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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 목숨보다 군 사기 챙긴 전두환 “공수부대 기죽이지 말라”

  • 입력 2020.05.27 14:22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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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시민들은 항쟁 기간 다섯 차례에 걸쳐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어 의지를 다졌다.

1980년 5월 27일, 신군부 수뇌부가 투입한 계엄군은 광주 재진입 작전을 펼쳐 시민들의 항전을 제압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47개 대대 2만 317명으로 편성한 계엄군이 5개 방면을 통해 광주로 일제히 진입한 이 작전의 계엄군 측 공식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이었다.

일요일인 5월 18일, 학생 시위대와 7공수 부대의 충돌로 시작된 시위는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과 비무장 시민을 향한 발포로 다수의 시민이 사망하면서 자위를 위한 항쟁으로 이어졌다. 무장한 시민들이 항전을 시작하자 광주 시내 주요 시설에 배치된 계엄군은 5월 21일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계엄군이 물러나자 시민수습위원회가 구성돼 22일, 정부에 사태 수습을 위한 협상을 요청했다. 전투교육사령관 소준열이 계엄사령관과의 협의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협상을 거부했지만, 시내에서는 무기 회수 작업이 시작됐고 시민들은 자체 방범 활동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 광주민중항쟁은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군인들이 강제 진압함으로써 촉발됐다.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의 탱크가 광주 시내로 진출하기 시작하자 시민 수습위원들은 탱크 앞으로 ‘죽음의 행진’을 시작해 탱크 진입을 막았다. 계엄군 측에서는 27일 새벽부터 작전이 수행된다고 경고했다.

전두환 “공수부대의 기를 죽이지 마시오”

계엄사(사령관 육참총장 이희성)에서 광주 재진입 작전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5월 23일부터였다. 이희성은 2군사령관 진종채로부터 광주 상황을 보고받고 특전사령관 정호용과 함께 작전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논의한 뒤 25일 이후 작전을 개시하도록 결정했다.

23일 전두환은 정호용을 통해 소준열에게 “공수부대의 기를 죽이지 마시오. 희생이 따르더라도 광주사태를 조기에 수습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이 포함된 친필 메모를 전달했다. 시민의 안위보다 휘하 공수부대 병사들의 사기가 중요했던 전두환은 항쟁에 대한 강경한 진압을 주문한 것이었다.

5월 25일, 이희성은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 작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해 육본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을 만들었다. 같은 날 12시 15분, 국방부 내 육군회관에서 전두환, 주영복(국방장관), 이희성, 황영시(육군 참모차장), 노태우(수도경비사령관), 류병현(합참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상무충정작전을 5월 27일 0시 이후 시행하기로 했다.

▲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도청 앞 광장 ⓒ5·18재단

5월 26일 오전, 정호용은 전두환을 찾아 작전 내용을 보고하고 재진입 작전에 필요한 가발, 군복을 지원받았다. 오후 두 시께 그는 이희성을 방문해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지원받고 장비를 가지고 밤 9시에 광주비행장에 도착, 예하 부대원을 격려함으로써 재진입 작전 준비를 마쳤다.

26일 오후, 광주시민은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학생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투쟁위는 계엄군의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시민군은 여자와 중학생 등을 대피시킨 뒤, 157명만이 도청에 남아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했다.

5월 27일은 화요일이었고 날씨는 맑았다. 새벽 3시, 계엄군의 탱크가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시민군 측에서는 도청에서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대학생의 옥외방송을 내보냈다.

▲ 계엄군이 장악한 뒤의 도청 앞 광장 ⓒ5·18 재단

4시께, 계엄군은 도청 주변을 완전포위해 금남로에서 시가전을 전개했고, 4시 10분부터는 계엄군 특공대가 도청 안 시민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5시 10분이 됐을 때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 작전을 종료했다. (이상 5·18기념재단 5·18 타임라인)

47개 대대 2만 317명으로 편성된 계엄군은 5월 27일 새벽에 5개 방면을 통해 일제히 광주로 진입했다. 계엄군은 각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해 전남도청 등 목표지점을 점령하도록 했다. 3공수여단 특공조인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오전 4시께 전남도청에 도착, 후문을 넘어 도청을 지키고 있던 무장 시민군에 총격을 가하면서 진입해 5시 21분께 도청을 점령했다.

7공수여단 특공조인 33대대 8, 9지역대 6개 중대 장교 20명, 사병 181명은 5시 6분 광주공원에 들어갔다. 11공수여단 특공조인 61대대 4중대 장교 4명, 사병 33명은 4시 46분 제1 목표인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에 저항 없이 들어갔고 이어 6시 20분 총격전 끝에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을 점령했다. (이상 <위키백과>)

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가 재개됐지만…

오전 6시,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는 선무방송을 실시했다. 7시에는 작전에 참여한 3공수, 7공수, 11공수 부대가 20사단 병력에 도청을 인계하고 이동했다.

▲ 광주 시내전화는 5월 27일 9시께에 재개됐다.

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가 재개됐다. 그날 오후에 계엄군은 첫 발표에서는 시민 2명과 군인 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곧 도청에서 13명, 광주공원에서 2명, YWCA에서 2명 등, 광주시민 17명이 사망했다고 정정 발표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작전 중 사망한 시민군의 수는 18명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고교생, 검정고시생, 중학생 등 18세 미만의 희생자도 5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2001년에는 신원 불상으로 분류됐다가 신원이 밝혀진 고등학생을 포함해 이날 공식 희생자 수는 28명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5·18 광주항쟁의 실종자 의혹은 아직도 제기되고 있어 실제 희생과 정부 공식 발표 사이의 거리는 여전한 좁혀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계엄군의 재진입 작전으로 열흘 동안 이어졌던 광주민중항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항쟁의 끝이었을 뿐이었다. 이후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은 5·18 특별법 제정,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수감으로까지 이어졌으나 여전히 길 위에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이름을 간신히 얻었으나 아직도 항쟁을 ‘광주사태’로 부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40년이 됐지만, 일부 국민의 인식은 법과 제도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2월에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 규명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골자로 하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이 40년 전의 비극의 얼개와 진실을 얼마만큼이나 밝혀낼 수 있을지 기대되는 이유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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