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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슬픔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입력 2016.03.03 10:40
  • 기자명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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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났다.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 준다던 말의 위력을 실감하듯, 전 세계 팬들의 연원이 모여 드디어 레오가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매드맥스>는 선전을 했지만 기술부문의 상들을 휩쓴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하다 (조지 밀러 옹의 감독상 불발은 여전히 아쉽기도 하지만).
그리고 지난해 보았던 영화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었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인사이드 아웃이 내 작년 최고의 영화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 이 영화인가를 이야기하자면 꽤 길어지는데, 사변적인 것들을 각설하고 정리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인 변화와 그 본질적인 의미에 못지않게 나라는 존재(self)에 대한 관심을 집중해 왔는데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일련의 소결과 이 애니메이션이 시사해 준 바가 꽤나 많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게, 혹은 여전히 모호하게 고민하던 것들이 하나의 매듭으로 끝날 수 있게 도와줬달까.
우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인 접근으로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꽤나 많았다. 실제 제작과정에서도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것이 익히 알려졌고, 그것을 기본적인 스토리부터 시각화를 통해 충실하게 구현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이라는 학술적이고 개념적인 부분들을 직관적이고 즉물적으로 시각화하여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은 영상매체들 가운데서도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 영화를 효과적으로 보려면 전체 이야기의 줄거리에 집중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시각화되어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실제 애니메이션은 그 장르와 정착되고 심화, 발전되는 과정에서 시각화된 상징의 표현이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때문에 가볍게 보아 넘기는 이야기들에도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시각적 상징이 들어차 있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상징에 대한 독해는 취사선택의 영역이다. 이것을 읽어내야 작품을 '제대로' 보았다고까진 할 수 없지만 이러한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면 작품을 보는 '재미'가 증가한다. 그건 명백하다. 재미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를 부여하고, 메시지를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확장시켜 보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중에서 터부시하고 필요를 의심해 간과해야 할 감정을 없다는 것을 주지하는 것이다. 반대로 좁혀서 생각해 보면 슬픔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의 여부가 우리가 감정적으로 일종의 성숙을 이룰 수 있는 열쇠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만큼 슬픔이란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나 역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몇 년 동안 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연유하여 나에게 발생하는 부적 감정(pessimism)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내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기도 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어렵사리, 하지만 어렴풋이 그걸 받아들이고 그것들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인정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인정할 것에 대해 촉구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내에서 가장 재미있게 나타나는 것은 각자의 머릿속에서 메인 컨트롤을 담당하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가이다. 우선 주인공인 라일리는 처음엔 기쁨이(joy)가 메인 컨트롤을 담당한다. 하지만 전체 이야기를 통해 얻어지는 교훈처럼 모든 경우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슬픔이(sadness)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나중에는 슬픔이가 중심으로 옮겨오는 것을 보여준다.


초반부, 라일리의 감정을 콘트롤하는 메인 캐릭터는 기쁨이(JOY)이다.


단순히 라일리의 이러한 이야기만으로 끝이 난다면 흥미로운 점이 덜 할 터이고 지나친 교훈성과 설명으로 인해 그 메시지가 희석될 수도 있겠지만 제작진은 이를 좀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주지하고 있다
.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이 이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상징의 재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라일리와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부모님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대한 시각화는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와 긴밀하게 닿아있다.


라일라 엄마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장면



라일라 아빠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장면


상단은 라일라의 엄마의 심리상태이고
, 하단은 아빠의 심리상태이다. 이렇게 각각의 인물의 심리상태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은 라일리가 이사 후에 불안과 우울을 느끼고(극의 전개상으로는 기쁨이와 슬픔이가 기억 저장고로 날아가 버리고) 있는 상태에서 달라진 라일라를 걱정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인데, 단순히 감정의 외향적인 것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메인 컨트롤을 감당하고 있는 감정의 종류가 각각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엄마의 경우는 슬픔이가 그것을 감당하고 있고, 아빠의 경우는 버럭이(anger)가 그것을 맡고 있다. 물론 이것이 그 인물의 모든 경우에서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해당 이야기 내에서는 이러한 포지션으로 감정이 컨트롤되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포지션에 따라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성격은 좀 더 그 시사하는 바가 명백하다.
엄마의 경우에는 라일라의 변화에 대한 인지가 빠르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고, 라일라가 머릿속에서 메인 컨트롤을 담당하는 기쁨이를 잃기 전까지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로 인한 심경의 변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리액션들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하는, 이야기 내에서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중심엔 슬픔이가 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버럭이가 메인 컨트롤을 감당하고 있다. 아빠는 자상하고 딸을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딸의 환경 변화에 따른 고민들에 대한 인지가 더디고(자신이 처한 복잡한 상황 때문이겠지만) 대화의 기회에서 라일라의 돌발적인 행동에 화를 내 버려 결과적으로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화가 폭발한 다음에 취하는 리액션이 고작 네 방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한국의 정서에서는 꽤나 충격적인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면 밖으로 내쫓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물리적인 체벌을 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 내에서만으로 확증하면 슬픔이가 메인 컨트롤을 하는 인물이 상황에 대한 성숙한 판단과 리액션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다. 이건 단순히 슬픔이의 중요성을 주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존에 가족 내의 관계나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단순히 성역활이나 가족 내에서의 포지션에 따라서 이야기했던 것(여자니까, 엄마니까, 혹은 남자여서, 아빠는 원래 등)과 다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면(사실 뻔해 보이는 교훈적 결말을 어쩔 수 없는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껏 이야기에 등장했던 사람들의 머릿속의 감정 포지션과 상황들이 나온다. 그 상황에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들에는 라일라의 알 수 없는 반항과 방황에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다 그들만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좀 더 넓은 포용력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알 수 없고 인지하지 못한 것일 뿐이지 누구나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타당한 이유와 논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와는 별개로 타인을 대할 때, 전혀 사고하지 않고 무지하기 때문에라고 폄하하거나 배제해 버리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내 상식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도 그들만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서 행하고 있는 일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 사고와 논리가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삶에서 배제하고 지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더더욱.
2015년의 영화로 이것을 꼽은 이유는, 살면서 사람이 가장 어렵고 관계가 가장 난해 하나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관계는 어쩌면 삶의 전부인데 이 애니메이션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과 같이 그것에 대한 자세들을 제법 쉽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라일라가 그렇게 나름의 심각한 방황을 하고 나서도 아직 사춘기라는 것이 남아있고, 성인이 되어서 겪어야 할 것들이 산재할 것이라는 것들은 지나친 현실감인 것 같아서 오싹하기도 했다. 또한 다들 빙봉이 사라지는 장면에서 빙봉을 부르면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고 그러는데 전혀 감흥이 없던 걸로 보아서 내게 동심이란 것은 없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해 마음 한편이 시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들을 던져주면서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그 어떤 영화보다 이 영화가 가장 인상 깊었다. 나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가까운 내 주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걸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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