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직썰] 예적금 쏠림, 금융 디플레이션 부르다

있는 돈도 막히는 한국경제, 안전한 선택이 만든 그림자

2025-05-21     안중열 기자

우리 사회는 금융의 영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자금의 흐름에 따라 가정의 살림살이부터 기업의 흥망, 국가 경제의 성패까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금융권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를 소개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짚어보려 합니다. [편집자주]

[그래픽=안중열 기자]

[직썰 / 안중열 기자] 고금리 시대, 시중 자금이 ‘움직이기를 멈췄다’. 돈은 넘치는데, 일하지 않는다. 은행 창구 앞에는 특판 소식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고, 금융사는 수신고를 쌓지만, 자금은 실물경제로 흐르지 않는다. 지금 벌어지는 ‘예적금 쏠림’은 단순한 안전 추구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 자체가 자산을 멈추게 만든 구조적 결과다.

◇고금리와 금융 규제가 만든 ‘자산 정지 시스템’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3월 기준 국내 은행의 정기예·적금 잔액이 1400조원을 넘어서고, 특판예금은 출시 즉시 마감된다. 자산이 예적금에만 몰리는 현상은 단순한 소비자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반복된 금융사고, 불완전판매, 정책 혼선이 금융 신뢰를 갉아먹었고, 금융회사는 단기 예대마진 중심의 수익 모델에 갇혀 있다.

한 시중은행 리스크관리본부 관계자는 “지금 금융 시스템은 자산을 정지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돼 있다”며 “고객은 위험을 피하려 하고, 금융사는 건전성 규제를 이유로 대출보다는 수신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제결제은행(BIS) 비율과 건전성 규제가 강화되면서 금융사들은 자산을 ‘흐르게’ 하기보다 ‘쌓아두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결과, 자산은 정체되고 실물경제와의 연결은 약화된다.

한 자본시장 전문변호사는 “자산이 예적금에만 고여 있으면 경제 전체의 동맥경화가 생긴다”며 “금융기관의 성과는 수익률이 아니라 자산 순환 기여도로 측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금융당국 내부에서도 기업대출의 일자리 창출 효과, 지역 자금 공급 기여도 등 ‘자산 순환 지표’를 정량화하려는 논의가 시작됐다. ‘획일적인 예금자 보호 제도 역시 생산적 금융을 유도할 수 있도록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자산이 흐르지 않으면, 실물도 멈춘다

자산은 쌓이지만, 실물경제로는 흐르지 않는다. 기업은 설비·인재 투자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고, 가계는 소비보다 이자수익에 의존한다.

“최근 1년간 투자 유치가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기술력을 평가받기보다 ‘리스크가 있느냐’만 따지는 분위기죠.”

A 스타트업 대표(IT 플랫폼 분야)의 푸념이지만, 이는 단지 한 기업의 사정이 아니다. 벤처캐피털 업계에 따르면 2024년 민간 벤처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40% 이상 감소했다. 자산이 흐르지 않는 구조는 곧 ‘금융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물가 하락이 아닌, 금융 시스템 내에서 자산이 실물경제로 이동하지 못하는 구조적 정지 상태를 의미한다.

자본시장 전문가들 역시 같은 맥락으로 “자산이 특정 층에만 머무르고 유통되지 않으면 결국 실물경제는 고사한다”며 시간이 갈수록 격차는 커지고, 사회는 경직된다”고 우려했다. 청년층은 금융 접근성 부족으로 자산 형성 경로에서 배제되고 있으며, 지방경제는 리스크 회피 중심의 금융 관행에 발이 묶여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되풀이할 것인가

1990년대 일본은 부동산·주식 버블 붕괴 이후 자산 보존 중심의 금융 구조로 재편됐다. 그 결과, 국채 중심 자산운용이 민간 부문의 활력을 떨어뜨렸고, 기술혁신과 창업 생태계는 30년간 정체됐다.

지금 한국 금융의 구조를 보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닮은 점이 많다. 민간 활력보다 자산 보존을 우선시하는 체계가 고착화되고 있으며,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고 자산 불평등도 심화되고 있다. 예대율 하락과 중소기업 대출 축소는 이러한 구조 전환의 신호다.

정상적인 흐름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금융의 재사회화’, 즉 국가 주도의 자금 공급이 아닌, 금융사의 자발적인 자산 순환 노력이 요구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금 필요한 건 금리 조정이 아니라 자산의 재설계”라며 “자금이 어디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계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금융기관이 공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금융의 본질은 자산의 ‘흐름 설계’

금융기관의 성과는 수익률이 아니라, 자산을 실물경제에 어떻게 연결했는지로 측정돼야 한다. 이에 따라, 금융회사들이 공급한 자금의 실물경제 파급 효과를 수치화하고 이를 감독평가나 연례보고서에 반영하는 제도가 논의되고 있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금융, 청년층 지원 상품, 기술금융 연계 펀드 등도 포함된다.

금융을 단순한 위험 회피 수단이 아닌 사회적 가치 창출의 도구로 활용하자는 관점은 임팩트 투자자들과 사회혁신가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한 사회투자플랫폼 관계자는 “금융은 위험 회피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기회를 설계하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예적금이 자산의 종착점이었다면, 앞으로는 생산적 연결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상품 역시 기업 대출, 인프라 투자, 지역 재생 등 실물경제와의 연계성을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

◇멈춘 자산, 사라지는 기회

지금 한국 사회는 자산이 쌓이지만, 그것이 흐르지 않는 기형적 금융 구조에 갇혀 있다. 돈은 있지만, 돈이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겉보기에 안정적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실물경제 침체와 미래세대의 기회 단절이라는 비용이 숨어 있다.

자산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설계하는 것이 금융의 본질이다. 이제는 금리가 아니라 자산 흐름 설계다. 유동성 공급이 아니라 유동성 재배치, 위험 회피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위험 분산이 핵심이다.

흐르는 자산만이 살아 있는 경제를 만든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돈이 있는 곳’이 아니라, ‘돈이 움직이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