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직썰] 겉만 번쩍, 속은 부실…보험 디지털 혁신의 착시

속도 경쟁이 키운 통합 실패, 데이터 부실, 보안 리스크

2025-04-21     안중열 기자
우리 사회는 금융의 영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자금의 흐름에 따라 가정의 살림살이부터 기업의 흥망, 국가 경제의 성패까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금융권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를 소개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짚어보려 합니다. [편집자주]
[연합뉴스]

[직썰 / 안중열 기자] 국내 보험업계가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계약 체결부터 유지, 보상까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모바일 플랫폼을 잇따라 도입하며  ‘혁신’을 외치지만, 이면에는 풀지 못한 고질병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표면 아래 가라앉은 구조적 한계. 과연 이 혁신은 진짜일까, 아니면 착시일까.

◇속도는 빨랐지만, 깊이는 얕았다

삼성생명은 AI 언더라이팅으로 보험 심사 시간을 30분 이내로 단축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고위험군 리스크 관리에서는 허점을 드러냈다. 빠른 심사는 때로는 ‘도박’이 된다. 심사 속도를 높이고 고위험 정밀심사 시스템을 고도화해야 한다.

한화생명은 헬스케어 플랫폼으로 고객 접점을 넓혔다. 그러나 독립 수익 모델이 부재해 실질적 수익 창출에는 실패했다. 플랫폼은 커졌지만, 콘텐츠와 서비스는 여전히 얕다. “껍데기만 화려하다”는 업계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플랫폼 경쟁력을 키우려면 수익모델 구축과 콘텐츠 강화가 시급하다.

교보생명은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했지만 품질 관리와 분석 정밀성에서는 약점을 드러냈다. 부정확한 분석은 마케팅 실패와 고객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데이터 품질 관리와 분석 고도화 없이는 리스크를 줄일 수 없다.

DB손해보험은 모바일 청구를 도입했지만, 중대질병이나 복잡한 사고는 여전히 수작업에 의존한다. 복잡한 서류, 다양한 의료용어, 사기 방지 필요성 등이 자동화를 가로막고 있다. AI문서 해석기술, 의료 서류표준화, 하이브리드 심사체계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

KB라이프생명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보험 가입, 계약 조회, 보험금 청구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고객 맞춤형 설계 능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찾기 어렵다. 다양한 상품뿐 아니라 맞춤 설계 역량까지 투명하게 제시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간 강조해온 초개인화에 성공한 신한라이프는 오히려 지나친 세분화로 고객 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 초개인화는 세밀함만이 아니라 명확한 안내와 지원이 동반될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 고객이 니즈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공통된 구조적 함정…통합 실패, 데이터 부실, 개인정보 리스크

속도전의 그림자에는 업계 공통의 치명적 함정이 숨어 있다.

먼저 레거시 시스템 개선과 신기술의 통합에 실패했다. 낡은 오프라인 인프라 위에 디지털 솔루션을 억지로 얹은 결과, 고객 여정은 끊기고 서비스 일관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백엔드(Backhand) 혁신 없이 ‘사용자 경험(UX)’만 바꾸는 ‘메이크업 디지털화’가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다.

데이터 품질과 표준화 수준도 턱없이 낮다. 고립되고 오염된 데이터가 난무하고, 수집-정제-활용 전 과정의 체계적 관리가 부재하다. 독일 알리안츠(Allianz)는 70개국 데이터를 통합해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했지만, 국내 보험사들은 여전히 데이터 사일로(Silo)에 갇혀 있다.

개인정보 보호 리스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디지털화 심화로 개인정보 유출·남용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됐다. 캐나다 선라이프(Sun Life)는 실시간 고객 통제 시스템으로 신뢰를 높였지만, 국내 보험사들은 여전히 선언적 구호에 머무르고 있다.

저출생 여파는 보험업계의 시장 확대를 가로막는 장벽이다. 사진은 지난 12월 25일 시민들로 붐비는 서울 마포구 홍대 거리. [연합뉴스]

◇보험업계 디지털 혁신, 정부·당국 역할 대전환이 열쇠

보험업계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진정한 혁신 완성을 위해서는 정부와 금융당국의 역할 대전환이 필수적이다.

우선 규제 샌드박스 활성화가 핵심이다. 신기술 테스트 환경을 열어야 한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의 규제 샌드박스 모델은 글로벌 모범 사례다. 유연한 규제가 혁신 기업 성장을 견인한다.

데이터 개방과 표준화도 필요하다. 고객 데이터 이동권을 보장하고, 오픈 인슈어런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유럽연합(EU)이 결제산업에 적용한 지급결제서비스지침(PSD2) 지침을 보험업계로 확장하는 모델과 닮아 있다. 보험상품 비교와 맞춤형 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지면서 소비자 편익이 급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센티브 기반 혁신 정책도 요구된다. 디지털 혁신 성공 기업에 세제 혜택과 공인 인증을 부여해 시장 신뢰를 높이고, 지속적 투자와 모범 사례 확산을 유도해야 한다.

백엔드 리스크 감독체계도 강화해야 한다. 클라우드 보안, 데이터 주권 보호, 알고리즘 편향성 감시 등 고도화된 기술에 맞는 정교한 리스크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디지털 전환은 민간 기업 노력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면서 “정부와 금융당국이 혁신적 촉진자 역할로 대전환하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백엔드 혁신 없이 보험업계 생존 없다

디지털 전환의 승패는 ‘얼마나 빠르게’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에 달려 있다.

오픈 인슈어런스는 그 핵심이다. 데이터 표준화, ‘응용 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 모듈화, 보안 강화, 파트너 생태계 설계까지 백엔드 전면 혁신이 선결 과제다.

백엔드 혁신이 지연되면 가입·청구 지연, 불완전 판매, 과잉 보장, 소비자 선택권 제한, 사고처리 불편이 급격히 확산될 수 있다. 보험 스트레스가 생활화되는 시대, 그 결과는 시장 신뢰 붕괴로 직결된다.

보험업계가 선택할 시간은 많지 않다. 이제는 겉치레가 아닌, 진짜 혁신을 보여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