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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열풍이 불편한 이유

  • 입력 2015.02.25 12:04
  • 기자명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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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은 인문학 열풍?

기업에서 채용 조건 중 인문학적 소양을 보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지금처럼 가벼운 인문서적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취준생들의 수요에 따라 가벼운 인문서적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취업을 위해 인문학적 소양도 갖춰야 하다 보니 나름 유명하다는 인문서적을 펼쳤는데 그 두께가 어마어마합니다. 게다가 다루는 내용이 매우 세부적이고 깊다 보니 몇 가지 주제에서만 인문학을 접할 수 있습니다. 취준생들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다양한 분야를 얕게 다루고 있는 인문학 입문서를 꺼내 들게 되고 이에 발맞춘 출판사들이 마구잡이로 책을 찍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연예인이 주로 나오는 TV 프로그램에 강신주라는 대중 인문학자가 출연을 하고, 수많은 인문학 강연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지금은 말 그대로 ‘인문학 열풍’입니다. 하지만 이 열풍이 우리 삶에 스며들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학문의 수요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는 만큼 지금 우리 세상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졌나요?

인문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대학 인문학과에 학생들이 없어서 학과가 통폐합되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에 인문학 열풍이라는 일련의 신드롬이 저는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유명 강사의 인문학 강연이나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한 회사원들의 욕구로 인해 인문학자들의 인지도가 아주 미미하게 높아졌을 뿐이죠.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 인기입니다. 책 제목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듯 지금 독자들은 가벼운 책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책은 인문서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저런 지식을 엮어 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죠. 인문서적이라면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사색을 통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능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런 기능과 거리가 멉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문서적의 역할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기능도 하지 못하는 이 책을 과연 인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 책은 취업준비서라고 보는 게 적확해 보입니다.



트렌드만 좇을 수밖에 없는 출판 시장의 한계

출판 시장은 여전히 불황입니다. 날이 갈수록 문을 닫는 소규모 출판사들이 늘고 있습니다. 고급 인력이 능력을 발휘할 여건이 갖춰져 있을 리 만무합니다. 출판계에 뜻이 있고 능력이 있는 인재들이 발을 들이지 않으니 현재 우리나라의 출판 기획력은 처참한 수준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책의 60%는 번역서입니다. 그나마 나오는 책들의 저자도 이미 인지도가 높은 몇몇으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출판사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 불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참신한 기획이나 무명 저자를 발굴하기보다는 단기간의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괜히 인기 저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선인세 경쟁이 팽배한 게 아닙니다. 지금의 출판 생태계에서 새로운 저자를 발굴하고 재미는 없지만 깊이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은 상당히 무모한 도전입니다.



그러다 보니 출판계는 트렌드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콘텐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출판산업이 외부적 요인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죠. 통상 출판 기획력은 편집자 경력이 5년~10년 정도는 되어야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 출판 시장에서 이 정도 경력의 편집자는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벼운 인문서적이 인기를 얻으니 모두가 이런 인문서적만 내고 있습니다.



지적 대화 없는 인문학 열풍이 가능한가

누군가는 이제 세상이 변했으니 가벼운 인문서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말에 이렇게 대답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에 가 보세요. 지적인 대화가 들립니까?

시내의 카페엔 가벼운 수다밖에 들리지 않고, 대학가에는 취업을 위한 지식을 공유할 뿐입니다. 이런 대화라도 있으면 다행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깊은 지식은 둘째치고 '넓고 얕은 지식'조차 공유하는 이들이 없다시피 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가벼운 인문서적이 만든 인문학 열풍을 말하고 있습니까.



온라인은 더합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 조금만 깊게 들어가려고 하면 바로 이런 식의 차단이 들어옵니다.

X선비 납셨네!

조금이나마 진지한 대화를 하려는 사람을 '진지병' 걸린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기 일쑤죠. 진지한 대화를 불편해 하고 가벼운 것만을 추구하려고 하는데 인문학 열풍? 어불성설입니다. 적어도 인문학만을 보자면, 자신이 노력을 해서 지식을 습득하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가 떠 먹여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지대넓얕’과 같은 가벼운 책이 인기를 끄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문서적은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 냅니다. 책을 통해 얻은 질문을 타인과 주고 받으며 또 다른 가치를 접할 수 있게 합니다. 가벼운 인문서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대놓고 지식을 떠 먹여 주는 책에서 무슨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요? 잡식이 몇 개 느는 데 그치기만 하겠죠.

이 가벼운 인문서적들이 인문학의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좋은 역할을 한다면 나름 의미는 있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것조차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조금만 깊이 있게 들어가려고 해도 독자들이 이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해야 하고,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죠.



넓은 분야의 지식을 얕게 담은 인문서적을 읽으면 당장 스스로 똑똑해진 기분이 듭니다. 그 누구와도 대화를 술술 할 수 있을 것만 같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입니다. 이내 말문이 막히죠. 정보 전달을 목표로만 한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자 스스로 거기서 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수백 개씩 쏟아져 나오는 가십 기사를 읊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벼운 인문서적이 인기를 끈다고 이를 ‘인문학 열풍’이라 부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사색하지 않고, 사고를 확장시킬 수 없는 독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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