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4월 16일, 그날 침몰한 건 '국가'였다.

  • 입력 2015.04.17 10:09
  • 수정 2015.04.17 10:14
  • 기자명 309동1201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목도했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시의원 후보 S의 선거운동원으로 일했다. 마침 누군가가 좋은 조건의 단기아르바이트를 얻었다기에 무작정 따라갔는데, 그게 그 일이었다. S는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해서 개인비서처럼 유세 현장에 끌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수업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을 만큼의 편의를 봐주었기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언젠가는 내게 선거사무장으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할 만큼, 그럭저럭 마음에 들게 일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단기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그러면 수업은 물론이고 논문도 쓸 수 없을 것 같아 완곡히 거절했다.

그리고 작년 오늘, 정확히 이 시각 즈음에,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뉴스 속보를 보고 있었다. 뱃머리가 서서히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을, 그저 먹먹하게 지켜보았다. 배가 가라앉을 수도, 혹은 백화점이나 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페리호도, 삼풍도, 성수대교도, 이처럼 현재진행형의 재난이 생중계 되지는 않았다. 배가 서서히 기울고, 그러다가 간신히 뱃머리만 내민 상태가 되기까지,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국가가 급파했다는 헬기도, 선박도, 그저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할 뿐,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국가의 무기력함을 목도했다.
4.16은 ‘국가-국민’이라는 연결고리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전례 없이 큰 균열을 준 것이다.


그날 침몰한 건 '국가'였다

국가는 ‘잘’ 구조하거나, ‘최선을 다해’ 구조했어야 한다. 전자였다면 국민들은 국가가 마련한 안전망에 안도했을 것이고, 후자였다면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이었다는 데 대부분이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 무엇에도 실패했다. 침몰 장면을 앞다퉈 생중계했던 언론들은 그 카메라를 구조 현장이 아닌 체육관으로 돌렸다. ‘사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 이루어졌다는데 그 어떤 방송국도 그것을 중계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고, 살리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데도 실패했다. 국가는 무기력했고 불성실했다.

애초에 구조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되었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자신이 지닌 한계를 진솔하게 고백했어야 한다. 동시에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고, 어떠한 시스템을 구축해 다음에는 동일한 재난 상황에서 반드시 국민을 구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전문가들의 견해만 무성했을 뿐, 국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에 대해 명확히 입장을 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사과를 해야 할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 순간 국가는 스스로 4.16의 제3자가 되었다. 국가는 솔직하지 못했고 뻔뻔했다.
그래서 4.16은 국가의 침몰로 기억되어야 한다. 특히 어린 세대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국가’라는 주체는 ‘정부’의 동의어로 읽혀야 한다. 대한민국의 침몰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침몰로 보아야 하겠지만, 국가와 정부는 명확히 구분되어 유통되는 개념은 아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진실해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국가는 국민 앞에서 한없이 약해야 한다.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자기 부족함에 무한한 책임을 지고, 몇 번이고 사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다. 4.16의 대한민국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또 않았다.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날 늦은 저녁, 시의원 후보 S에게 문자가 왔다. 내일부터 당분간 출근하지 마세요,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진 한 달을 쉬었다. 선거를 대략 열흘 앞두고서야 다시 사무실의 문을 열고 유세를 시작했던 것 같다. 다른 선거사무실들도 대부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선거 이후, 나는 백만 원이 약간 넘는 아르바이트 보수를 받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만나 본 시장, 도의원, 시의원 후보 그 누구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지 않았고, 정치적 이용 가능성만 타진하고 있었다.

벌써 1년이 지났다. 30대 초반인 나는 그간 숫자로 명명된 현대사의 어느 주요 지점, 그러니까 4.19, 5.16, 5.18, 6.29의 어느 순간도 직접 목도한 바가 없다. 그러나 4.16은 나와 주변 세대들에게 체험의 이정표가 된다. 이른바 국가가 앞장서서 ‘국가-국민’의 유기체적 관계망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4.16 세대들, 특히 어린 학생들이 국가와의 관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재구성해낼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변화의 추동자가 전적으로 지금의 국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