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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월 2일 사보이호텔 피습 사건

  • 입력 2016.09.02 14:53
  • 수정 2016.12.03 17:08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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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 지하 세계는 있습니다. 제18대 대통령 당선인께서 대선 토론회에서 ‘지하 경제의 활성화’를 주창하셔서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한 기억이 새롭지만, 꼭 그 분의 표현을 들지 않더라도 공식적인 세상과는 또 다른, 으슥한 뒷골목의 문화와 음습한 지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법이죠. 그 지하 세계를 대표하는 단어 중 하나가 ‘깡패’ 되겠습니다. 자기들끼리는 건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간혹은 협객이라는 희한한 단어도 사용하는 모양입니다만 뛰어봐야 벼룩이고 기어봐야 바퀴벌레, 깡패는 깡패입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결국 깡패입니다. 협객은 얼어 죽을. 일본 깡패들과 각을 세웠다 뿐이지 종로 상인들에게 삥 뜯으면서 거드름 피우고 살던 깡패고 자기 말마따나 노동자들 파업하는 데 들어가서 생사람을 불태워 죽인 살인자죠.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던 와중에 종로구청이 글쎄 왕년의 ‘야인’들에게 감사장을 주겠다면서 불러모은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종로라서 종로상권에 도움을 주었다나요.

그 자리에는 김두한의 친구였던 김동회 씨도 등장하셨고, 일제 시대 100대 1로 싸워 이겼다는 전설의 사나이 ‘당개’ 윤봉선씨도 있었습니다. 생존해 계시더군요. 그런데 왕년의 명동 신상사 신상현의 이름에서 저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신상현 씨가 우스워서가 아니라 그 다음 세대의 ‘야인’들이 바로 조양은이고 김태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20년 후면 조양은 김태촌도 ‘협객’으로 떠받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쓴웃음이 났던 거죠.


영화 <보스>의 한 장면


깡패들 얘기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김두한과 시라소니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들에 비해서는 좀 덜 유명하지만 만만찮은 주먹으로 이화룡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얼마나 빠른지) 박치기당하는 모습은 안 보이는데 쓰러지는 건 보인다.”는 전설을 낳았던 평양 박치기의 대가지요. 이 사람은 동대문의 정치 깡패 이정재와 맞서서 명동을 근거지로 활동했는데 그 행동대장이 앞서 말하는 신상현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기에 신상사로 불리며 서울의 주먹 대장으로 군림했지요. 이 신상사파의 아성에 깊은 금을 긋고 나아가 우리나라 지하 주먹 세계의 판도가 바뀌는 사건이 1975년 1월 2일 신년 벽두에 일어납니다. 명동 사보이호텔 피습사건이죠.

왜 이 사건이 그렇게 터닝 포인트인가 하면 서울의 지하 세계를 호남의 주먹들이 장악하기 시작한 시점이면서 그나마 깡패 세계에 남아 있던 낭만, 즉 칼 휘두르는 놈을 경멸하고 무기 들면 양아치라고 생각하던 문화의 종식을 가져온 사건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호남 주먹이 연합해서 신상사를 친 건 아닙니다. 호남 주먹은 오종철이라는 이와 박종석이라는 사람의 세력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는데 신상사를 친 건 오종철의 꼬붕이었던 조양은이었죠. 이들은 야구배트와 회칼을 휘두르면서 대명천지에 명동 사보이 호텔을 기습합니다. 신상사파는 이 일로 큰 타격을 입고 서서히 퇴장하죠. 그런데 또 신상사파와 가까웠던 호남 깡패들이 또 한 명의 슈퍼 스타(?)를 서울 무대에 데뷔시킵니다. 바로 그게 김태촌입니다.




조양은의 자서전 『어둠 속에 솟구치는 불꽃』(아아 이 솟구치는 촌스러움)에 따르면 둘은 피비린내 나는 ‘3년 전쟁’을 치릅니다. 김태촌은 계속해서 조양은을 노렸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조양은의 형님 격이었던 오종철을 공격해 아킬레스건을 잘라 버리죠. 조양은도 그에 상응한 보복을 하고요. 그런데 이 전쟁을 치르면서 이 두 깡패는 자연스럽게 서울 암흑가의 양대 산맥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뒷얘기는 대충 아실 겁니다. 둘 다 제 버릇 개 못 주는 깡패가 되어 조양은은 교도소를 전전하고 김태촌은 지병으로 삶을 마감했죠.

정초부터 웬 깡패 얘기냐 싶기도 하지만, 저는 그들의 역사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역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두한이 종로통 깡패를 넘어서서 용산 기관사들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정치 깡패였음은 본인이 자랑스레 회고한 바와 같고 (심지어 이승만에게 사람 좀 그만 죽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앞서 말한 이화룡은 서북청년단 감찰부장이었으며 김태촌은 1976년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벌어진 각목 사태의 주역이었습니다. 오래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아들을 때린 술집 종업원에게 복수(?)할 때 그 옆을 수행했던 이가 김태촌의 옛 부하였지요. 그리고 요즘 조폭들이 즐겨 하는 사업 가운데 하나가 ‘용역’ 사업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면 떨떠름의 도가 커집니다. 결국 그들은 항상 더 큰 이권의 빛을 향한 주광성 기생충이었으며, 주먹보다 더 센 권력들은 그들을 즐겨 이용하며 공고한 아성을 지키고 그에 도전하는 이들을 짓밟아 왔던 겁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한 장면


서글픈 일면도 있습니다. 김태촌은 불량 청소년 시절 행상을 하는 어머니가 깡패들에게 붙잡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유리창을 다 깨 버립니다. 하느님 따위 없어! 착하게 살면 뭐할 것이여? 이거겠죠. 그리고 그는 본격적으로 깡패의 길에 접어듭니다. 아마 1975년 1월 2일 목숨 걸고 방망이 들고 회칼 휘두르며 사보이 호텔로 뛰어들던 젊은이들 역시 그런 상처를 갖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겠죠.

또 하나 더. 1975년 1월 2일의 사보이 호텔 피습 사건 이후 서진룸살롱 사건에 이르기까지 호남 깡패들이 서울에 진출하여 판을 치는 통에 조폭 = 전라도의 인식이 팽배해졌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진짜 ‘대부’는 부산의 칠성파 두목 이강환이었고 제아무리 전국구 조폭이니 서울의 맹주니 해도 부산 칠성파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했으며 언감생심 부산 진출 또한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호남 주먹들이 고향을 떠났던 것은 고향에서는 뜯어먹을 것이 적었기 때문이었지요. 부산의 칠성파는 당연히 그럴 이유가 없었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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