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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토가가 슬프다

  • 입력 2015.01.06 16:17
  • 수정 2015.01.06 18:27
  • 기자명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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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이 진행한 기획이었기에 가능했고, 그래서 더 파급력이 컸을 것이다. 아마 이 같은 기획을 다른 프로그램에서 했다고 해도 순간의 해프닝으로 기록됐거나 우스운 코미디로 전락했거나 식상한 신파로 끝이 났겠지. 잡지 일을 하다 보니 <무한도전> 제작진이 이 출연진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섭외했을 지 방송분 뒤에 가려진 수많은 비하인드 컷이 상상이 간다. 토토가 한 무대에 섰던 그 수많은 가수들은 당시 만만치 않은 자존심에 서로 말도 섞지 않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누가 더 잘나가나 못 나가나에 따라 서열이 구별되고 대접받는 바닥이다 보니 풀리지 않은 앙금들도 많았을 것이다. 또 사실 누가 알랴.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던 선남 선녀들이었는데 오다 가다 눈이 맞아 로맨스를 꽃 피운 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토토가의 엄청난 반향에 방송 2회분 중 1회분만이 방송을 마친 지난주부터 여러 일간지들은 사회학적인 분석을 내놓기 바쁘다.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가 관심을 받고 재조명되는 데에 걸리는 10년을 말하는 '10년 주기 문화설'을 인용하는 이들도 있고, 1990년대에 10대, 혹은 20대를 보낸 세대가 2014년과 2015년, 경제적 소비 주체인 30, 40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설명한 이들도 있더라.



하지만 난 토토가가 슬펐다.

나는 90년대에 10대를 보냈다. 새천년의 대책 없이 희망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여 결국 절망적으로 졸업을 한 밀레니엄 학번이다. 우리는 토토가에 등장한 가수를 통해 각자 자신만의 10대, 혹은 20대를 소환한다. 토토가에 등장한 가수들은 대한민국 30, 40대 개개인의 그 시절을 소환하는 데에 쓰인 훌륭한 도구가 됐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90년대가 아닌, 나의, 그리고 당신의 90년대. 우리는 토토가를 통해 각자의 90년대에 빠져들고 있다. 사람이란 동물은 어떠한 계기라는 것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자기 혼자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건 현실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현실의 자신이 '루저'이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동반하지만 대다수로 이뤄진 집단에 속해 함께 그 시절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데에 내가 동참하는 건 내가 '정상'이라는 걸 확인시켜준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과 공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큰 힘이다.

허나 나는 토토가가 슬프다. 토토가에 등장한 가수들의 무대가 이토록 벅차고 뜨겁고 뭉클한 건 이들이 더 이상 '현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등장한 가수들이 하나 같이 음악 활동을 지금까지 제대로 이어온 적이 없는 이들이다. 윤종신이 여기에 있나? 없다. 모두들 누구보다 뜨거운 90년대 전성기를 보냈지만 최근 음악 활동은 단절과 다름없는 긴 공백기를 보내온 이들이다.



유행가. 말 그대로 유행가를 부른 가수들이었다. 이 가수들은 90년대라는 맥락과 함께 소환되어야만 빛이 나는 이들이다. <무한도전>은 이걸 제대로 간파했다. <나는 가수다>가 저지른 실수도 여기에 있었다. 왕년에 전성기를 보낸, 하지만 지금은 젊고 새로운 이들에게 무대를 뺏긴 이들을 무대로 불러올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나가수>는 이들에게 다른 이의 곡을 맡겼다. 하지만 토토가 김건모의 무대를 보면 <무한도전>과 <나가수>의 센스 한 끗 차이가 눈에 띈다.

김건모는 90년대 가요계에 등장할 때에도 센세이션 했다. 그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가요 프로그램 무대에 오르려면 잘 생기거나 예뻐야 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김건모는 그 판을 뒤엎어버린 사람이었다. 외모도, 스타일도, 퍼포먼스나 무대 매너도, 목소리도, 창법도 이전엔 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잘못된 만남'이 처음 나왔을 때 그 때 당시의 기성세대들은 '이런 것도 노래냐?' 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어정쩡한 제스추어로 목을 비딱하게 꺾고서는, 그런 목소리로,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김건모가 유일했다. 대중문화계는 언뜻 보기엔 엄청나게 열려있고 유연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어디 보다 보수적이고 고루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런데 90년대는 오죽했겠는가.

김건모가 그 당시 인기 있었던 다른 가수들처럼 노래했다면? 그는 지금 토토가 무대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김건모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었고, 김건모만이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이 있었다. 자신에 맞는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흥했던 가수에게 <나가수>는 다른 이의 노래를 편곡해 부르는 미션을 줬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김건모에게 김건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를 줬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정말 중요한 철학이다. <무한도전>은 그 철학이 있었던 거고, <나가수>엔 그 철학이 없었던 것뿐인데 그 결과와 파급력은 천지차이다.




내가 토토가를 보다 불현듯 슬픔, 혹은 난처함, 혹은 비애를 느낀 건 관객들을 비추는 장면에서였다. 90년대 이들의 무대에 열광했던 건 그 당시 관객들의 선택이었을까. 그리고 토토가 무대에 올랐던 가수들이 '아, 더 이상 앨범을 내면, 활동을 하면 망하겠구나. 난 끝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 그들에게서 무대를 앗아간 건 바로 저 관객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제 내 젊은 날이 그립다며 그 기억을 소환한 무대를 마치 내일이 없을 것처럼 즐기는 저 관객들은, 대체 지금, 저 공연장 밖의 생활은 행복하기나 한 걸까. 왜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는 타이틀과 마음껏 춤추고 소리 지를 수 있는 권리를 맞바꿔야만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직업병인가 싶다. 아마 토토가는 끝나도 이대로 끝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당분간 우리는 또 그들을 마음껏 소비할 것이다. 몇몇 토크쇼나 예능, CF에 저 가수들이 등장하겠지. 그래서 실컷 90년대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미련의 단물을 빼먹고 나면 토토가 무대에 올랐던 가수들은 예전에 그랬듯 또 다시 그 관객들에 의해 무참히 버려질 것이다(문화를 향유한 이들은 책임을 질 줄도 알아야 한다는 순진한 생각이 아직, 나에겐 있다).

극명한 단절이 아직도 서슬 퍼런 대한민국의 현실을 나는 토토가를 보며 실감했다. 그래서 좀 슬프고 좀 무서웠다. 나야 감사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문화를 누리는 호사로운 직업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나 내 가까운 지인들만 봐도 30대 직장인이 제대로 음악 듣고, 공연을 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몇 세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그놈의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이유이자 핑계 때문이다.




가끔씩 음원사이트 실시간 차트를 보고 있으면 닭살이 돋을 때가 있다. 지금 이 시간, 대한민국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모두 똑같은 곡을 듣고 있단 말인가!!! 모두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춤을 추고 떼창을 하는 데에 한국인들은 심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설령 모든 사람들이 다 듣는 곡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면 'No'라고 외치고 내가 좋아하는 걸 들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건 자신이 뭘 좋아하는 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 조차 파악 못한 채 나이만 먹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엔 대부분이라는 거다. 자신의 취향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많이 사는 나라일수록 집단 단위로 쫓고 향유하는 문화가 판을 친다.

한국의 문화 씬은 90년대와 지금이 그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적인 면에선 같다.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분명 토토가가 막을 내린 이후, 오늘부터 한동안은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죄다 90년대 가요일 거다(심지어 오늘 홈쇼핑 채널 배경음악으로 SHARP의 'Tell Me Tell Me'가 나오더라). 90년대 유일한 즐길 거리였던 노래방이 다시 북적일 거고 시들해졌던 ‘밤과 음악사이’도 호황을 맞이하겠지. 토토가 무대에 올랐던 가수들이 잡지 화보에 주르륵 등장하겠지. 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나는 역시 슬프다. 분명 한국과 현실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해외에서는 90년대를 뒤흔들었던 가수들이 여전히 음악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전처럼 메가 히트까진 아니더라도 꾸준히 앨범을 내고 공연 활동을 지속하는 이들이 많다. 이건 중요한 의미다. 작게나마 뮤지션을 지지하는 팬들이 있고, 그들이 뮤지션과 함께 나이를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본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조차 사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10대, 20대가 오히려 문화에 돈을 잘 쓴다. 30, 40대 보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거둬 먹일 처자식이 없어서도 아니다. 적은 돈 쪼개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영화를 본다. 그게 설령 SNS에 친구들에게 허세 떨기 위한 목적이라고 해도 나는 차라리 그게 훨씬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기성세대에게 없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건가 따진다면 그건 바로 '열정'이다.

90년대 나는 광란의 10대를 보냈다. 그 당시 미성년자, 10대에겐 허락되지 않은 모든 걸 하며 살았다. 마치 스물이 되면 죽을 사람처럼. 그때 친구들과 어울리던 장소에서 가장 많이 들리고 불렸던 노래의 주인공들이 토토즐 무대 위에 있다. 그리고 나는 30대가 되었다. 나의 10대는 찬란하고 아름다웠지만 나는 지금의 내 현실 또한 찬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볼 때 감상에 빠지는 건 지금은 없는 희망이 그때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막연히 꿈꿨던 20년 후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자책,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에 대한 상실, 토토가의 무대엔 그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지금도 행복한 상태에서 또 다른 의미로 행복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찬미하는 것과 지금 자신의 행복이 결핍되었다는 피해의식에서 출발하는 지난날의 회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후자에게는 큰 후유증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후유증이 그 무대에 올랐던 가수들과 그 무대를 지켜보던 이들에게, 우리 사회에 역류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저 나는 우리가 파티처럼 지난날을 기념하고 되돌아보길 바랄 뿐이다. '그땐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이 아니라 '그땐 그랬지… 좋았지… 그런데 지금도 좋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하지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2015년을 30대, 40대로 살고 있는 이들이 지금보단 좀 더 행복해지길 바란다.

우리의 10대, 어땠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목청 터지게 불렀던 게 20여 년 전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에 나온 이미연의 눈빛을 나는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그렇게 10대를 보낸 우리들이 30대가 되어 대한민국의 허리가 되었을 땐 세상이 조금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주위 결혼한 친구들만 봐도 현실은 절망적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어린이집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컸기에 우리의 아이들은 그렇게 키우지 말아야지 했던 이들이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의 수백만 원 하는 어린이집 등록금을 위해 죽도록 일을 한다. 30대가 경제 소비의 주축이라고? 어떤 면에선 맞는 말이다. 무언갈 끊임없이 사제끼긴 하니 말이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아이를 위한 좋은 학원, 좋은 학교 등등 많은 것들에 돈을 쓰지만 정작 좋은 앨범, 좋은 공연 등등의 문화생활에는 돈을 쓰지 않는다. 끽 해야 가장 손쉬운 문화생활인 영화관에 가는 정도다. 이 또한 영화를 고를 때 박스오피스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긴 하지만. 토토즐 무대에 선 가수들의 커리어가 극단적으로 끊긴 이유도 이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지만 희망은 조심스레 가져본다. 아주 잠깐이라도 노래 한 곡이 주는 감동이 세상의 눈에 맞춰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팍팍한 인생에서 크게 와 닿았다면, 30대가 지탱하는 문화 신이 미약하게나마 형성되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엔터테인먼트는 이익을 추구하기에 돈이 되는 음악과 가수를 만들어 팔아야 하는데 음악으로부터 파생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건 10대들 뿐이니 한국 음악, 더 나아기 한국 문화는 죄다 10대의 시선에 맞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획일화된 아이들 일색인 거다. 그걸 방관한 건 지금의 30대들이다. 90년대 음악은 저렇게도 주옥같았는데 요즘 애들 음악은 말이 안 된다, 혀를 끌끌 찰 게 아니라 그렇게 손 놓고 지켜본, 현재까지 이어져 온 우리만의 무언가가 있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건 단 하나도 없는, 지금의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30대는 문화를 잃고 산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얻은 건 또 뭔가. 앞은 캄캄했으나 무모한 희망으로 가득했던 90년대의 10대를 지나 세계화와 경제 구조의 영화 같은 변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20대를 지나 벌써 70대 노인이나 된 듯 어깨 힘 쭉 빠져 살고 있는 지금의 30대들. 반항과 변화의 아이콘 'X 세대'가 무기력한 루저의 아이콘 '88만원 세대'라는 애틋한 경제적 애칭을 얻게 되기까지 지금의 30대는, 과연 우리는 뭘 얼마나 열정적으로 바꾸려 노력했나. 나는 그래서 토토가가 슬프다.

원문: 나는 토토가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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