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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특별법' 탄생시킨 김보은 김진관 사건

  • 입력 2015.01.19 13:31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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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아담한 도시 충청북도 충주. 1992년 신년 벽두, 이곳에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공개됐다. 무용학도였던 김보은과 그 애인 김진관이 살인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피해자는 김보은의 아버지로, 정확히 말하면 ‘존속’ 살인이었다. 또 한 번 정확히 말하면 김보은이 일곱 살 때 김보은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만난 의붓 아버지였다.

두 젊은이는 보은의 의붓아버지를 죽인 뒤 강도 살인으로 위장했다. 그런데 수사에 나선 경찰이 보기에 좀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피해자의 방에 이불이 하나였고, 그 방에서 딸과 아버지가 함께 잠을 자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뭔가 있다 싶었던 경찰은 딸에게 넌지시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고 넘겨 짚어 보았다. 그러자 딸은 울부짖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범행 사실을 털어놓았고 결국 김보은 김진관 둘은 1992년 1월 19일 구속된다.


c MBC


김보은 김진관은 존속살인을 계획하고 공모한 존속살인범으로 기소된다. 그러나 그 내막은 녹녹하지 않았다. 김보은은 어렸을 때부터 계부에 의해 성폭행을 당해 왔던 것이다. 충주지검 검찰청 직원이던 계부는 그 알량한 권력을 빌미로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면 죽는다고 세뇌하면서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던 그 시간 내내 김보은을 유린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김보은은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친구를 사귀어 봐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장동건이 오고 이병헌이 나선들 그가 남자로 보였겠는가. 그 아픔을 이해해 줄 사람이 흔했겠는가. 하지만 그녀에게도 꿈같은 사랑이 찾아왔다. 그게 김진관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감당할 수 없던 김보은은 김진관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며 헤어지자고 한다. 그때 김진관의 심경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느냐마는, 따지고 보면 어렵지도 않다. 정상적인 남자가 이 사실을 들었다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테니까. 아무 느낌 없다면 그건 내시이거나 사이코패스일 테니까. 하지만 피가 거꾸로 솟은 뒤 제자리로 복귀한 뒤의 입장은 또 달라진다. 과연 그녀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김진관도 김보은을 떠나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김진관은 김보은과 함께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를 찾는다. 제발 보은이를 놓아 달라고. 하지만 이 우라질 검찰청 직원은 수갑을 휘두르며 두 사람을 위협했고, 김보은에게 “이년이 바람이 났다... 가족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등의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법에 호소하려고 해 봐도 검찰청 직원이라는 권력은 한없이 높아 보였고, 도망이라도 쳤을 때 찾아올 더 큰 보복의 우려는 먹구름처럼 뇌리를 뒤덮었다.

여기서 김진관은 물러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운 나쁘게 기구한 사연의 여친을 만난 걸로 치부하고 "우리는 여기까진가 보다. 널 위해 기도할게.“ 정도로 자기 갈 길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진관은 그걸 거부했다. 후일 재판정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어머니 다음으로 사랑하는 보은이가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알고도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느낄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나는 보은이의 의붓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보은이를 살린 겁니다.”

김보은은 이렇게 얘기한다.

“구속된 후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20년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더 이상 밤새도록 짐승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때문에 진관이가... 제가 벌을 받을 테니 진관이를 선처해 주세요.”

이 사건 앞에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충주로 달려왔다. 대부분 젊은 여대생들이었다. “왜 진작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 따위의 사치스런 질문의 무의미함을 아는 사람들, “그래도 살인은 잘못이다.”는 고담준론에 “이건 정당방위다!”라고 항변하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충주지법 앞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학생들로 메워졌다. 여학생들은 꽃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불운한 살인자가 된 둘에게 전해 주려던 꽃이었다.

재판 후 김보은과 김진관을 태운 버스는 출발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차를 둘러싸 버린 것이다. 학생들은 버스에 기대어 울면서 이름을 불렀다. 보은아, 진관아. 닭장차 틈 사이로 꽃을 디밀어 봤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위협적인 시동 소리는 학생들의 귀를 때렸다.




그래도 미동도 않고 버틴 학생들과 당국간에 협상이 이루어져 창살 너머로나마 둘의 얼굴을 보게 해 준 뒤 농성을 풀기로 했다. 그때 한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사실 이 노래는 일종의 노동 가요로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노래이거나 당일의 분위기에 썩 어울리는 노래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데 군데 박힌 가사 조각 조각이 부르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어두웠던 밤 지나 새벽이 얼어붙은 땅 녹아 새싹이 케케묵은 낡은 틀 싹둑 잘라버리고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고귀한 모성보호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 해…”

그리고 그 다음 대목에서 노래는 발악적인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버스가 떠나는 와중에도 여학생들은 버스를 따라가며 노래를 부르고 둘의 이름을 불렀다. 그 노래 가사 중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사랑도 행복도 다 빼앗겨 버리고...”

과연 김보은의 짧은 생에 사랑과 행복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김보은은 2심에서 유례없는 집행 유예로 풀려났고, 김진관도 감형 끝에 이미 오래 전 자유의 몸이 됐다.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지만, 과거의 상처를 딛고 행복한 인생을 꾸려 가기를 바랄 뿐이다. 둘에게는 돌아보기조차 힘겨울 일이지만, 둘로 말미암아 알려진 사건의 내막, 그리고 그 두 이름을 부르며 버스에 매달리던 사람들의 노력은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는 데에 큰 동력이 된다.

2012년, 친딸을 18년 동안 성폭행해 온 고교 교사에 대한 선고가 이뤄졌다. 이 아버지라는 인간은 “딸이 외박한 후 그를 무마하기 위해 자신을 유혹했다.”고 주장했으며, 그 딸은 아버지의 처벌을 불원한다는 탄원을 재판부에 냈다.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했고 처벌을 원치 않으므로...” 하는 판에 박힌 판결문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재판부는 단호하게 중형(그래봐야 8년이지만)을 선고한다. 이유는 “아버지에게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는 ‘학대순응증후군’으로 인한 ‘심리적 항거 불능상태’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망할 놈의 아버지는 성폭력 특별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1992년 1월 19일 구속되었던 두 젊은이의 사연이 일종의 산파 노릇을 했던 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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