에 항거했고, 핍박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 한 예수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였다.

“예수의 삶 전체는 남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탄생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요,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자기가 죽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일 것인가.”
『예수의 양(蘇羊) 주기철』, 김인수 저, 홍성사

의성경찰서에서 풀려 나와 그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산정현 교회 강단에 올라 남긴 주기철 목사의 설교는 한국 기독교사에 남는 명설교일 것이다. 그는 산정현교회 수천 성도 앞에서 유언 같은 설교를 남긴다. 그는 자신이 옥중에서 한 다섯 가지 기도를 얘기한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주옵소서.
장기간의 고난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기게 해 주옵소서.
내 어머니와 처자를 주께 맡깁니다.
의에 죽고 의에 살게 하시옵소서.
제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일제는 다시 주기철 목사를 투옥했다. 이제는 친일 기독교 노회까지 가세하여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 처분하고 가족들까지 목사 사택에서 내쫓는다. 하지만 교회 교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기철 목사 가족이 살던 집 담 너머로 곡식이며 먹을 거리들을 던져 넣었다. 가족들은 그걸 ‘만나’라 불렀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맬 때 하느님이 내려준 그 음식. 만나는 이렇듯 하느님만이 내리는 게 아니다. 곤궁에 처한 자, 위험에 빠진 자,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들을 위해 내미는 온정과 공감의 행동들은 모두 만나가 되는 것이다.


주기철 목사와 그의 아내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목사는 마지막 면회를 한다. 형무소장이 병보석으로 주기철 목사를 석방해 주겠다고 하지만 주기철 목사의 아내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당신은 승리하셔야 합니다. 살아서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주기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형무소 안에서 죽겠다고 말한다. 의연하게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처럼. 그러나 돌아서면서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은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부르짖은 예수처럼 인간적이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그 말을 남긴 그날, 주기철 목사는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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