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의 기술] ③기관은 사는데 우리는 왜 못사나?

개인 채권투자, ‘정보’보다 ‘참여 구조’가 먼저 바뀌어야

2025-05-26     안중열 기자
채권은 금융의 언어이고, 금리는 그 문법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익숙한 개인에게 채권은 여전히 낯선 자산이다. 그러나 경제 흐름과 자산시장의 방향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채권부터 이해해야 한다. 채권은 단순히 이자를 받는 수단이 아니다. 경제의 맥박을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직관적인 도구다. 이 시리즈는 채권의 기초부터 실전 전략까지, 시장을 해석하는 감각을 키우는 길잡이다. [편집자주]
[그래픽=안중열 기자]

[직썰 / 안중열 기자] 채권 시장은 겉보기에 정보 싸움처럼 보인다. 수익률 지표와 신용등급 분석이 넘쳐나면서, 투자 성패는 정보의 정교함에 달린 듯하다. 하지만 진짜 승부는 다른 데 있다. 정보는 흘러나오지만, 협상 테이블은 비어 있다. 기관은 가격을 만들고, 개인은 정해진 메뉴판을 받아들일 뿐이다. 같은 시장에서 전혀 다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정보의 양이 아니라 시장 구조의 재설계다. 개인이 ‘알 권리’를 넘어 ‘참여할 권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보는 무기가 아니라 방패에 그친다. 진짜 투자자가 되려면 구조를 먼저 이해하고, 그 구조를 바꾸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소비자는 ‘받아들이는 자’, 참여자는 ‘형성하는 자’

국내 채권시장은 태생부터 기관 중심이다. 대부분의 채권이 거래소가 아닌 장외시장(OTC)에서 전화·메신저·단말기 등을 통한 협의 방식으로 거래된다. 실시간 가격 정보는 공유되지 않고, 거래 조건도 종목마다 제각각이다. 거래 단위는 수천만~수억원. 개인에게는 물리적으로 진입이 어렵다.

최근에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나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를 통해 소액 채권 거래도 가능해졌지만, 이는 ‘참여’라기보다 ‘소비’에 가깝다. 매물은 대부분 증권사 보유 물량이며, 가격은 내부 기준에 따라 고정된다. 실시간 호가도 없고, 경쟁 매도 구조도 없다. 거래의 ‘과정’은 닫혀 있고, 개인은 ‘결과’만 받아 든다.

예컨대, 동일한 회사채가 기관에는 98.50원에 매도되지만, 개인에게는 99.10원에 제공되는 사례가 존재한다. 정보는 같아도 가격은 다르다.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결과다. 한 자본시장 전문 변호사는 “기관의 지배력이 유지된 채 개인에게 정보만 늘어나면, 오히려 수익률 착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소비자’는 정해진 조건을 수용하는 존재다. 반면 ‘참여자’는 가격 형성과 매물 선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구조는 개인을 소비자로만 머무르게 만든다.

◇수익률 수치는 ‘신호’가 아니라 ‘환상’일 수 있다

채권 투자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지표는 ‘만기수익률(YTM)’이다. 그러나 YTM은 수많은 가정을 전제로 한 이론값이다. 세전 기준으로 계산되며, 이자소득세(15.4%), 매매 수수료, 자본차익 과세 등은 반영되지 않는다. 실현 수익률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또한 채권 가격은 시장금리 변동에 민감하다. 듀레이션 리스크까지 고려하면 단순 수치 해석은 오히려 투자 판단을 흐릴 수 있다. 같은 신용등급이라도 산업 전망이나 유동성 상황에 따라 신용 스프레드는 달라진다. 시장은 이를 통해 위험을 선반영한다.

한국은행 채권시장팀 관계자는 “YTM 수치보다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형성됐는지를 읽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숫자를 읽는 눈보다 시장 구조와 심리를 해석하는 능력이 본질이다.

◇TRACE, 개인에게 ‘가격 협상권’을 준 제도

미국은 정보 공개를 넘어 시장 구조 자체를 개방해 개인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대표 사례가 TRACE(Trade Reporting and Compliance Engine)다. 미국 장외 채권 거래는 TRACE를 통해 15분 이내에 거래 가격·수량·거래 주체가 실시간으로 공개된다.

기관이 독점하던 정보가 개인에게도 개방되면서, 단순 데이터가 아닌 실시간 흐름과 가격 판단의 근거가 된다. ‘가격 협상 테이블에 앉을 권리’를 제도화한 셈이다.

유럽의 MTS, 일본의 JGB 소액 채권 플랫폼도 유사하다. 핵심은 ‘정보의 평등한 공유’가 아닌 ‘거래 기회의 평등한 접근’이다. 정보보다 구조, 양보다 권한이 본질이다.

[그래픽=안중열 기자]

◇한국형 TRACE, 왜 어려운가

국내에서도 TRACE 도입 논의는 있었다. 한국거래소는 ‘K-Bond’ 플랫폼을 시범 운영했고, 일부 증권사는 개인 대상 채권 중개 플랫폼을 개발했다. 그러나 대부분 정체됐다.

가장 큰 장애물은 금융투자업계의 기득권이다. 일부 대형 증권사와 기관투자자들은 장외 비공식 거래를 통해 차익을 실현하는 구조에 익숙하고, 거래 투명화는 기존 수익 모델의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독당국의 소극적 태도도 한계다. 실시간 공시와 전자 플랫폼 구축에는 기술과 규제 개편이 병행돼야 한다. 그러나 당국은 ‘시장 왜곡’ 우려를 이유로 선뜻 나서지 않는다. “개인의 참여는 긍정적이지만, 시장 안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플랫폼·핀테크, 대안이 될 수 있나

직접 투자가 어려운 구조에서 개인은 ETF나 채권형 펀드 등 간접 방식으로 우회한다. 최근에는 핀테크 기업들이 맞춤형 큐레이션 플랫폼을 내놓고 있으나, 실질적인 가격 협상력은 없다. 증권사 내부 가격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한계를 넘기 어렵다.

이제는 ▲장외 거래의 실시간 공시 의무화 ▲기관 전용이 아닌 다자간 호가 기반 플랫폼 도입 ▲거래 단위 축소와 다양한 매물 유통 ▲매매차익 비과세 구간 신설 등 제도 개편이 병행돼야 한다.

구조가 바뀌어야 개인은 정보 소비자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가 된다. 참여할 수 있어야 분석과 전략도 작동한다.

◇실전 전략은 ‘구조 이해’에서 출발한다

참여 가능한 구조 위에서 실질적인 전략이 작동한다. 예컨대 ‘신용 스프레드’와 ‘등급 시차’를 활용한 전략이 있다. 시장은 등급보다 먼저 반응하므로, 스프레드 급등은 등급 강등을, 급락은 상향 기대를 반영한다. 이를 통해 선제적 매수·매도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공시 자료, 산업 리서치, 유동성 흐름 등 시장 전체를 읽는 시야가 있어야 가능하다. 단순 수치 비교로는 얻을 수 없는 관점이다. 무엇보다 협상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전략은 작동하지 않는다.

◇정보는 무기가 아니다…진짜 열쇠는 ‘권한’

정보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은 정보가 아닌 ‘권한’으로 움직인다. 지금의 개인 채권투자는 정해진 가격을 받아들이는 ‘소비’에 불과하다. 진짜 투자자가 되려면 가격 협상과 매물 선택의 권한이 먼저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데이터를 읽는 데 익숙해졌지만, 협상 테이블엔 앉지 못했다. 지금 채권 시장이 개인에게 필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그 자리가 마련돼야 전략이 작동하고, 비로소 투자라는 행위가 완성된다. 지금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