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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그날,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규탄하던 시민 186명이 사망했다

  • 입력 2020.04.20 14:47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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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은 화요일이었다. 전날, 평화적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고려대학생들이 경찰과 공모한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로 다친 뒤라 분위기는 잔뜩 격앙돼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나둘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섰고 이내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 사망 186명, 부상 6026명

▲ 혁명은 4월 18일, 고대생 피습사건을 계기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타도'로 바뀌고 있었다.

애당초 ‘부정선거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외쳤던 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는 경찰의 폭력 진압 앞에서 질적 변화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의 구호는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주의 수호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우와 애국가를 부르며 달려가는 젊은 학생들의 대열에 하나둘 시민들도 합류했고, 서울 시내는 온통 민주 수호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열로 뒤덮였다. 경무대로 나아가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의 공방은 점차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시위대를 막던 경찰의 1차 저지선은 잔뜩 고양된 학생과 시민들 앞에서 이내 무너졌고, 시위대는 경찰의 최후 저지선인 경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소방차를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m로 좁혀졌을 때, 실탄을 장전한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경무대에서의 발포를 비롯해 서울 시내 곳곳에서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숱한 학생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청년단 본부와 왜곡 보도를 일삼은 신문사를 불태웠으며, 시위를 진압하려 출동한 소방차를 빼앗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시위를 한층 격렬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불길을 댕긴 실마리는 전날인 4월 18일, 청계천 4가에서 벌어진 테러였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인 후 고려대생들이 귀갓길에서였다. 경찰의 비호 속에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로 학생 수십 명이 다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계엄군이 출동했지만, 군은 엄정 중립을 지키면서 치안 유지와 유혈사태 방지에 힘썼다. 시위대가 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있다.

▲ 교수단 시위 이후에는 4·19 때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도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의 평화 시위마저 폭력으로 진압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마침내 임계점에 이르렀다. 이 고대생 피습 사건은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시위목적도 ‘부정선거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하게 한 변곡점이었다.

서울 시내가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이날 오후 3시, 서울 일원에 이어 유혈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계엄령을 선포했다. 밤늦게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진 시위는 계엄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일단 가라앉았다. 계엄군은 중립을 선언하고 소극적으로 시위진압에 임했고, 유혈사태 방지와 치안 유지, 혼란 수습 등에 치중했다.

이날 하루 동안의 시위로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했고, 6026명이 부상했다.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 부르는 이유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시작된 학생시위는 마침내 그 비등점에서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혁명의 시발점, 2.28 대구 학생 시위

사월혁명은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된 고교생들의 부정선거규탄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은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학생들을 등교시켰다. 공휴일에 학교에 불려 나온 학생들은 영화관람과 토끼사냥 등에 동원됐다.

그 전날, 학교의 의도를 간파한 경북고·대구고·사대부고 학생 8명은 부당한 등교 지시에 항의하고자 시위를 조직하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행진하며 벌인 시위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1200여 명으로 늘어났고,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한 경찰은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했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시위는 보름 뒤 정·부통령 선거일에 자행된 부정선거로 다시 불이 붙었다. 선거는 이승만(1875~1965)의 장기집권과 유고 시 뒤를 이을 부통령 후보 이기붕(1896~1960)의 승리를 위해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는 ▲ 3~5명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원에게 검사받는 3인조, 5인조 공개 투표, ▲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 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에게 위협을 주고, ▲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 유권자 조작, ▲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등 부정과 폭력이 난무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대구에서 타오른 불길은 이은 곳은 마산이었다.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자, 이승만정권은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마산에서는 만여 명이 넘는 시위대에 경찰이 총격을 가하자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했다.

▲ 미제 최루탄에 눈에 박힌 채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

3·15 시위에 대한 국회 조사단은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 해산이 아닌 살상 목적으로 자행된 것을 밝혀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시위가 ‘공산당의 사주’로 벌어진 일인 양 주장했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게 아니”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주열의 희생과 교수단 시위 이후 이승만 하야

국회 조사 등으로 진정된 시위는 3·15 시위에 참여한 학생 김주열(1944~1960) 군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눈에 미제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마산 시민은 물론, 전국에서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4월 19일의 시위와 항거는 2·28이래 이어져 온 일련의 저항을 매듭짓는 항거의 정점이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자유당 정권은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민심은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는 4월 25일에 일어났다. 전국의 대학교수 대표들이 모여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하는 요지의 14개 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을 전하는 5월 29일 자 경향신문 기사. 그는 5년 후 망명지에서 죽었다.

이어서 교수 4백여 명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적인 시위를 시작,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이 4·25 교수단 시위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의 궐기로 이어졌다. (관련 글: 미완의 혁명과 ‘노래’들)

4월 26일, 서울 시내엔 경계태세가 삼엄했지만, 시위대의 규모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교수단 시위 이후 국민의 요구는 이승만의 하야로 정리됐다. 4·19 때 경찰의 발포로 친구를 잃은 초등학교 학생도 어깨동무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은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지만, 엄정중립의 입장을 지켜 더는 국민의 희생을 초래하지 않았다. 달리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당일 오후 4시에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4.19가 ‘미완의 혁명’인 이유

이승만의 하야 후 허정 내각 수반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했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끈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된 이유다. 4·19는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로 불리다가 문민정부 때가 되어서야 ‘혁명’이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당시 한국 상황은 “이승만정권의 권력 구조와 정치의식 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시위 학생과 시위군중들은 “조직화 된 지도력”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하”였지만, 이는 “이승만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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