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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왜 죽었는지라도 알 수 있다면..."

  • 입력 2017.04.18 18:30
  • 수정 2017.04.20 11:30
  • 기자명 팟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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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한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2012년 11월 8일 오전 6시 55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희 부모님이시죠?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따님이 죽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전화를 이어받은 아버지 역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건강하다던 아이였다. 발신자는 충주 성심맹아원. 6개월 만에 미숙아로 세상에 나와 시각장애 1급, 뇌병변 4급의 중복 장애를 가진 주희가 1년째 기숙 생활을 하던 시각장애전문학교였다.

성심맹아원 측 담당자는 주희가 ‘잠든 상태에서 편안하게 죽었다’며 부모를 위로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아이 시신엔 온갖 멍 자국과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져나간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부모는 항의했다. 경찰과 검찰을 오가며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거리에 나가 시위를 벌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10만 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오래지 않은 시간에 진실이 밝혀질 거라 생각했다.

2017년 4월 6일,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고 김주희 양의 아버지 김종필 씨.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주희 부모는 여전히 거리에 나가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가 왜 죽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피의자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은 아이는 있는데, 죽게 만든 사람은 없다.

이 인터뷰는 지난 5년의 기록이다.

인터뷰 : 유정아, 정효서 / 편집 : 임영민

“아버님, 따님이 죽었습니다.”

Q.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설명 부탁 드린다.

아버지(김종필) : 2012년 11월 8일 오전 6시 55분경이었다. 충주 성심맹아원 보건 담당 교사한테서 연락이 왔다. 우리 딸 주희가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잠든 상태에서 편안하게 죽었다고. 처음 전화를 받은 건 아내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실신해 버렸다. 내가 전화를 이어받아 물었다. 24시간 관리하는 곳인데, 어쩌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하루 전만 해도 멀쩡하다던 애가 죽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더라.

곧장 아내와 함께 아이가 안치돼 있다는 충주 건대병원으로 이동했다. 가기 전 장례식장에 먼저 연락을 했다. 어찌됐든 아이를 안전하게 수습해야 하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다. 사망진단서를 떼어 오라고 하더라.

이것저것 준비하고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쯤이었다. 아이가 사망한 지 12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병원엔 이미 학교와 기숙사 관계자분들이 많이 도착해 있었다. 가서 다시 한 번 어찌된 일이냐 물으니 별 말은 않고 자다가 편하게 죽었다고만 답했다. 경찰에 신고는 했는지도 물었는데, 안 했다고 했다. 12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 신고도 안 했다니, 깜짝 놀랐다. 어찌됐든 관계자분들에게 고생하셨다고, 이제 우리가 마저 수습해서 가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때까진 정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장례식장에 제출할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러 원무과에 갔는데 원무과에서 황당한 소리를 했다. 사망진단서는 안 되고 검안서가 발급된다는 거다. 그러면서 검안서를 받고 싶으면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니 떼어 오라고 했다.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일단 시키는 대로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관계자들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우리랑 의논을 좀 하고 진행하자는 식으로. 왜 이러나 싶었다.

어찌어찌 말 거는 관계자들을 만류하고, 가족관계증명서 떼다가 원무과에 제출했다. 검안서가 나오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보다 훨씬 많은 관계자들이 다가와서 나한테 말을 걸어댔다.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죄송하다는 사람도 있고,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충주 성심맹아원 전경 ⓒ성심맹아원 홈페이지

Q. 별 말도 안 했는데 울면서 죄송하다고 한 건가?

아버지 : 그랬다. 정말 이상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나한테 관할 경찰서 직원이라며 말을 걸었다. 다짜고짜 명함을 건네며 응급실 구석 통로로 가서 자기랑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 그렇잖아도 이 상황이 이해 가질 않아 당황스러워 죽겠는데, 경찰서 직원이란 사람까지 이러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그럴 필요가 있냐며, 신고 받고 출동하신 거죠? 하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하더라. 너무 놀라서 그럼 어떻게 알고 오셨냐, 하니 답을 피하더라.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바로 원무과로 가서 검안서를 확인했다. 그걸 보니 입이 안 다물어졌다. 온 몸에 상처가 굉장히 많다고 기재돼 있었다. 어떻게 ‘자다가 편안하게 죽은’ 아이 몸이 상처투성이이겠나. 다 거짓말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경찰에 신고했냐고 물으니 아직도 안 했다고 하더라. 병원 관계자가 가족이 온 다음에 신고해도 안 늦는다고 해서 안 했다고.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갔다. 죽은 아이 몸에 작은 상처라도 있으면 담당 의사나 병원 관계자가 반드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지 않나.

장례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성심맹아원 측 관계자 모두가 날 따라왔다. 도착해서 왜 신고를 안 했냐고 따져 물으니 벌떡 일어나선 죄송하다면서 그제야 경찰에 신고를 하더라. 어이가 없었다.

한두 시간 정도 지나자 과학수사대가 도착해 곧장 영안실로 들어갔다. 형사들도 여럿이 왔다. 그 중 하나가 날 보더니 사체 확인하겠냐고 묻더라. 당연히 해야죠, 하고 따라 내려갔다. 가 보니 먼저 내려간 형사 대여섯 명이 우리 아이를 쇠 침대에 눕혀 놓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들어가려고 하니 한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형사가 나를 보곤 ‘저건 뭐야?’라고 하더라.

Q. 형사가 아버님에게?

아버지 : 그랬다. 그래서 나를 데려와 준 형사가 ‘주희 아버님입니다’라고 하니까 바로 하는 말이 ‘빨리 끌어내!’였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장정들 여럿이 날 힘으로 제압해 끌어내는데 그대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서울경찰청에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 담당자가 더욱 황당해 하면서 ‘시신을 확인하는 것도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건데 부모가 시신을 못 보게 막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더라. 설움이 북받치면서 한편으로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통화를 하는 중인데 무슨 일이 났는지 장례식장에 있던 경찰들이 우르르 어딘가로 뛰어 올라가더라. 이때다 싶어 장례식장 직원에게 부탁을 했다. 제발 우리 아이 시신 좀 보게 해 달라고. 그랬더니 직원이 ‘경찰이 아버님 여기 들어온 거 알면 큰일난다’면서 빨리 나가라고 하더라. 통 사정을 했다. 제발 부탁 좀 드린다고. 내가 아버지인데 왜 내 자식 시신을 못 보냐면서. 직원이 심각하게 고민하다 ‘그럼 경찰들 오기 전에 빨리 보세요’라며 날 들여보내줬다. 그분이 사진도 찍으라고 시신을 잡아줬다. 상처 위치도 가르쳐 주고. 그렇게 겨우 우리 아이 사진을 찍었다.

Q. 아이 시신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겠다.

아버지 :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진을 찍고 나왔는데 보니까 형사들이 전부 현장검증을 하러 갔다고 하더라. 부리나케 바로 따라갔다. 가 보니 말이 안 나왔다. 폴리스라인도 전혀 안 잡혀 있고, 집기류 같은 건 벌써 깨끗하게 다 정리가 돼 있더라. 국과수 직원들이 의문을 품을 만한데, 그냥 교사들이 말해 주는 대로 다 받아들이더라. 이 자리에서 죽었다, 어떻게 죽어 있었다, 의자는 여기에 있었다 등. 그때 교사가 그렇게 말하더라. ‘주희가 의자 위에 무릎 꿇은 채 있었는데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의자 팔걸이와 등받이에 목이 끼어서 죽었다’고. 자다가 편안하게 죽었다는 건 거짓말이었던 거다.

주희가 성심맹아원에서 사용하던 의자. 사건 최초 목격자인 담당 교사는 주희가 해당 의자의 팔걸이와 등받이 사이에 목이 끼어 죽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어머니(김정숙) : 나는 아이 시신을 한 번도 못 봤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맹아원 원장과 관계자들한테 둘러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현장검증도 애 아빠 혼자 가서 봤다.

아버지 : 뭔가 퍼즐이 이미 맞춰져 있는 것처럼 일이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찰 진술 내용에 따르면 그 교사는 자기가 새벽에 주희를 의자 위에 무릎 꿇려 놓고 음악을 틀어준 채 다른 방에 가서 잠을 잤다고 했다. 알람시계를 5시 55분에 맞춰놓고. 말로는 깜박 졸았다고 했다. 그런데 깜박 존다는 것은 5분이나 10분이지 않나. 알람시계까지 맞춰놓고 4시간 넘게 잠을 잔 건데 그게 어떻게 졸은 것이 되나. 무튼 그렇게 5시 55분에 울린 알람에 깜짝 놀라 일어나 가 보니 주희가 의자 팔걸이와 등받이에 목이 끼인 채로 실신해 있었다고 한다.

이것도 명백히 거짓말인 것이, 당시 현장에 출동한 119 구급대원의 이야기를 다 녹취해 놨다. 구급대원 역시 성심맹아원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아이가 실신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의자 어디에 끼어 있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이불 위에 외출복까지 다 입혀져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양말까지.

일단 심폐소생술을 하기 위해 옷을 다 자르고 보니 목과 우측 경부에 압박흔이 보였다고 했다. 아이 몸에 청색증 같은 게 보이기도 했고. 본인들도 이상한 걸 느꼈다고 말했다. 혹시나 싶어 양말을 벗겨 보니 시반이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고 했다.

Q. 시반?

아버지 : 그게 사망한 지 오래됐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나도 몰랐다. 내가 되물으니 설명을 해 주더라. 위에서 아래로 피가 쏠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게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사망한 지 3시간 내지 4시간은 지나야 생긴다고. 청색증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건 완전 거짓말인 거다. 구급대원 출동기록을 보면 신고한 지 10분에서 20분 뒤에 도착한 걸로 나와 있다. 실제로 그랬고. 그 사이에 실신해 있던 아이가 죽어서 시반이 생기고 청색증이 생긴다? 말이 안 되지 않나.

어머니 : 안면 울혈도 있었다고 했다. 처음 구조 요청 받았을 때 분명히 본인들이 ‘아이가 실신해 있다’면서 자기네들이 ‘심폐소생술 하고 있다’고 했다더라. 의자 팔걸이랑 등받이에 목이 낀 채로 발견됐다면서. 빨리 오라고.

출동한 구급대원들도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나. 그 새벽이면 잘 시간인데, 실신했다는 아이가 깨끗한 이불 위에 외출복에 양말까지 신겨져 있으니. 조금 뭔가 정리 안 된 듯한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어서 의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급대원이 말하길, 본인이 구급대원 생활한 지 오래됐는데 아이를 처음 딱 보자마자 ‘이미 사망한 지 오래됐구나’를 느꼈다고 한다.

최초 출동한 구급대원과의 녹취록.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이미 죽은 지 오래됐다는 걸 직감했다고 증언했다.

퍼즐은 이미 맞춰져 있었다

Q. 경찰은 뭐라고 하던가?

아버지 : 우여곡절이 많다. 담당 형사도 너무 자주 바뀌었다. 형사 몇 과에서 몇 과로 바뀌고, 형사팀에서 강력팀으로 바뀌고, 강력1팀에서 또 강력2팀으로 바뀌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강력1팀으로 바뀌었을 때 그쪽 팀장이 우리한테 그런 소릴 했다. 우리 아이가 약을 하도 많이 먹어서 약물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아직 국과수에서 결과도 안 나왔는데 그런 소리를 했다.

Q. 약물사라니, 무슨 뜻인가?

아버지 : 아이가 간질약을 먹어 왔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다급한 마음에 서울 아산병원에 있는 우리 아이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의견서를 써 주셨다. 주희 같은 경우는 약을 먹고 죽을 수 있는 케이스가 아니고, 만약 간질환자가 약을 먹고 사망했다 하더라도 온몸에 그런 상처가 있는 게 설명이 안 되고, 이런 경우엔 광범위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의견서를 바로 제출했다. 관련 내용의 진정서를 12개 기관에다 내기도 했고. 그렇게 했더니 바로 그 이야기가 싹 없어지더라.

Q. 반박 의견서를 제출하니 바로 잠잠해졌단 것인가?

아버지 : 그렇다. 그 뒤론 그 얘기가 안 나온다. 개인이 큰 조직, 단체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더라. 한 번은 강력1팀의 형사가 우리한테 너무 막말을 해서 충북 경찰청에 진정을 넣은 일이 있다. 피해자 부모로서 우리 사건에 대해 불합리한 부분을 조목조목 따지면, 욕을 하는 등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진정을 넣으니 5개월 뒤에 꼴랑 공문 하나 보내 왔다. 그 형사가 수사를 잘못한 건 아니고 언행에 대해선 문제가 있는 것이니 교양교육 4시간을 시켰다고. 그게 전부였다.

정말 너무 억울했다. 내 자식 왜 죽었는지 그거 밝혀보겠다는 건데 피해자 부모가 형사한테 욕을 들을 이유가 뭐가 있나. 도저히 안 되겠어서 기피신청을 넣기 위해 충주 경찰서로 찾아갔다. 아예 수사 팀을 바꿔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담당자가 여기는 교통사고 같은 단순 사고나 접수하는 곳이라며 다른 데로 가라더라. 뭔가 이상했다. 접수처가 그곳이란 걸 이미 충분히 알아보고 간 터인데. 그럼에도 우리가 뭐 어쩔 수 있겠나. 그곳에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내가 그럼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하고 물으니 충북 지방경찰청으로 가라 했다. 알겠다고 하고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 : 거기까지가 1시간 40분 거리였다. 충주 경찰서에서 충북 경찰청까지.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다.

아버지 : 그런데 도착해서 충북 경찰청 담당자에게 ‘충주 경찰서에서 보냈다’고 하니 막 화를 냈다. 누가 여기로 보냈느냐면서, 그거 충주 경찰서에서 할 일인데, 그걸 그 사람들이 모르지 않을 텐데, 여기까지 사람 헛걸음하게 했다면서 막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서 담당자 이름을 가르쳐 달라 했다. 말해 주니 바로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말 고마울 정도로 따져줬다. 말이 되느냐, 이분들 여기로 보낸 이유가 무엇이냐, 하시면서. 근데 갑자기 그분이 급 공손해졌다. 전화 받은 사람이 바뀌었는지 네네, 알겠습니다, 그리로 다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투가 확 바뀌더라.

그렇게 통화를 마치더니 우리에게 다시 충주 경찰서로 가라고, 그쪽 팀장님이 잘 처리해 줄 거라고 일러줬다. 별 수 있나. 다시 충주 경찰서로 향했다.

도착하니 그 팀장이란 사람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이 잘못 가르쳐 준 거 죄송하다면서 이해해 달라고 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여기서 싸우면 나만 손해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찮다고 답했다. 어쨌든 우리는 기피신청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근데 그 팀장이 뜬금 없이 기피신청을 꼭 해야겠냐고 묻는 거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답하니 황당하게도 우리한테 막말을 했던, 그래서 우리가 기피신청을 했던 그 형사를 불러오더라.

Q. 그 사람 때문에 기피신청 하려던 건데?

아버지 : 굉장히 황당했다. 오더니 옆에 팀장이 그 형사한테 사과하라고 하니까, 그 형사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내가 법령을 몰라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그러더라. 정말 너무 화가 났는데, 이게 싸운다고 될 일이 아니니 일단 참았다. 꾹 참고 기피신청 좀 해 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나니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연락이 왔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근데 보니까 강력1팀에서 강력2팀으로 옮겨졌다는 거다. 정말 한숨밖에 안 나왔다. 바로 옆 팀이다. 강력2팀에 대해 내가 안 좋은 기억을 하나 갖고 있었다. 강력1팀 형사가 나한테 폭언을 할 때 강력2팀 형사들이 우리를 보고 웃던 걸 내가 똑똑히 봤다. 당시 열불이 나서 내가 당신 같은 사람한테 진술 못 하겠다고 벌떡 일어난 적이 있는데 그때 강력2팀이 웃고 있던 걸 내가 봤다.

근데 그런 강력2팀으로 배정이 됐다는 거다. 기피신청을 안 하느니만 못 한 상황이었다.

Q. 같은 사무실, 바로 옆자리에 있는 팀으로 옮겨진 건가.

어머니 : 말 그대로 바로 옆이다. 칸막이도 없다. 그냥 사건 관련 서류만 옆으로 옮긴 거밖에 안 된다.

아버지 : 정말 개인으로 단체에 맞선다는 게 너무 어렵더라. 어떻게 사람이 이러나 싶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어린 학생이 배움의 터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면 형사들이 빨리 현장을 보존하고 관계자들을 신속하게 수사해야 하는데..

Q. 피의자들은 경찰에 소환 조사 받지 않았나?

어머니 : 받았다. 경찰서에서 진술하다 만난 적도 있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Q. 충격?

어머니 : 그때 성심맹아원 원장이 들어오니까 형사들이 벌떡 일어나서 90도로 인사를 하더라. 원장님 나오셨냐고 하면서. 그리고 자리로 안내까지 해 주더라.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 사건의 피해자한테는 욕설을 하면서.

진술하는 걸 바로 앞에서 듣기도 했다. 형사가 피의자 강 모 교사한테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몇 시냐고 물으니 12시라고 대답하더라.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답했다. 형사가 12시가 맞냐고 재차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또 그 시간을 물었다. 이렇게 물어봤다.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12시 30분이 맞냐”고. 강 모 교사가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계속 시간이 뒤로 밀렸다. 나중에는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1시냐”고 하니까 강 모 교사가 또 고개를 끄덕끄덕. 형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타이핑하고 있고.

그렇게 최종적으로 강 모 교사가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시간은 1시 19분이 됐다. 결정문에 그렇게 되어 있더라.

Q. 그 사람이 얘기하는 대로 다 반영이 된 건가?

어머니 : 그렇다. 또 시간이 뒤로 밀리고, 1심 2심을 거치다가 갑자기 없던 ‘휴게시간’이 생기기도 했다.

Q. 원래는 없던 휴게시간이 생겼다?

어머니 : 원래는 없었다. 아이 사망하기 전엔 분명히 그런 거 없었는데 나중에 가 보니 선생님들 휴게시간 4시간이 생겨 있더라. 근데 강 모 교사가 분명히 5시 55분까지 잤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1시 19분에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고 5시 55분까지 잤으니 4시간이 넘어간다. 없던 휴게시간을 만들었는데 그걸 적용하더라도 문제라는 거다. 그래서 시간이 다시 늦춰졌다.

Q. 시간이 다시 늦춰졌다는 건 무슨 뜻인가?

어머니 : 지금 강 모 교사가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시간이 새벽 2시로 되어 있다. 12시에서 2시로 미뤄진 거다. 계산해 보면 바로 나오지 않나. 휴게시간 4시간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Q. 다른 진술은 바뀌지 않았나?

어머니 : 처음에 실신했다고 진술한 것도 달라졌다. 5시 55분에 일어나 진실방(주희가 지내던 방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실방이다)에 가 보니 주희가 무릎 꿇은 자세로 팔걸이와 등받이에 목이 껴서 죽어 있었다고 했더라. 그리고 아이가 사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다.

Q. 처음 119 신고할 때는 실신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머니 : 최후에는 검사가 ‘아이가 죽은 걸 알았냐’고 물으니 강 모 교사가 ‘알았다’고 대답했더라. 딱 보자마자 아이가 죽은 걸 인지했다고. 이렇게 가면 갈수록 말이 달라진다. 근데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사망한 날은 2012년 11월 8일이다. 근데 강 모 교사가 조사받은 날은 2013년 3월 13일이다. 성심맹아원 원장을 조사한 날은 2013년 4월 23일이었고. 짜맞춰도 다 짜맞출 수 있는 시간이다. 변호사는 진즉 다 선임이 되어 있고. 사건 발생하고 4~5개월이 지나서 조사하는 게 대체 말이나 되는 건가.

앞서 강 모 교사가 주희를 마지막으로 본 게 12시라고 했다지 않았나. 전문가분들에게 물어보니 진술이 바뀔 땐 첫 진술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 근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마지막 진술인 새벽 2시에 본 걸로 확정된 거다.

너무 답답한데, 백 번 양보해서 설령 새벽 2시에 주희를 마지막으로 봤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휴게시간 4시간을 인정한다 치고, 성심맹아원은 24시간 3교대 근무다. 즉, 새벽 8시간 근무를 하려면 낮에 잠을 충분히 자고 근무를 서야 하는데 본인 근무 시간인 8시간 중 4시간을 잠을 자느라 보낸 거다.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러라고 있는 휴게시간이 아니지 않나.

무엇보다 휴게시간이라 함은 모든 원생이 잠든 후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성심맹아원 근무수칙에 그렇게 정확히 기재돼 있다. 그런데 그 교사는 아직 주희가 잠들지 않은 걸 알면서도 잠을 잔 거다.

기저귀에 쓸린 ‘경미한 상처’

Q. 상처에 대해 다시 얘기해 보자.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이 없나?

아버지 :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맹아원 생활일지를 봤다. 교사들끼리 원생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쓰는 일지다. 그곳에 주희 몸에 상처가 여기저기 나타난다고 쓰여 있다. 본인들이 그렇게 써 놨다. 그런데 경찰과 검찰에 진술할 땐 ‘우측 골반에 약간 긁힌 상처 외에는 전혀 모른다’고 일관하고 있다.

Q. 상처가 꽤 컸던 거 같은데?

아버지 : 사진을 들고 교수님들에게 자문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귀 뒤에 4cm ~ 5cm 정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고, 우측 골반도 7cm ~ 8cm가 떨어져 나갔다. 피의자들은 ‘약간 긁혔다’고 했는데 전혀 아니다. 완전히 외피가 벗겨져 나가서 안에 근육하고 핏줄이 보일 정도다. 육안으로 그게 보일 정도로 떨어져 나갔는데 약간 긁혔다니. 정말 사람이 완전 정신을 놓을 정도로 만들어 버리더라. 너무 답답했다. 법이 있는데. 분명히 법이 있는데.

등에 2cm ~ 3cm 깊이로 12cm 길이에 해당하는 상처가 뚜렷하다.

목에 남아 있는 압박흔

귀 뒷부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다.

골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처.

어머니 : 성심맹아원에 입소시킨 게 주희만이 아니다. 주희의 쌍둥이 언니인 우희도 같이 입소했다. 우희는 그래도 의사소통이 되는 아이라 별로 손이 안 가는데 주희는 뇌병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갔다. 기저귀도 차고 있고. 다행히 보행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래서 처음에 우리 아이들을 입소시키기로 결정하는 게 쉽진 않았다. 그럼에도 믿고 맡긴 이유는 성심맹아원의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24시간 관리해 주고, 선생님들도 3교대로 근무를 하고. 작은 멍 자국만 생겨도 바로 부모한테 연락하고, 윗선에도 보고 후 결재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시스템 자체가 굉장히 믿음직스러웠다. 당연히 안전할 거라 생각했다.

사실 그때가 입학 시즌도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성심맹아원 원장이 따로 연락을 해서 자리를 특별히 만들었다고 지금 아니면 못 들어오니 빨리 입소하라고 했다. 난 정말 그 자리가 우리 아이들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라 믿었다.

아이를 맡긴 뒤, 우리는 매주 금요일 오후 4시에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주말을 같이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 다시 입소를 시켰다. 혹시 선생님들 힘들까 봐 깨끗이 씻겨서 보냈다. 보통 아이를 데려오거나 우리가 다시 입소시킬 때 선생님과 함께 인수인계하는 과정을 거친다. 멍이 어디에 들었는지, 그 멍이 지금 어느 정도로 좋아졌는지 이렇게 서로 눈으로 보며 확인한다.

Q. 아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인수인계에선 당연히 심한 상처들은 없었겠고.

어머니 : 그렇다. 인수인계를 철저히 했다. 그런데 사망하기 2주 전 갑자기 전화 한 통이 왔다. 담당 교사도 아니고 원장한테서 직접 전화가 왔다. 뜬금 없이 이런 말을 하더라. “어머니, 극성 맞은 어머니들도 2주나 한 달에 한 번씩 옵니다. 다른 아이들한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이제 2주에 한 번씩만 오세요.” 말 그대로 ‘극성 맞다’고 표현을 하더라.

내가 아이들이 걱정돼서 매주 데리러 가고 매일 전화도 하고 해 왔다. 죄송한 마음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래도 성심맹아원에서 이해해 주곤 했는데 갑자기 말투도 그렇고 굉장히 나쁘게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러면서 ‘이번 주는 넘기고 다음 주에 아이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 좀 찝찝했는데 그래도 원장 말대로 혹시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면 정말 안 되는 거니 알겠다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11월 7일, 그러니까 사망하기 하루 전에 뜬금 없이 또 전화가 왔다. 점심 시간이었으니까 오후 12시였다. 보건 담당 선생님이었다. 전화해서 하는 소리가 ‘골반에 기저귀 때문인지 경미하게 쓸린 상처가 났다’고 하더라. 기저귀 붙이는 데에 뻣뻣한 부분에 쓸린 거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경 쓸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병원을 데리고 가서 소독했다’고 했다. ‘시스템 자체가 부모님한테 말하게끔 되어 있어서 연락을 드린 거다’라고도 했고.

Q. 기저귀에 쓸린 경미한 상처.

어머니 :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이틀 뒤에 갈 거니 오늘 간다고 뭐 다를 게 있겠나 싶어서. 바로 출발하겠다고 하니 그 교사가 극구 말렸다. 재차 두 번 세 번씩 내가 당장 가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더라. 앞서 원장이 얘기했던 대로 ‘다른 아이들한테 피해가 가니 이해 좀 해 달라’고.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저 애 부모님은 자주 데리러 오는데 왜 우리 부모님은 나 데리러 안 오지, 하는. 그 말을 들으니 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채비는 다 마쳤는데 가질 못했다.

그렇게 있는데 다음 날 아침, 전화가 울렸다. 2012년 11월 8일, 아침 7시 조금 안 돼서였다. 성심맹아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시냐 물으니 대뜸 어머니, 놀라지 마세요. 주희가 자다가 죽었습니다, 라고 하는 거다. 처음엔 내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 네? 하고 계속 되물었다. 두세 번 재차 물었던 것 같다. 자다가 편히 사망했습니다, 라고 하더라. 그 다음부턴 기억이 안 난다.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그냥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가 확인해 보니 우리한테 한 주 건너 뛰고 오라고 한 이유가 있더라.

Q. 무슨 이유였나?

어머니 : 자료를 찾다 보니 주희가 11월 2일에 기숙사 근방 가정의학과에 치료 차 들른 기록이 있었다. 바로 찾아가서 진료 차트를 확인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복부에 열린 상처’. 정확히 그렇게 기재돼 있었다. 영어로. 보통 ‘열렸다’는 건 날카로운 부분에 의해 찢어지거나 벌어졌을 때 표현하지 않나. 성심맹아원에서 말한 ‘쓸린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병원 밑에 있는 약국에도 찾아갈 정도였다. 처방전을 확인하고 싶어서. 근데 병원에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의사가 정색하면서 ‘좋게 합의하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왔냐’고 묻더라. 본인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면서. 겨우 사정해서 기록을 뗐다. 처방전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항생제가 3일치나 처방이 되어 있는 거다. 상처 소독까지 받았고. 약사에게 다시 물었다. 여기 써 있는 ‘복부에 열린 상처’와 이렇게 항생제를 처방할 정도면 ‘기저귀에 쓸린 경미한 상처’와는 거리가 있지 않느냐고. 그분이 말하길, 쓸린 정도론 이런 식으로 기재하지 않고 날카로운 것에 찢겨져 벌어진 상태는 되어야 이렇게 표현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상처가 아물 줄 알았던 거다. 주희가 사망하기 2주 전에 그 주는 오지 말라고 한 거랑, 하루 전인 11월 7일에 경미하게 쓸렸다고 말한 것 모두 그 상처들을 가리기 위함이었던 거다. 11월 2일에 이미 본인들이 가서 상처 소독 받고, 독한 항생제도 처방 받고, 상처에 붙이는 패치까지 사 놓고선 우리한테 거짓말을 한 거다.

Q. 말로만 들어도 황당하다.

어머니 : 대법원 앞에서 시위할 때 피부과 의사선생님들이 같이 시위를 해 줬다. 몇 달 동안이나. 그분들한테도 우리 아이 상처를 보여줬다. 선생님들이 정말 황당해 했다. 일단 의사라면 ‘경미한 상처’를 두고 절대 ‘열린 상처’라 쓰지 않고 골반 상처만 봐도 어른도 견디기 힘들 통증이 뒤따랐을 거라고 했다. 그 통증이, 아마 아파서 밥도 못 먹을 정도였을 거라고.

Q. 상처 사진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밝히지 못했을 것 같다.

어머니 : 지금 우리 아이 국과수 부검 결과는 사인불명으로 나와 있다. 중간에 참 여러 번 바뀌었다. 약물사에서 사인불명, 급사.. 네 번 정도 바뀌면서 최종적으로 사인불명이 됐다. 사망시간도 미상이다. 정말 사진마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 같다. 아마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사진을 보면 살점이 귀 뒤에 5cm, 골반에 7~8cm가 떨어져 나가 있다. 등에도 2~3cm 깊이의 12cm 길이로 찍힌 듯한 자국이 있고. 목 부분도 함몰돼 있다. 피부도 여기저기 벗겨져 있고 머리카락도 심하게 헝클어져 있다. 이해할 수 있나. 성심맹아원은 몇 시간 전에 아이를 목욕시킬 때 골반의 쓸림 상처 외에는 전혀 없었다라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성심맹아원 원장은 오히려 우리에게 묻더라. 이 상처가 왜 생긴 거죠? 이러고.

그리고 무엇보다 부검 결과 대장, 소장이 비어 있었다. 성심맹아원 측이 분명 밤에 간식까지 먹였다고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이었던 거다.

Q. 먹은 게 전혀 없었다는 뜻 아닌가?

어머니 : 그렇다. 국과수 부검 결과 그렇게 나와 있다. 비어 있다고. 굶겼다는 뜻 아닌가. 아직도 후회된다. 7일날 그쪽 말 무시하고 아이를 데리러 갈 것을.

아버지 : 그 수많은 상처 중에 규명된 게 하나도 없다. 상처에 대해선 재판과정에서 아예 다루지를 않았다. 그게 너무 억울하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있는데 그리고 분명히 국과수 부검 결과에 기재가 돼 있는데 이 상처가 왜 생긴 건지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

Q. 경찰이나 검찰이 상처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나?

어머니 : 아이의 사망에 대한 직접 원인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걸 조사할 의무는 없다고 했다. 국과수에서도 그랬고 경찰에서도 그랬다.

Q. 학대 가능성에 대한 수사도?

어머니 : 그렇다더라. 그냥 성심맹아원 측 말만 듣는 거다.

아버지 : 성심맹아원 측 관계자가 본인이 학대 같은 거 없었다, 고 진술하면 자기네들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너무 답답해서, 그렇다면 경찰에서 하는 게 대체 뭐냐, 타살이나 학대 흔적이 보이면 그걸 수사하고 범인을 잡는 게 목적 아니냐, 하며 따졌더니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건 본인이 학대를 했다고 시인했을 때 그걸 토대로 수사하는 거지 모른다고 잡아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이게 대체 무슨 법인지 모르겠다.

"아버님, 저만 믿고 화장하시죠"

Q. 재부검을 신청하는 과정에서도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버지 : 사건 있고 나서 3개월 ~ 4개월 정도 아이 장례를 치르지 않고 버텼다. 하루 8시간 동안 시위하며 제대로 된 수사를 촉구했다. 청와대하고 법원 앞에서 시위하다 집에 들어와선 12개 기관에 보낼 진정서를 새벽 3시까지 썼다. 제발 재부검 좀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루는 재부검 담당하던 검사가 찾아왔다. 와서 하는 말이 우리나라 역사에 재부검이라는 건 해 본 사례가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거다. 그래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 진정서를 넣었다. 내 뜻이 전해진 건지 얼마 뒤 그 검사 사무실 계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검사가 우리 아이 시신을 확인해 보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진정서 넣은 게 효과가 있었구나 싶었다. 나라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내려 보낸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변호사 두 분하고 함께 갔다. 오전 10시쯤 도착하니 그 검사하고 전화 준 계장하고 차 안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시신을 확인하러 갔다. 시신 염을 다 풀고 검사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상처 부위는 피와 진물이 잔뜩 뭉쳐 있었다. 한 10분 정도 검사가 확인하더니 우리한테 와서, 변호사도 있는 데서 침통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학대나 타살에 대해서 철저하게 수사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만 믿고 이제 그만 아이 보내주는 게 어떻습니까. 고인에 대한 예우도 아니니 저만 믿고 보내주십시오.”

무슨 더 할 말이 있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90도로 절하듯이 인사를 했다. 영감님만 믿겠습니다, 영감님만 믿겠습니다, 정말 영감님만 믿고 보내겠습니다. 난 정말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이제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Q. 검사가 직접 와서 그러니 당연히 그렇게 느꼈겠다.

아버지 : 그랬다. 정말로. 그날이 금요일이었다. 바로 화장 신청했더니 3일 뒤인 월요일날로 일정이 잡히더라. 그렇게 월요일에 장례 절차를 밟았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린 자식 화장시키면 그 후유증이 정말 오래 가더라. 한동안 정신을 놓고 지냈다. 그렇게 있는데 며칠 지나서 변호사님이 다급하게 연락을 해 왔다. 담당 검사가 바뀌었다는 거다.

Q. 해결해 줄 거라던 그 담당 검사가?

아버지 : 그 검사가 바뀌었다는 거다. 변호사님도 격양돼 있었다. 불과 2일 ~ 3일새에 공무원이, 그것도 검사가 갑자기 인사발령이 났다니. 우리 아이 화장하게 해 놓고. 억장이 무너졌다. 바로 충주로 내려갔다.

도착하니 그 검사가 그대로 있었다. 검찰청 민원실에 바로 인터폰을 넣었다. 민원실 계장이 어떻게 왔냐고 묻길래 주희 사건 OOO 담당 검사님 만나러 왔다고 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곤 그 검사 쪽에 연락을 넣는데,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들었다. 들어 보니, 검사 말이 그 사건은 이미 내 손을 떠났기 때문에 이제 만날 이유도 없고 얘기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로 민원실 계장이 우리에게 전했다. 그러면 나한테 연락한 그 검사실 계장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또 연락을 넣는데 검사실 계장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그 검사랑 똑같은 얘기를 했다.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면 우리 사건 바뀐 담당 검사라도 만나 보고싶다, 억울한 죽음에 대해 피해자 부모로서 요청한다고 했다. 너무 놀라운 게 앞서 그 검사랑 계장이 했던 얘기를 또 똑같이 하는 거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큰 사건이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없다고. 정말이지… 그렇다면 바뀐 담당 검사실의 계장이라도 만나 보겠다고 다시 한 번 연락을 요청했다. 연락을 넣으니 마찬가지로 같은 답변이 오더라. 큰 사건이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없다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화장하라고 회유한 그 검사가 3일 뒤에 인사발령 날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다시 떠올려도 정말 속이 터진다.

어머니 : 그러고서 바로 재부검 승인이 떨어졌다. 그 OOO 검사로 바뀌고 나서.

아버지 : 5개월이 넘도록 재부검을 요청해도 안 되더니 화장하고 3일 뒤에 검사가 바뀌니까 바로 재부검을 하겠다고 나온 거다.

Q. 시신이 사라지고 나니 재부검 승인이 떨어졌다?

아버지 : 깨끗하게 다 없어지고 나니까 그제야 승인이 떨어졌다. 정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변호사님 통해서 알아 보니 당연히 시신이 없으므로 재부검은 안 되고 부검 중에 찍었던 사진을 갖고 다시 사진판독을 한다는 거였다. 검시를. 정말 대한민국엔 법이 없다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무법천지다. 정직하게 수사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할 기관에서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사진판독 결과도 6개월 뒤에 나왔다. 서울대 OOO 교수님이 사진판독을 했는데 그 의견서도 정말 황당했다. 본인이 자필로 쓰길, ‘질식사로 보려면 기도 안에 거품이 있어야 하고, 장기 및 안면부에 울혈이 있어야 하고, 청색증이 보여야 한다. 그러나 주희 시신에선 그게 발견되지 않으므로 질식사가 아니다.

너무나도 황당한 의견서였다. 왜냐면 주희 시신에 분명히 기도 안에 거품이 있고, 장기 및 안면부에 울혈이 있고, 청색증이 있기 때문이다. 질식사의 전형적인 형태다.

Q. 그래서 서울대 모 교수는 아이 사인을 뭐로 보던가?

어머니 : 수뎁(SUDEP, 간질로 인한 돌연사)으로 결론 내렸다. 간질로 인해 갑자기 숨이 멎었다는 결론이었다. 말 그대로 급사다. 1차 부검 결과만 읽어 봤어도 정말 절대 이런 의견서는 못 내놓았을 거다. 근데 검찰은 그 의견서 하나로 지금까지 쭉 밀어붙이고 있다.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숨이 딱 멎어서 죽었다니. 그 많은 상처를 남기고, 기도에 거품도 남기고, 울혈도 남기고, 청색증도 남기고. 말이 안 된다.

전국에 있는 큰 병원이란 병원은 다 돌아다녔다. 특진으로 신경과, 소아전문 선생님께 자문을 구했다. 그 중 어떤 분은 자기가 교수생활 하면서 이런 케이스는 처음 본다는 거다.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을 확률보다 훨씬 낮다고, 말도 안 될 정도로 희박하다고 얘기해 주더라.

아버지 : 세브란스에 계신 교수님은 수뎁이란 거는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하는 얘기라고 했다. 자기가 간질인지도 모르고 자다가 죽거나, 물에 빠져서 죽는다거나, 날카로운 모서리에 찧어서 죽는다거나. 이런 규명되지 않은 죽음에 대해 수뎁이라 부르는 거라고 했다.

논문도 찾아봤다. 뉴욕대학교에서 발표한 논문을 보니 우리 아이가 만약 수뎁으로 죽었다면, 그와 같은 케이스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 딱 1번 있다. 간질환자가 수뎁이 아니더라도 간질로 인해 죽을 가능성은 698분의 1이다. 일반적인 교통사고보다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죽을 확률이.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기자분이 법의학 교수한테 찾아가서 우리 사건을 보여줬더니, 그 교수님이 이건 너무 억울한 사건이라고 하는 거다. 해당 내용이 기사로 나갔다. 간질환자가 갑자기 심장이 멎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령 심장에 이상이 있어서 헉 하고 죽더라도 심폐소생술만 하면 얼마든지 소생 가능성이 있다고. 말인즉, 심장이 멎는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되는데 정말 희박하게 그랬다 하더라도 누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으면 절대 죽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였다.

그 교수님과 우리는 일면식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증인으로 나가겠다고 해줬다. 너무 고마워서 펑펑 울었다. 변호사님 통해서 그분도 증인 신청을 했다. 그런데 불허 당했다. 판사가 불허했다.

그리고 수뎁으로 죽는다는 건 비행기에서 떨어질 확률보다 적다고 말씀하신 의사 선생님도 우리가 증인 신청을 했다. 변호사님 통해서. 그것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허. 불허. 불허. 피의자 쪽에서 신청하는 건 다 받아주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신청하는 건 계속 안 받아줬다. 그나마 우리가 진정서 보내고 한 게 1심에선 받아줬는데. 보통 3개월에 한 번씩 재판이 열려야 하는데 우리 사건은 1심 하는 데도 1년이 훨씬 넘게 걸렸다.

어머니 : 재정신청(검사가 피의자를 불기소처분했을 경우, 이것이 합당한지 법원에 판단을 요청하는 제도)하는 데만 2년이 걸렸으니까. 그 전까지 우린 재판도 못 받아봤다.

Q. 신청한 모든 증인과 증거가 모두 불허를 당한 건가?

아버지 : 가해자가 제시한 건 다 받아들여줬다. 증인들 의견서도 다 받아줬고. 서울대 교수 것도 받아줬고. 피해자인 우리 신청은 단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재판 중 하도 답답해 손 들고 말했다. 제발 우리도 증인 신청 좀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어머니 :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우리 아이 한 번도 안 보고, 그냥 사진으로만 확인한 법의학 교수 의견서 하나만 그렇게 증거 채택이 되고, 우리 아이 계속 진료하며 약 처방해 준 주치의는 증인 채택도 안 되고.

Q. 주치의 선생님은 어떤 내용의 의견서를 보냈나?

어머니 : 마찬가지 내용이었다. 진실이 그러하니까. 죽을 확률도 없고. 24시간 근접 시야에서 케어만 했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는. 그런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맹아원 담당 교사가 무죄를 받은 이유

Q. 맹아원 측 담당교사들은 어떤 판결을 받았나.

어머니 : 무혐의 처리된 상태다. 양심선언으로 무혐의 처리됐다.

Q. 양심선언?

어머니 : 담당 검사였던 OOO 초임 검사가 그렇게 처리했다. 담당 교사가 “내가 아이를 방치하고 다른 방에 가서 깜박 졸았다가 잠들었다”고 말한 게 양심선언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한다고.

Q. 이해가 잘 안 된다.

아버지 : 결정문에 정확히 그렇게 써 있다. 알람시계 맞춰놓고 다른 방에 가서 잤다는 건 양심선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무혐의 처리한다. 이렇게 마지막 결정문에 그렇게 써 있다.

초임 검사가 작성한 결정문. "본인이 잠을 잤다고 한 것은 양심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음. 따라서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내림."이라고 작성돼 있다.

어머니 : 이 사건이 대전고법으로 갔을 때는 판사님 세 분이 보더니 이거는 잘못됐다고 바로 말하더라. 그러니까 외부로 나가면 수사부터 판결까지 모두 엉터리인 게 확인되는데 이상하게 충주 지역에서, 여기 지역이 굉장히 좁지 않나. 경찰이 성심맹아원 원장한테 피해자 부모 앞에서 90도로 인사하고 의전하고. 꼭 충주 지역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처음 1심에선 담당 교사가 금고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이건 받았다고도 볼 수 없다.

아버지 : 재판 끝나고 기자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검사랑 판사가 어떻게 하면 최대한 약하게 줄까 고민한 티가 역력하다고 하더라. 진짜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제일 약한 거. 그렇게 골라내기도 쉽지 않았겠다고 하더라.

재정에서 앞서 이야기한 주치의 선생님의 의견서를 동봉해 질의서를 보냈다. 아이의 죽음을 수뎁으로 보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렇다 하더라도 옆에서 담당 교사가 있었다면 아이는 죽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담당 교사한테는 아이를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근데 초임 검사가 양심선언으로 인한 무혐의 처리를 해서 뒤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이게 법인가. 이게 법인가.

충주 그리고 성심맹아원, 그 이상한 관계

Q. 이후 맹아원이나 해당 검사 측에서 연락이 온 건 없었나.

어머니 : 사망하고 바로 직후에 딱 한 번 왔었다. 그 이후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버지 : 한 장 줄 테니까 그걸로 마무리하자고 연락해 왔었다. 모 대학 교수까지 보냈다. 자기네 과실을 인정하고 죽을 죄를 졌다고. 모두 자기네 책임이라고 그랬다. 당연히 거절했다. 진실규명이 우선이었다. 보니까 CCTV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비단 주희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한테도 안전에 치명적이지 않나.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뿐이었다. 돈? 그런 거 바라고 할 거 같았으면 시작도 안 했다. 그렇게 수사가 진행되고 나니 성심맹아원 측 태도가 돌변했다.

Q. 경찰들이 90도로 인사할 정도면 성심망아원의 지역 내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것인데, 어떤 외압이라든가 이런 걸 느끼진 않았나?

어머니 : 아이를 화장하기 전 5개월 ~ 6개월 정도를 버텼다고 했지 않나. 그때 우리 아이 시신이 건국대학교 충주병원 영안실에 안치돼 있었다. 그 버티는 기간 동안 영안실 관계자가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빨리 처리하라고. 빨리 처리 안 하면 영안실 온도를 올려버릴 거라고.

Q. 영안실 온도를 올린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어머니 : 시신이 부패되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협박이었다. 본인들도 그런 외압들을 계속 받는다고 하더라. 정말… 그런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찾아가서 매달렸다. 너무 억울해서 그렇다고. 제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제발 좀. 그럴 때마다 담당자도 난처해 했다. 자기들한테도 자꾸 전화가 오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 빨리 처리하라고 하더라.

한 번은 경찰한테도 전화가 왔었다. 지역 장애인단체에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전화번호를 달라는데 줘도 되냐고 묻더라. 우리가 자꾸 성심맹아원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으니 그것에 장애인단체가 들고 일어났다는 거였다.

아버지 :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내가 그 충주 장애인단체 관계자를 만났다. 만나 보니 정말 기가 찼다.

어머니 : 우리가 아이 시신을 갖고 있는 게 정보과에서 상당히 거슬렸나 보더라. 어떻게든 아이 시신을 처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장애인단체 만나 보니 하는 말씀이, 오히려 본인들은 우리 사정 듣고 너무나도 억울하고 말도 안 되고 명백한 사건이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정보과에 얘기한 게 다라고 했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둥 하는 소리는 입 밖에 낸 적도 없다면서.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충주에서 시위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지나가면서 그러더라. 아니, 이거 뭐 자식 놓고 장사했다던데 아직도 이러고 있어요? 수억 받았다면서요? 이렇게.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Q. 사실이라면, 진실을 규명해야 할 수사기관이 오히려 피해자를 조직적으로 괴롭힌 게 아닌가.

어머니 : 지금까지도 법원은 우리의 증인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2심에서 그 담당 교사는 무죄가 됐다. 과실은 인정하는데 인과관계가 성립이 안 된다는 황당한 이유로.

아버지 : 처음 1심을 치렀을 때 성심맹아원에 변호사 13명이 붙었다. 그랬는데 어쨌든 유죄가 떨어졌다.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긴 했지만 어쨌든 유죄가 떨어지긴 했다. 근데 유죄 떨어지자마자 성심맹아원에서 추가로 서울 서초동에 있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로펌에 의뢰해 변호사 10명을 추가로 선임했다. 총 23명의 변호사가 우리 개인을 상대했던 거다.

그렇게 2심에서 무죄가 판정됐다. 무죄라는 얘기 듣자마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과실은 인정되는데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죄는 졌는데 그게 죄인지 모르겠어서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인가.

돌이켜 보면 1심 때부터 검사들이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했다. 1심 당시 판사가 구형을 하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검사가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구형 내용을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서면 내용을 보니 피의자에게 무죄를 내려야 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2심에서는 아예 의견서 자체를 안 냈다. 서면으로 의견서도 안 냈다고. 검사가 피의자 측을 변론하는, 피의자의 변호사인양 행동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 결과가 무죄로 나온 거다.

처절하게 싸운 5년의 대가

Q. 여기까지가 지난 5년 동안의 이야기다. 5년 내내 시위를 해 온 것인가.

아버지 : 그렇게 지내 왔다. 지방에서 재판이 열리면 그쪽에 가서 시위를 하고. 1년 정도 전부터는 청와대와 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은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하고 청와대는 10시 30분쯤 도착해서 오후 3시까지 하고. 그러고 집에 간다.

Q. 앞으로 남은 재판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 : 지금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데, 이게 마지막이다. 정말 벼랑 끝에 섰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하면 또 대전고등법원으로 넘어 간다. 대전고등법원도 청주의 원예 재판부가 생겼다. 이쪽에 있는 몇몇 판사가 지금 파견 나와 있는 실정이다. 그 사람들이 2심 때 무혐의한 재판부다. 그 충주라는 게, 그 지역의 유대가 정말 큰 것 같다.

어머니 : 법을 모르니 정말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대부분 모를 거다. 차에서 숙식하며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일반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았다. 1:1로 사건 설명하고, 정말 억울하니 제발 상고(1심 혹은 2심 판결이 부당할 경우 대법원에 재판을 요청하는 제도)가 되게끔 사인 좀 해 달라고. 그렇게 3년 동안 10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Q. 10만 명? 어마어마한 수치다.

어머니 : 그게 효과가 좀 있었던 것 같다. 그 전엔 재정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며 상고를 안 한다고 했는데, 그 서명서 넣으니 바로 상고를 했다.

아버지 : 검찰청이 마비가 될 정도였다고 했다. 많은 분들이 항의를 하고. 지금도 대법원 사이트 들어가 보면 일반 시민들이 남겨 준 항의 글이 남겨져 있다. 2심에서 그랬다고 했지 않나. 과실은 맞는데 인과관계가 성립이 안 돼서 무죄라고. 내가 이 인과관계에 대한 자료란 자료는 싹 다 찾아서 확인하고 읽었다. 정말 납득이 안 가는 처사다.

검사가 성심맹아원 측 생활일지만 봤더라도 이런 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상처가 생긴 거 자기들끼리 쓰고 결재한 내용이 다 적혀 있다. 주희가 죽기 일주일 전부터 항생제를 먹였고, 하복부에 ‘열린 상처’가 났고. 본인들이 그대로 써 놓은 증거자료가 그대로 있다. 건강한 사람도 항생제 먹으면 목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컥컥거리는데, 보니까 항생제에다 기관지 삭히는 약까지 먹였더라. 그 독한 걸. 그것들에 더해 간질약까지 다 종합해서 먹인 거다. 그걸 아이가 어떻게 견디겠나.

생활일지에 그렇게 적혀 있다. 일주일 전부터 주희가 처지고 그래서 집중적으로 주희 곁에서 같이 잠을 자거나 하는 식으로 관리를 했다고. 말인즉, 주희 상태가 안 좋았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 아이를 두고 앞도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을 독방에 바퀴가 달린 의자 위에 무릎 꿇린 채 두고 다른 방에 가서 알람시계 맞춰 놓고 잠을 잤다? 이게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어머니 : 담당 교사 진술이 “주희를 편히 쉴 수 있게, 자게 해 두고”였다. 상식적으로 의자 위에 올려 두고 음악까지 틀어놓은 게 ‘편히 자라고’하는 행동인가. 처음에는 문도 닫아놨다고 진술했길래 우리가 그거 감금이라고 지적하니 바로 말 바꿔서 문을 10cm 정도 열어놨었다고 했다. 그렇게 열어두면 감금이 아니게 된다더라. 그런데 그건 또 그런 대로 문제다. 우리 아이 쉬라고 음악을 틀어줬는데 문을 열었다면 자고 있는 다른 아이들은 어떡하란 소리인가. 정말 앞뒤가 안 맞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버지 : 교사가 자기 직분만 충실히 했더라면 이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응급상황이 왔더라도 바로 조치하면 될 것이었고. 알람시계까지 켜 두고, 고의로 잠을 잔 건데… 거기다 상처의 원인도 여전히 알 수 없고. 대법관님들은 현명하시니까 그분들을 믿는다. 현명한 판단 내려 주시리라 믿는다.

Q. 어려운 질문 좀 드리겠다.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아버지 : 가족이…

아버지 : 법정 싸움이 길게 지속되면 아무리 가진 자라 해도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가정도 망가지고. 어떻게 죽을 수 없어서 살아 있지만, 지금까지 내내 고통스럽다. 아직도 꿈에 그 상처 때문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주희가 나온다. 막 소리지르다 보면 아내가 깨워준다. 여전히 그렇게 지낸다. 일어나 보면 베개가 다 눈물로 젖어 있고.

아내는 그 사이 두 번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둘째 아이도 그랬다. 큰 아이는 연락이 두절된 지 이미 오래됐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건 이제 9살된 늦둥이하고 주희의 쌍둥이 언니 우희. 이렇게다. 둘째 딸은 가끔 보고.

가만 생각해 보면 있는 자들은 이런 걸 노리는 게 아닌가 싶다. 생활 접고 시위하고 저러면 저것들 오래 못 버틴다는 생각. 실제 내가 그렇게 느꼈다. 여기 대법원까지 오는 데 터널을 하나 지나야 한다. 2,500원을 내지 않으면 올 수가 없다. 자동차 기름이 떨어지면 이동도 못 하고. 밥도 차에서 그냥 해결한다. 600원짜리 샌드위치 하나로 때우고 만다. 컵라면은 박스째 사다 놓았는데 그냥 끓이지 않고 생으로 먹는다.

하도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몰랐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나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돌아보니 우리 가족들 전부 다 그러고 있더라. 아이들도.

맹아원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어디 위탁업소나 고아원쯤으로 생각하곤 한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맹아원은 시각장애전문학교다. 성모학교라는. 이 학교 수업이 다 끝나고 재활하러 가는 곳이 성심맹아원 기숙학교다. 생활교사가 있고 재활치료교사도 있다. 당시 전국에 딱 9곳 있던 전문학교다. 배움의 터전이고. 이 전문교육을 받으려고 수십만 명이 대기를 하는, 그런 곳이다. 여기 들어가는 게 하늘에 별 따기다. 이 사건은 그런 곳에서 발생한 거다.

어머니 : 1인 시위를 하는데 말 그대로 1인 시위니까 같이 못하지 않나. 남편은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10시간 동안 하고, 나는 신교 쪽으로 가서 10시간을 하고. 그렇게 시위를 다 마치고 나면 전국 돌아다니면서 서명을 받았다. 아이들은 큰 애한테 맡기고. 그렇게 살았다. 어른도 이렇게 지치는데 아이들은 오죽했을까.

돌아다니다 보니 움직이는 거 자체가 돈이더라. 성심맹아원 측은 변호사 23명을 선임해서 싸우는데 우리는 돈이 없어서 그런 거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형사재판은 한 번 하면 기본이 1,500만원에서 2,000만원이 나간다. 그것 외에 자잘한 것들이 많이 들어간다. 사실 처음엔 이 억울한 거 금방 풀리고 사건도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진짜 경찰서는 죄를 져야지만 들어가는 곳이고, 억울한 게 있으면 풀어주는 곳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더라.

Q. 사건이 있기 전 생활은 어떠했나.

어머니 : 그냥 평범하게 집 하나 갖고 있고 그랬다. 우리 주희가 미숙아로 태어나서, 그것 덕에 정말 많이 배우면서 지냈다. 아이 덕에 감사하게도 너무 많은 걸 배웠다. 여행도 1년에 두 번씩은 다녔다. 못 가도 한 번은 꼭 갔다.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밖으로 다니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더 많은 걸 경험시켜 주고 싶었다.

생전의 주희 모습

바다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아이가 물에서 노는 걸 정말 좋아했다. 파도 타는 것도. 사랑해란 말도 참 좋아했다. 그 말만 하면 까르르 웃곤 했다. 그런 아이가 고통에 소리지르고 몸부림치며 울었을 텐데.. 막 발버둥쳤을 텐데 대체 그때까지 교사는 무엇을 했는지.. 정말 너무 억울하다.

집 팔아 전세로 가고 전세에서 월세로 가고 지금은… 정부 보조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 생활을 하고 있다.

Q. 그럼에도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므로…

어머니 : 남은 반쪽을 위해서도 절대 그만두지 못한다. 우리 주희 쌍둥이 언니, 우희. 사건 발생하고 아이가 1년 동안 정말 힘들어 했다. 심리치료도 받고. 밖에도 안 나갔다. 부모인 우리도 믿질 알았다. 이 억울한 거 풀어야 남은 아이들이라도 부모를 믿고 따르지 않을까. 끝까지 나를 지켜주겠구나 하는 믿음. 가끔 우희가 그런 말을 한다. 이제는 엄마 아빠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없던 힘도 샘솟는다.

Q. 그만큼 주변에 도와주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도 크겠다.

아버지 : 같이 시위해 준 시민단체분들, 의사선생님들, 그 외 우리에게 도움 주신 분들 생각하면 정말 눈물 날 정도로 감사한 마음뿐이다. 1심 재판되기 전에 인천에 있는 아동학대방지시민모임 회원 중 한 분이 고등학교 선생님이신데 그분이 3개월 동안 근무도 빼고 충주까지 내려와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해 주셨다. 제자들까지 동참을 했다. 직접 경찰서에 구청까지 찾아가서 사정사정해 주시고. 너무 억울해서 그러니 제발 좀 도와달라고.

그렇게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았다. 우리 같은 약자들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는 건 다 그런 분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는 더 쉴 수가 없다. 내가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 쉬지 않고 바로 이렇게 나와 있다. 그 고마운 분들 생각하면 정말 한 순간도 쉴 수가 없다. 이런 분들을 보면 정말…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정의로운 분들이 해 주시는 걸 볼 때마다 보약이라도 한 첩 먹은 것처럼 힘이 난다. 누가 뭐라 해도 힘이 난다.

어머니 : 이런 인터뷰 요청 같은 게 올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이에 대해 억울한 거 알리고,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단계에 한 발짝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너무 감사 드린다.

Q. 이 사건이 모두 정리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

아버지 :

어머니 : 아이한테 가고 싶다. 우리 아이들 데리고. 우리 애 뿌린 곳. 아직 못 갔다. 자신 있게 가고 싶다. 수사 관련해서 안 좋은 일로는 가 봤는데, 사건 다 해결하고 억울한 거 다 풀고 거기에 우리 애들 데리고 꼭 가고 싶다. 이렇게 엄마 아빠가… 억울한 거 다 풀었다고 얘기하고… 우리 애 이름도 불러보고 싶고…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도 또 눈물이 난다. 더 나올 눈물도 없을 것 같은데 한 번씩 이럴 때마다 막… 다 쏟은 거 같은데 또 나온다.



<충주 성심맹아원 의문사 사건 일지>

- 2012년 11월 8일 : 피해자 김주희 양 사망

- 2013년 : 검찰, 시설 관계자 5명 불기소 처분

- 2014년 7월 18일 : 대전고법, 검찰에 공소제기 명령(재정신청)

- 2015년 4월 17일 : 1심 재판부, 담당교사에 유죄 선고(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 2016년 4월 15일 : 2심 재판부, 담당교사에 무죄 선고

- 2016년 4월 21일 : 검찰, 법원에 상고장 제출

- 2016년 5월 10일 : 대법원 접수,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중

* 후원계좌 알림

- 은행 : 농협

- 계좌 : 351-0909-8602-73

- 성함 : 김종필

* 팟캐스트 들어보기 :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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