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직썰] 장기 연체 탕감의 본질…‘면책’ 아닌 ‘복귀’
정부, 16조 장기 연체채권 직접 매입…이탈자 금융 이력 복구하는 ‘포용 설계’ 시동
| 우리 사회는 금융의 영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자금의 흐름에 따라 가정의 살림살이부터 기업의 흥망, 국가 경제의 성패까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금융권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를 소개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짚어보려 합니다. [편집자주] |
[직썰 / 안중열 기자] 정부가 이번 정책을 통해 지우려는 대상은 단순한 빚이 아니다. 되살리려는 방향은 금융 생태계 밖에 놓인 이들이 다시 제도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권리다. 총 143만명, 16조4000억원 규모의 장기 연체채권을 정부가 직접 사들여 소각하거나 재구조화하는 이례적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채무 감면이나 일회성 구제 조치가 아닌, 금융 시스템 내 회복 가능성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축이 이동했다. 선별 기준, 여신 심사 모델의 진화, 도덕적 해이 통제 장치, 신용평가 체계 개편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으며, 나아가 복귀 이후의 금융 설계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연체자의 구조적 복귀’를 공식화하는 첫 시도다. 다만 이 정책은 동시에 금융회사에 새로운 리스크 셈법과 신용공급 전략의 전환을 요구하며, 고위험군에 대한 여신 공급 위축이라는 역설도 안고 있다.
◇복귀 정책의 진화, 면책에서 구조 설계로
골자는 ‘면책’이 아니다. 오히려 복귀의 경로를 정책적으로 설계하고 구조화함으로써, 반복 가능한 회복 구조를 제도권 안에 정착시키는 데 있다. 19일 국무회의를 통해 확정된 2차 추경안에는 이재명 정부의 ‘특별 채무조정 패키지’가 포함됐다. 캠코가 장기 연체채권을 직접 매입하고, 채무조정까지 수행하는 방식이다.
핵심 대상은 7년 이상 장기 연체된 무담보 개인 채권 가운데 5000만원 이하 소액 채무다. 기존에는 신용회복위원회가 금융사에 자율적 조정을 유도하는 방식이었으나, 이번에는 정부가 직접 채권자 지위를 인수한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정리의 목적이 자산 회수가 아닌 정책 효과 구현에 있기 때문이다.
캠코의 역할 역시 바뀌고 있다. 기존의 ‘채권 회수 전문기관’에서 벗어나, 회복 경로를 정책적으로 설계·중개하는 복귀 설계 허브로 기능 확장이 이뤄지고 있다. ‘재량’이 아닌 ‘구조 설계’로서의 복귀, 금융 포용을 위한 제도적 인프라화가 시도되는 것이다.
◇반복 가능한 회복 구조, 금융 생태계 다시 엮는다
단순한 구제책이 아니다. 금융 생태계 안에서 ‘회복 가능한 구조’를 공식화하려는 시도다. 기존에는 연체 이후 사실상 금융 생애가 종료되는 구조였으나, 이번에는 ‘성실한 회복 이력’이 다시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정책 경로로 작동한다.
회생 가능성에 따라 채권을 감면하거나 소각하고, 이후 상환 과정에서의 태도와 지속성은 신용점수에 반영된다. 과거처럼 연체 기록이 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복 이력이 가산 요소로 작용하도록 시스템이 개편되는 셈이다. 금융 접근권이 박탈되는 게 아니라, 성실하게 회복한 이력자에겐 재진입 경로가 열리는 구조다.
결과적으로, 복귀 정책은 개인 단위 구제를 넘어 금융 시스템 내의 순환성과 복원력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연체자를 ‘리스크’가 아닌 ‘회복 가능성’으로 재해석하는 정책적 전환이다.
◇조건부 설계, 무조건 탕감은 없다
제도는 철저히 선별적이다. 보편 구제가 아닌 선택적 복귀 설계라는 점에서 도덕적 해이 방지 기제가 구조적으로 포함돼 있다. 신청 자격은 중위소득 60% 이하이며, 처분 가능한 실질 자산이 없는 개인만 해당된다. 반복 신청, 재산 은닉, 명의 분산 등은 신청 단계에서부터 실시간 탐지 기술로 걸러낸다.
신복위, 캠코, 금융회사, 법원 간 정보를 연계 분석해 부정 신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다. 정부는 “복귀 의지가 명확하고 성실 이력이 입증 가능한 대상만 제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더불어 상환 성실도에 따라 금리 인하, 정책금융 우선 대상 지정 등 긍정적 인센티브도 함께 부여된다.
결국 이번 정책은 ‘무조건 면책’이 아니라 ‘조건부 복귀 설계’다. 이는 채무자의 책임을 전제로 하되, 회복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설계해 금융이 다시 작동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다.
◇금융사의 변화, 신용평가와 회계 셈법 도입
정부의 직접 개입은 금융사에도 변화를 요구한다. 채권 매각 기준이 구체화되면서, 금융사는 부실채권을 조기에 정리하고 회계상 손실을 미리 반영할 수 있다. 이는 새 국제회계기준(IFRS9)에 따라 손실 인식 시점을 앞당기는 것이며, 금융사의 재무 건전성에 일정 부분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부 기준이 명확하면 손실 처리나 자산 정리 측면에서 판단이 쉬워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향후 고위험군에 대한 여신 공급은 더욱 보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며 리스크 회피 구조의 고착화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는 회복자 대상 여신 공급에 대해 정책금융 우선권, 감독평가 가점 등의 유인책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신용정보 체계도 개편된다. 과거의 ‘불이행 중심’ 신용평가에서 탈피해, 회복 경로에 나타난 행동 데이터를 반영하는 이력 기반 모델로 전환된다.
예컨대 24개월 중 20개월 이상 성실 상환한 경우, 신용 점수에 15점을 가산하는 방식이다. 한 여신평가 관계자는 “신용이력을 ‘낙인’이 아니라 ‘회복 가능한 이력’으로 바꾸는 철학적 전환”이라고 평가했다.
◇캠코의 전환, 복귀 설계 허브로
캠코의 조직적 전환도 주목된다. 단순 채권 회수기관이라는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제도권 복귀 설계의 주관기관으로서 기능을 확장하고 있다. 단순 매입·소각을 넘어서, 여신 재설계, 신복위 연계, 복지기관과의 협업 등 다양한 파트너십을 통해 금융 복귀 플랫폼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캠코 관계자는 “과거에는 캠코가 금융사가 포기한 채권을 정리하는 데 그쳤지만, 지금은 연체자 복귀 설계를 직접 설계·관리하는 공공 플랫폼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밝혔다. 궁극적으로는 캠코가 사각지대 금융 회복 경로를 복수로 설계하는 ‘복귀 설계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기회와 통제 사이, 정책 설계의 역설
정책은 ‘복귀’라는 기회를 열지만, 동시에 통제와 기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반복된 구조화와 고위험 회귀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제도권 밖 금융 이탈자에게 다시 문을 여는 포용 설계는 장기적으로는 금융 생태계의 안정성과 복원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신용 리스크를 다시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균형 잡힌 정책 설계가 필수적이다.
복귀 가능한 금융은 곧 설계 가능한 금융이어야 한다. 설계는 기회의 확대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통제와 검증을 내포해야 한다. 복귀 체계가 단순히 일회적 면책의 끝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제도화의 출발점으로 기능하려면 ▲신뢰 가능한 데이터 기반 알고리즘 ▲복귀 경로의 투명성과 이력 관리 체계 ▲금융사에 부여되는 명확한 인센티브 정합성 등 세 가지 조건이 부합돼야 한다. 그리고 ‘위험’이 아닌 ‘설계된 가능성’으로 금융시장에서 수용되는 연체자의 복귀도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