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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오늘, 체르노빌에서 최악의 방사능 사고가 터졌다

  • 입력 2017.04.26 11:00
  • 수정 2020.04.24 15:30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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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북쪽 104km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되는 세계 최대의 재앙, 체르노빌 참사(Chernobyl disaster)가 일어났다.

사고는 비상 발전 전원이 들어오기 전까지 터빈의 관성력으로 얼마만큼 발전이 가능한지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던 중 발생했다. 부하 검사를 위해 안전 시스템을 해제한 상태였고, 원자로 자체의 설계 결함과 조작자의 제어봉 조작 실수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체르노빌, 최악의 방사능 유출 사고

출력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열에너지가 원자로 내부의 냉각수를 모두 기화시켰다. 이어 증기의 압력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압력을 견디지 못한 반응로가 폭발했다. 이 폭발은 철과 콘크리트로 된 노심을 파괴하여 반응로를 대기에 직접 노출시켰다. 이후 반응로가 2차 폭발하면서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을 파괴했다.

두 차례 폭발로 원자로 내부의 연료 중 일부가 파편화되어 주변 지역으로 즉시 누출됐다. 감속재로 노심에 있던 흑연도 일부 방출되면서 4호기의 반응로와 천장, 그리고 3호기 건물의 30개소 이상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1986년 최악의 참사가 일어난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북쪽,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도시다.

사고가 일어나면서 4호기에서 근무하고 있던 순환펌프 기사 발레리 호뎀추크는 즉사했고, 자동제어시스템 기술자인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전신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사고 당일 사망했다. 이밖에도 발전소 직원 중 물리학자 이반 오를로프를 포함한 3명이 폭발로 인한 방사선에 노출돼 사망했다. 그날 '운 좋게도' 살아남은 해당 실험의 총책임자인 아나톨리 다틀로프는 사건 발생 9년 후인 1995년에 죽었다.

폭발·방사능 피폭으로 희생자는 1만5천여 명

화재 진압과 초기 대응 과정에서 발전소 직원과 소방대원 등을 포함해 약 1100명의 인원이 투입됐는데, 이들 중 237명이 급성 방사능 피폭 증상을 보였다. 이 가운데 134명이 급성 방사능 피폭으로 확진됐고, 28명은 사고 후 수개월 이내에 사망했다. 이후 발생한 사망자를 포함해, 2006년 우크라이나 정부는 모두 56명이 초기 대응 과정의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한 것으로 집계했다.

체르노빌 참사에 대한 공식 통계에서는 전체 사망자를 4365명으로 밝혔으나, 비공식 통계에서는 1만5천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엔의 추정 사망자 숫자는 더욱 많다. 최소 900만 명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망자뿐만 아니라 간접 피해는 훨씬 크고 광범위했다.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 방사능 처리 작업에 투입된 22만 6천 명의 작업자들은 모두 방사능에 피폭됐다. 사망과 방사능 피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이들 중 2만5천 명이 사망했다.

▲체르노빌 발전소 현장에서 작업반이 오염을 제거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피폭자도 적지 않았다.

주변 지역의 방사능 오염도 심각했다. 사고 당시 발생한 낙진은 유럽 전체에 걸쳐 19만㎢를 오염시켰고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세 나라의 오염 규모는 15만㎢에 이르렀다.

그중 벨라루스는 전 국토의 22%, 우크라이나는 삼림의 400%가 방사능에 오염됐다. 방사능 낙진은 주변 3국뿐만 아니라 서유럽은 물론, 스칸디나비아 반도,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오염 지역에 있었던 일부 아이들도 방사능에 피폭되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아이들의 갑상선 암 발병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995년 세계보건기구(WTO)는 아이와 젊은 청년층에서 발생한 700건 가까운 갑상선 암이 체르노빌 사고와 관련이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주변 지역만의 피해는 아니었다. 누출된 방사성 물질 중, 세슘과 아이오딘 등의 일부 방사성 원소는 대기권으로 방출되어 사고가 일어난 후 며칠간 북반구 전역을 떠돌았다. 이들은 대기권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지구 생태계를 오염시켰음이 작물과 토양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했다.

언제나 사고는 은폐됐다

당시 소련 정부는 사고가 일어난 사실을 즉시 공개하지 않았다. 사고 이후 스웨덴과 핀란드, 덴마크 등에서 전례 없는 방사능 수치가 검출되자 스웨덴 정부는 소련 정부에 해명을 요구했고 소련은 이틀 뒤에야 사고 발생 사실을 인정했다.

소련이 사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에서는 사고 규모와 사망자 수에 대한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때 소련이 스웨덴 정부 등에 화재 진화를 위한 소방관 파견과 방사능 오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의료 지원 등을 요청하게 되면서 사고의 규모가 알려졌다. 소련은 결국 5월 6일에 이르러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본격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체르노빌과 가까운 벡라루스 내의 접근제한구역의 입구.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남아 있는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은 1987년까지 계속됐다. 그 와중에 운전을 중단했던 나머지 원자로 3기가 운전을 재개했다. 원자로 1호기는 1986년 10월, 원자로 2호기는 11월, 사고가 일어난 4호기와 인접한 3호기마저 1987년 운전을 재개했다.

유령 도시가 된 프리피야트

우크라이나 북부의 도시 프리피야트는 한때 '꿈의 도시'로 불리었다. 원전 노동자들을 위한 계획 도시이다 보니 신식 문물과 서비스가 많았다. 그러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인구 4만의 도시는 황량한 숲과 떠나지 못한 동물들만 있는 유령의 도시로 전락했다.

▲원전 노동자를 위해 건설된 도시 프리피야트는 유령의 도시가 됐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최악의 원전사고에도 불구하고 운전을 계속했던 체르노빌의 나머지 3개의 원자로는 1991년과 1996년에 각각 2호기와 1호기를 퇴역시켰고 2000년에 마지막으로 남은 3호기의 가동을 중단했다. 현재 발전소 시설은 2065년까지 4호기 폐로 등 원자로를 불능화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체르노빌의 길은 멀기만 하다. 석관(sarcophagus)으로 원자로를 봉안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응급 처치일 뿐이다. 연간 4천㎘ 가까운 빗물이 석관 안에 흘러 들어가고 있어, 원자로 내부를 지나 방사능을 주변 토양에 확산시키고 있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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