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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문재인, 왕따의 계보

  • 입력 2017.02.01 11:13
  • 기자명 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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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1월, 문재인 전 대표를 '해코지 정치인 1위'로 선정한 <TV조선>. 이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

문재인 전 대표는 매일 까인다. 특히 종편에서는 하루 종일 까인다. 이젠 그런 소리를 듣고도 분하고 억울하기는커녕 그냥 데면데면해질 정도다. "문재인은 절대 안 돼"라고 외치며 노냥 까대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레파토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종북이고 하나는 말 바꾸기다.

곰곰 생각해보면 오래 전부터 많이 들어본 레파토리다. 그렇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을 오랜 기간 짓눌러오던 낙인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향하던 낙인찍기가 노무현 대통령을 거쳐 문재인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1. 빨갱이와 말바꾸기

김대중 대통령은 평생의 정치역정을 "빨갱이"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김 대통령의 용공 혐의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남노당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반공과 멸공과 승공과 북진통일을 외치지 않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 화해를 추구한 것이 유일한 용공 낙인의 근거였다.

2003년 4월 19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반김반핵 자유통일 청년대회' 집회에 등장한 '김대중 빨갱이' 피켓

‘말 바꾸기' 공격은 ’빨갱이‘ 만큼 무겁고 위력적이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뢰'다. 지속적인 '말 바꾸기' 공격은 이런 신뢰가 쌓일 틈을 주지 않는다. 한 마디로 '못 믿을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받았던 ‘말 바꾸기’ 공격의 가장 큰 근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86년 조건부 불출마 선언이었고, 또 하나는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가 95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복귀한 것이었다. 86년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조건을 전두환이 거부함으로써 굳이 번복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고, 95년의 복귀는 지방자치제 실시를 통해 한국 정치의 대변혁을 꾀하려는 시도였다.

2. 공격 수단으로서의 일관성

일관성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의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제1덕목은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혹은 일을 하면서 10년 전에 한 말, 20년 전에 가졌던 생각을 지금 이 시점까지 일점일획 변화 없이 그대로 지키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견지할 수도 있고,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일관성을 유난히 따진다. 모든 경우에 따지는 것은 아니다. 미운 털 박힌 사람에게만 지독하게도 따진다. 원래의 가치와는 별도로 일관성이란 것이 누군가를 공격하기 딱 좋은 덕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짜 빨갱이냐 아니냐, 말을 바꿨냐 안 바꿨냐가 아니다. 욕하기 좋으니까 용공 딱지를 붙이고, 추궁하기 좋으니까 말 바꾼다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용공이어서, 믿을 수 없어서 비난하는 게 아니라, 비난하기 위해 용공과 말 바꾸기를 끌어대는 것이다.

3. 비주류 듣보잡

3당 합당 이후 영남 야당세력은 곧 김대중 대통령을 따르거나 그와 연대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언제나 "김대중 앞잡이"에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지내야 했다. 노무현 역시 3당 합당 후 그 소리를 들으며 정치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영남 보수세력에게 있어서 "김대중 앞잡이"라는 낙인에는 또 다른 층위의 저주가 담겨 있다. 바로 "배신자" 딱지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하자 그에 대한 공격은 멈췄다. 그러나 방향만 바꿔서 노무현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노 대통령은 김 대통령을 향하던 저주에 '비주류', '듣보잡'까지 덧붙여져 더욱 극렬한 왕따 공격을 받았다.

학력을 문제 삼는 저열함까지 보이기 일쑤였다.

문재인은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철학도 계승하고 있지만, 그 분들이 받았던 혐오와 저주도 함께 물려받았다. 노무현이 김 대통령의 전통적인 왕따 목록에 ‘비주류’, ‘듣보잡’을 추가시킨 것과 같이 문재인도 레파토리 두 개를 더 얹었다. 두 분 대통령 때는 없었던 '패권주의'와 ‘호남홀대’ 레파토리다.

빨갱이에, 말 바꾸기에, 김대중 앞잡이에, 배신자에, 비주류 듣보잡에, 패권주의와 호남 홀대까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주세력의 지도자에게 퍼부어지던 버라이어티한 혐오의 종목들이 문재인 하나를 향해 일제히 퍼부어지고 있는 것이다.

4. 보수, 진보, 영남, 호남 전방위 공격

노무현과 문재인을 향한 공격은 김대중 대통령과는 또 다른 면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나마 진보세력과 호남 지역에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 진보 양쪽에서 포화를 받아야 했다. 문재인은 거기에 더해 영남과 호남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이 받고 있는 공격은 두 분 대통령에 비해 훨씬 더 현란하다. 참여정부의 호남 편중지원에 부글부글 끓는 영남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했던 “부산 정권” 발언은 바로 호남 홀대론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역대 지도자들 중에 영호남으로부터 동시에 공격받은 지도자는 노무현과 문재인 단 둘 밖에 없을 것이다.

'문재인 대세론'이 고개를 들자 여야를 막론하고 일제히 '호남홀대론'을 주장하곤 했다.

문재인의 “사드 배치 전면 재검토” 발언은 보수언론에 의해 ‘사드 철회’로 해석되어 보수세력이 들고 일어나더니, 몇 달 뒤 “재검토에는 철회와 유지 모두가 포함된다”는 발언은 진보 언론에 의해 ‘철회 방침의 철회’로 해석되어 당내 주자를 포함한 진보 진영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똑같은 말을 놓고 서로 제각각 입맛대로 해석하고는 그것을 말 바꾸기라고 공격을 하는 것이다.

가히 보수와 진보, 영남과 호남을 가리지 않고 문재인에게 퍼부어지는 총체적인 국민화합형 왕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5. 총체적 왕따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같은 현란한 왕따와 혐오와 제 맘대로의 공격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또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이 현상은 민주세력의 다음 지도자에게도 이어질 것인가?

아마도 3대의 지도자를 거쳐 이어져 내려온 이 불행한 왕따 현상은 아마도 문재인 대에서 그 종말을 고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격을 가장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주도해왔던 영남 보수세력이 뚜렷한 퇴조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호남 홀대론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확연하게 누그러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엘리트 진보세력의 비주류 왕따 현상이 좀 더 지속되겠지만 이 역시 문재인이 집권하면 그 시기를 거치면서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3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증폭되어온 특정 세력에 대한 왕따 현상을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것이 문재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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