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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에서 홀로코스트까지, 나치는 진화론을 어떻게 왜곡했나

  • 입력 2016.09.28 20:04
  • 수정 2016.12.03 17:06
  • 기자명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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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성인은 노인보다 큰 뇌를, 남자는 여자보다 큰 뇌를, 뛰어난 인간은 평범한 인간보다 큰 뇌를, 그리고 우등한 민족은 열등한 민족보다 큰 뇌를 가지고 있다.”
인류학자 폴 브로카(1861)

오늘날 ‘인종주의’의 의미는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자신만큼 지적이거나 정신적이지 못하다고 여기면서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890년부터 1960년 사이, 특히 1930년대와 40년대에는 이 단어가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 당시 유럽과 북미의 지식인들은 인종 간의 지적, 정신적 차이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인종주의는 교육수준이 낮은 이들이나 사회적 부적응자들의 무식을 드러내는 정도로만 여기지만 히틀러의 시대에는 다수의 지도자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개념이었습니다.



때로 인종주의는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육체적·정신적 특징이라는, 곧 유전학의 관점에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곧, 다른 민족, 다른 국적, 그리고 특정 사회 계층이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르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단지 아프리카 사람이나 아시아 사람만을 백인과 구별한 것이 아니라, 같은 백인 안에서도 스코틀랜드 사람, 스웨덴 사람, 그리스 사람, 폴란드 사람 등을 날 때부터 다른 특질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각 사회의 하층민이 사회적 계층의 하단부를 유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의 타고난 지적, 정신적 능력이 열등하기 때문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역사를 볼 때 불평등은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이며 힘이 있는 자들은 언제나 그 힘을 남용해 왔습니다. 어떤 나라들은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고, 부유한 이들은 정치를 독점했으며,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공평한 대접을 받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서구의 인종주의는 사회적 엘리트와 강대국에게 새로운 위험한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는 이, 약자를 처벌하는 이, 일반인을 학살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이론을 찾은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폭력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이것이 ‘자연의 법칙’을, 그리고 도덕을 알지 못하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를 반영한다고 말함으로써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인종주의는 과학적 확실성이라는 압도적 권위를 동반했기에 지식인들 역시 이를 인정했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사람들에게 모든 인간은 태어난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원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없는 유전자의 포로라는 생각을 심었습니다. 어떠한 교육이나 정치적 압력도 민족이나 국민성을 바꿀 수 없으며, 한 집단의 특정 행동이 해로운 것이라면 그 집단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이 근대 인종주의의 지적 근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중 특히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이 영향을 끼친 ‘과학적’ 근거에 주목합니다. 인종주의에 대한 다윈의 영향을 강조하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다윈주의자들의 인종주의는 히틀러와 다른 홀로코스트의 주도자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다윈은 후에 인종주의에 과학적 후광을 씌운 저명한 생물학자와 인류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윈주의는 전세계 어디보다도 독일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일차대전 이전 독일이 생물학 연구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며 또 독일인들의 특별히 낮았던 문맹률도 관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윈주의자 인종주의는 여러 인종주의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이는 다윈의 이론이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고 쉽게 설명이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윈의 이론이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자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은 그 이론 속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교훈을 찾았고, 또 자신의 원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 역시 찾으려 했습니다. 소위 사회진화론은 여러 다양한 정치적 흐름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그 중 우익 사회진화론자들은 인종주의를 설파했고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을 정당화했으며 전쟁을 옹호했습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지지자들이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려 한 데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찰스 로버트 다윈

우익 사회진화론자는 유럽과 북미의 지도층들, 특히 독일의 호전적이고 반민주적인 엘리트들에게 여러 편리하고 매력적인 개념들을 제공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마 ‘투쟁(struggle)’이었을 겁니다. 이 단어는 모든 인간의 관계, 그리고 국가의 관계가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전투임을 암시합니다. 다윈이 발견한 자연의 법칙은 필연적으로 투쟁이라는 개념을 동반하며, 여기에 어떤 도덕적 의미도 가미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너의 적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동물의 왕국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그저 특별히 영리한 동물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런 투쟁이라는 개념 위에서 극한 사회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바꾸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자는 부자보다 그저 덜 적응했기에 가난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자에게 베푸는 자선은 사회적 부적응자를 사회속에서 계속 생존시킴으로써 사회의 유전자 풀을 낮은 지능과 정신으로 더럽히는 것이었고, 곧 인류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였습니다. 또 영원한 투쟁이라는 개념은 국가간의 반목을 정당화하고 전쟁을 미화했습니다.

‘우수한’ 민족은 ‘열등한’ 민족을 정복, 이용하고 심지어 학살할 권리까지 부여 받았습니다. 우수한 민족이 더 공격적으로 행동할수록 인류는 장기적으로 더 개선될 것이며 따라서 열등한 민족의 절멸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축하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국가 관계에서 힘은 곧 정의였습니다. 승자는 바로 승리를 통해 자신의 민족이 더 생존에 적합한 민족임을, 따라서 승리할 자격이 있음을 보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인종주의를 조장한 사회진화론이 가장 위험했던 것은 이들이 자신들은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다윈의 저작 일부에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작가와 정치가들이 인종이나 국가가 초기 인류로부터 각각의 속도로 진화했으며 따라서 진화속도 역시 각각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모든 유럽과 북미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백인을 그 진화 사다리의 최상층에 두었고, 아프리카인들을 가장 아래에 두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의 인종주의자 만화가들은 종종 흑인들을 유인원과 비슷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대중 과학 저술가들과 많은 생물학자, 인류학자들이 모든 민족과 국가에 따라 진화의 정도를 세심하게 나누었습니다. 백인들은 언제나 가장 위에 있었고, 백인 안에서도 수많은 단계를 두었습니다. 미국의 엘리트들 역시 미국으로 온 이민자 중 영국인, 독일인, 스칸디나비아인 등의 서구와 북구 유럽인을 조상으로 둔 이들이 가장 높은 지능과 직업윤리, 그리고 최고의 정신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폴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러시아 유대인 등의 남유럽과 동유럽의 이민자들은 열등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국가의 ‘인종 상태(racial health)’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가상의 위협에 놀란 미국 의회는 1924년 발의한 이민법에서 이런 유럽의 ‘나쁜(wrong)’ 지역 출신의 이민자 수를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이 법의 초안에는 중국과 일본 등의 백인이 아닌 이들의 이민은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인종주의적 사고는 1930년대 독일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바꾸었고, 곧 이어 외교 정책 역시 운명적인 길로 인도합니다. 1차대전과의 결과인 평화조약은 독일인들의 반 슬라브 인종주의를 강화했고 사회진화론자들의 전쟁찬양은 이미 독일 정치지형에서 우익의 핵심주장이 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에 의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러시아와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 적대감을 강화시켰습니다.

1차대전에 승리한 연합군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면서 독일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동부 독일의 넓은 지역을 폴란드에 복속시킨 것도 문제였습니다. 어떤 독일 정부도 그들이 영토를 잃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는 우익 정치인들이 폴란드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참전용사 모임인 강철헬멧(Steel Helmet)은 공개적으로 폴란드와의 전쟁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모호한 주장인 독일민족의 늘어난 인구는 더 넓은 ‘삶의 공간(living space)’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습니다.

1931년 민족주의자들의 회합에서 그들의 지도자 알프레드 후겐버그는 독일 민족은 ‘위선적 평화주의(hypocritical pacifism)’가 아닌 ‘적극적 자립(energetic self-help)’에 의해서만 자유와 공간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후겐버그는 독일도 아프리카의 식민지가 필요하며, 또한 새로운 땅을 위해 동쪽으로 ‘활발한 레이스를 과거의 독일의 경계를 넘어선, 오직 독일에 의해서만 가능한 새로운 동쪽 땅의 재구성을 통해 펼칠 것을 주장했습니다. ‘적극적 자립’이란 다름 아닌 다윈주의로 미화된 전쟁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My struggle, Mein Kampf)』에 이런 급진적 생각들에 자신의 생각을 더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적 넌센스’라고 이름 붙인 평화주의에 대한 긴 반박 끝에 그는 국제 관계에 대한 자신의 진화론적 관점을 설명합니다.

“누구든 살고자 하는 이는 싸워야 하며, 이 영원한 투쟁의 세계 속에서 싸움을 거부하는 이는 살아갈 자격이 없다.”

그에게 전쟁에 대한 반대는 ‘경쟁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류의 진보를 위한 선결조건’인 ‘가장 우수한 민족의 승리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독일은 독일인에게 너무 좁았습니다. 독일은 다른 민족의 종 노릇을 하느라 지구에서 소멸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독일은 세계를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다면 사라질 것이다.”고 그는 썼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더 넓은 땅에 대한 욕망, 러시아인과 유대인의 열등함에 대한 확신을 자신의 외교정책에 반영했습니다. 러시아는 멸망 직전이었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땅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열등한 러시아는 오직 독일 지배층의 지도를 통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공산주의자 – 히틀러는 사실 유대인이 공산주의를 만들었으며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같이 취급했습니다 – 에 의해 독일적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주인을 죽이는 미생물로, 곧 ‘영원한 기생충, 흡혈동물, 가장 널리 퍼진 세균’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를 지배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유대인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안정적인 정부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독일이 쉽게 소련(Soviet Union)을 정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히틀러의 마음속에서 독일이 소련을 정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땅과 자원이 독일을 위대한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조종하는 공산주의를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세계 정복 계획은 본능적이며” 따라서 이 위험은 항상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또 “유대인은 다른 국가에 침투해 그들을 속에서부터 썩게 만드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은 거짓말, 중상, 오염, 분열을 이용해 자신의 적이 피의 절멸을 겪게 만든다.”고 썼습니다. 유대인이 수세기에 걸쳐 다른 민족들에게 몰래 해를 끼침으로써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에게 러시아 공산혁명은 그런 노력의 한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히틀러는 최대 2,500만 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소련에 대한 집단학살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완전한 절멸 역시 지시했습니다. 독일 군대는 그의 지시를 능동적으로 따랐습니다.




비록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이론을 완전히 받아들인 장교들의 수는 거의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수가 비유대주의와 슬라브족에 대한 인종주의, 그리고 반공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1941년 소련침공과 수백만 명의 포로학살 및 무자비한 약탈을 반대한 장교는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해 3월 침략군의 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모든 병력은 이 투쟁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것이며, 따라서 잔인함(harshness)이 반드시 동반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5월, 탱크 부대를 이끄는 에리히 회프너는 자신의 부대에 전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러시아와의 이 전쟁은 실로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전쟁이다. 독일과 슬라브족의 오랜 투쟁의 연속이며 유럽 문명을 모스크바-아시아 문명과 유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그는 ‘적을 완벽하고 무자비하게 전멸시키겠다는 강철의 의지’를 통해 ‘전대미문의 무자비함’을 보여야 한다고 말을 이었습니다.

6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고 ‘유대-공산주의 음모론’을 격파하는 동안 ‘병영 편지(Bulletin fo rthe Troops)’는 이들이 사용할 잔인한 방법들을 정당화했습니다. 한 기사는 소련군의 공산당 장교들 중 유대인 비율이 매우 높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자는 유대인을 동물적이라고 묘사하며 “이것은 동물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옥을 현실화한 인간이며 모든 고상한 인간성에 대한 광신적 증오를 인격화한 것이다. 이는 고상한 혈통에 대한 아-인간(sub-human)의 반란이다.”라고 서술했습니다.

히틀러가 소련의 유대인만이 아니라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학살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독일 시민 엘리트들이 독일군을 도와 자신의 계획을 수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수만 명의 공무원, 전문가, 기업가 그리고 몇몇 학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 중 다수는 나치가 아니었지만 학살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 아니 참아낼 수 있을 정도만큼의 인종주의, 반 유대주의, 그리고 광신적 반공주의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의 참여를 쉽게 만들어 준 것은 그들이 실제 살인에 손을 더럽힐 것을 요구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책상뒤에 숨어서’ 학살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들은 폴란드와 소련으로 보내져 그들의 시야 바깥에서 죽어갔고,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5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나치와 독일 지배층에 속하지 않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총살부대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가까이에서 피범벅이 된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독일의 관료들과 다르게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양심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부인과 아이를 가진 남자였습니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믿는 이들이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무방비의 시민을 학살할 것을 요구 받았을 때,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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