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의 주인공 홍설은 늘 도움을 받는다. 유정으로부터는 장학금을 양보받았고, 백인호로부터는 옷을 샤방하게 입고 다니라는 조언을 듣는다. 친구인 보라로부터는 남자를 소개 받는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정작 홍설은 그 도움과 조언을 단 한 번도 원하거나, 청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그 사실을 안 홍설은 유정에게 몹시 화를 냈고, 소개팅 장소에서도 억지웃음만 지었다. 백인호의 조언도, 실제 상황이었으면 무척 무례하게 느껴질 만한 지적이었다. 도움, 조언, 소개. 아주 좋게 표현했을 때나 그런 단어를 붙일 수 있지. 약간의 호의도 없이 말하자면, 그것은 그냥 오지랖일 뿐이다.
물론 억울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항변할 수 있을 거다. “나는 호의였는데. 나는 널 생각해서 그런 건데.” 의도를 의심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받아들이는 사람이(이 경우에는 홍설이) 그것이 도움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세상은 넓고 오지랖은 많다
호의의 탈을 쓴 오지랖이 드라마 속에만 있을 리는 없다. 조금 과장되어 있을 수 있어도, 드라마는 현실을 꽤 잘 반영하고 있다. 아니, 장학금을 양보한 유정 정도면 양반이다. 차라리 그건 실제로 도움이라도 됐지 않은가.
세상에는 도움조차 안 되는 오지랖을 펼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예의 없는 친절도, 형식뿐인 관심도 너무나 과잉인 시대다. 얼마 전에 내게 “취업은 언제 하느냐.”고 물은 뒤에 바로 “먹고 살기 힘들겠네.”라고 얘기했던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의 어머니가 그랬다. 내 지난 학점을 물은 뒤에 한숨을 쉬던 어떤 선배가 그랬다.
몇 주 앞으로 다가온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을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렇다. 민족 최대의 오지랖이 펼쳐지는 날 아니던가. “살은 언제 뺄 거냐.”부터 해서 “여자가 그러면 안 되지, 남자가 이래야지.”, “결혼은 언제 할거냐,” “공부 좀 열심히 해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관심들. 언제부터 그리 관심들이 많으셨는지.
인생의 선배로서 한다는 조언들도 역시다. 나는 항상 옳고, 너는 틀렸다고 전제하며, 내가 너보다 훨씬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정해놓기 때문이다. 그래. 물론 호의일 것이다. 호의였을 것이다. “다 너 잘되라고”하는 말일 수 있다.
호의는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호의를 베풀고는 욕을 먹어 당황했던 적이 있을 테다. 호의였던 것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폭력이 되고, 우리는 종종 가해자가 된다. 도무지 이해 못 할 일이다. 아니, 내가 왜 “너 잘되라고 한 말”을 하고 욕을 먹어야 하는가.
그러나 호의가 폭력이 되는 어떤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치즈 인 더 트랩>에서 그랬듯, 상대가 원하지 않은 호의, 청하지 않은 호의가 그렇다.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호의는 당사자를 무력하게 만들기 쉽다. 당신의 그 넓은 오지랖을 펼치고 싶게 하는 그 사람, 그 사람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 역시 하나의 ‘주체’라는 이야기이다. 그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자신이며, 어려움에 빠졌을 때 조언을 구하는 것 역시 자신이다. 상대가 그럴 능력이 없을 거라 판단하고, 그 과정에 끼어드는 것 그 자체로 무례이고, 폭력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향하는 호의가 대체로 이렇다. 연장자에게서 연소자에게로, 상사에게서 부하 직원에게로, 선배에게서 후배에게로, 선생에게서 학생에게로. 자신이 우월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 근거와 이유가 있을 것이며, 당신의 조언이 정말 필요했다면, 먼저 도움을 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호의를 오지랖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호의가 오지랖도, 폭력도 아닌 채로 남을 수 있는 때는 오직 상대가 그것을 원할 때뿐이다. 당신의 권위는 당신이 내세움으로써 만들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라면, 그는 당신에게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건강이 걱정된다고 상대에게 "살 좀 빼야지"라고 말할 필요 없다. 대학과 취업이 걱정된다고, "성적은 얼마나 나왔어."라고 구태여 물을 필요도 없다. 당사자는 이미 그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말은 폭력 이상이 되기 어렵다.
상대가 청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호의라고 꺼내 든 그것, 넣어두시라. 당신의 당신만의 호의를 계속한다면, 누구도 당신에게 호의를 보일 수 없을 테니까. 당신에게 (원하지 않는) 호의를 내보일 권리 따위는 없다. 당신이 정말 그를 생각한다면, 가끔은 침묵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