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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유령이 되진 않을 거야

  • 입력 2016.10.08 10:48
  • 수정 2016.11.15 15:42
  • 기자명 꿈꾸는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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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새벽 방황하는 이유는 시아버님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시부모님과 카카오톡을 하며 내 아들 건이의 일상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드리곤 하는데, 아버님이 문득 그런 말을 하신다.

“건이가 주인공이고 희광이는 건이한테 밀렸구나.”

나는 남편과 건이 둘 다 주인공이라고 답문을 드렸다. 그러자 아버님은 “자신도, 희광이도, 나조차도 건이를 위하여 완전히 희생되어야 한다. 주인공은 건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어떠한 답도 달지 못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거야. 그저 아이들에게 추억이 되면 돼.”라는 대사가 나온다. 쿠퍼가 머피를 설득하는 대목에서 죽은 아내의 말을 끄집어 낸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흘려보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나온 그 대목이 영화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맥이 되었고, 영화 내내 강렬한 부심에 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부모인 내가 유령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님의 말씀과 영화의 대사처럼 부모 역할이 되는 것이 희생이나 유령이 되는 것과 통하는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철이 덜 난 것인지, 아직도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 더 깊이, 더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아서 일지 모르겠다. 아니면 희생을 자처하는 것이 유전적 특질(유전적으로 이미 내재되어 있는 이타심의 뿌리)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행위일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수억 년을 답습한 유전적인 반복 행위 속에서 이타심을 통해 자신의 종족의 생존과 번식을 이루어낸 것처럼 그 흐름 속에 나를 맡기는 것도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부모이고 내가 희생을 하고 유령이 되어야 자식 또한 그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희생을 통해 딸은 지구를 구원할 메시지를 깨달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했듯, 자신의 자식을 향한 사랑을 이어나간다.

“아빠가 자식이 죽어가는 걸 볼 필요는 없어요. 가세요. 여기는 제 자식들이 있으니까요.”

주인공은 아버지를 향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라며 아버지의 안녕을 바라고 자기 자식들의 축복과 사랑 속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아직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다만 나를 찾고자 번뇌하는 시간에서 휩쓸리듯 나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문장들에 기대어 어렴풋하게 생각을 더듬어갈 뿐이다.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나'가 아닌 '내 유전자'가 내 생명의 주인이라는 최재천 교수(다윈 2.0)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희생은 예정된 부모의 필연적 역할인 듯도 싶다. 허나 자꾸만 과연 그럴까,하고 물음을 띄워보는 까닭은 나는 그러한 진리에서 자꾸 비껴나기를 자처하는 의식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심리일 수도 있겠다. 나의 몸은 완전체일지라도 의식은 유동적인, 즉 나는 아직 철이 덜 났어요,라는 식의 핑계를 대며 나와 나의 아이를 동일선상에서 같이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야만 내가 더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 위하여 어쩌면 건이가 선택하지도 않은, 가시밭이 도사리는 이 현실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위안의 장치를 마련하는 셈일 수도 있겠다.

나의 시부모님이 어떤 대가를 염두한 희생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들 자신도 지금껏 삼남매를 키워내느라 예측지 않았던 혹은 어쩔 수 없었던 희생을 하며 살아오셨다. 가난을 이겨내며 자신의 집을 제 손으로 세우고 텃밭을 일궈왔다. 설움 이기며 일을 한시도 쉬어보신 적이 없었다. 지금도 밭에서 키운 콩이며, 호박, 실파 한 뿌리도 자식에게 나누어 주시는 고운 분들이다. 나 또한 나의 부모와, 나의 할머니가 걸었던 우둘투툴한 흙길을 따라 걷고, 그 발자욱을 즈려밟아 지금의 넓고 반듯한 길을 따라 걷고 있다.

내가 과연 그런 삶을 이겨낼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아직도 우리가 불혹이 넘으면 10년간 세계여행을 떠나자고 얘기하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나의 아이에게도 그런 삶을 짐 지워야 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건이는 우리와 같은 곳을 보고 비슷한 보폭으로 함께 나갈 것이다. 물론 건이가 그러기를 원치 않는다면, 존중할 것이다. 우리의 희생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 속에서 건이 또한 그 나름의 조건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의 번뇌 속에서 나를 찾고자 갈구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자주 번뇌할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그러한 인간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유전자가 혹은 나의 이타심이 이미 그러하리라고 이야기하는 인간이란 종족의 생존 속에서 나는 아주 느리고도 천천히 길을 더듬으며 한발두발 놓아내릴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아이에게 완전한 엄마일 수도 없고, 완전체인 의식으로 아주 이성적으로 육아를 논하고, 내 아이의 미래를 전망하고 낙관하는 부모일 수도 없다. 나는 다만, 내가, 나의 길을, 나의 육체를 타넘으며 행하는 의식과 의지로 나의 아이 또한 그러할 수 있으리라고 혹은 그러지 못한다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낙관하며 삶을 행할 것이다.

나는 아버님의 말에 어떠한 답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길 말들에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희생하거나 유령임을 자처하는 순간, 나는 독립적으로 운행해야 할 건이의 별에 '어마무모하게' 파고들어 버릴는지도 모르겠다. 당장의 물음에 대한 답보다 그 두려움이 앞선다.

나는 그 별에서도 내가 주인공이 될 것임을 요구할 것이다. 어린왕자는 장미를 길들이기에 미성숙한 존재였고, 숱한 경험과 행성의 여행을 통해 답을 찾아내렸다. 나 또한 나의 삶을 통해 그 해답을 구해나갈 것이다. 나는 우리 건이와 함께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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