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12·12 쿠데타 40년, 끝나지 않은 전두환의 단죄

  • 입력 2019.12.11 17:56
  • 기자명 낮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12·12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온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해 자행되며 헌정 질서를 무참히 파괴했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 안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소장)은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대령),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대령)에게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오후 7시에 허삼수와 우경윤은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소속 병력 50명을 총장 공관에 투입했다. 헌병들은 총장 공관을 지키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했다. 이 과정에서 헌병대 사병 1명이 총상을 입고 숨졌다. 7시 21분, 두 장교는 정승화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대통령 재가 없는 육참총장 연행, 하극상의 극치

7시 30분께, 전두환은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중장)과 육군 1군단장 황영시(중장)와 함께 다시 총리공관을 찾았다. 전두환은 대통령 최규하에게 정 총장의 연행과 조사를 재가해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최규하는 다시 이를 거절했으나 이미 신군부의 작전은 속속 진행되고 있었다. 내연하고 있던 신군부의 군권 장악 음모가 마침내 군사반란으로 실행된 것이었다.

별 두 개짜리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의 재가 없이 병력을 동원해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4성 장군을 총격전 끝에 체포 연행했다. 그것은 상명하복의 군대 조직에서 있을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이 하극상은 군사반란 기간 내내 당연한 것처럼 자행됐다.

▲ 12월 13일 낮에 광화문에 주둔하고 있는 쿠데타군들. 이 쿠데타로 신군부는 군 인사권을 장악했다.

상황을 파악한 군 지휘체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3군사령관 이건영(중장),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소장) 등은 육군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 복귀를 주장했다. 이에 신군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해 연행했다. (관련 글 : 12·12 쿠데타, 그리고 30년…)

특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하극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3공수특전여단의 대대장(중령)들은 3여단 영내에 있는 특전사 본부 건물을 장악한 뒤 특전사령관을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 사령관 부관이었던 김오랑 소령이 사살됐다.

이들 영관급 장교들은 장군 전용 지프에 달린 별판을 군홧발로 짓밟아 떼어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자신의 직속 부하들에게 체포 연행됐다가 강제 예편됐던 정병주 장군은 끝내 신군부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은거하다가 198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나회 회원이던 박희도(준장)가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준장)이 지휘하던 3공수특전여단, 그리고 장기오(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은 서울로 출동했다. 또한,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소장)는 전방을 지키던 9사단 29연대를 빼내어 중앙청 앞에 집결시켰다.

1공수특전여단은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한 뒤 곧장 서울로 달려갔다. 이들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국방부 50헌병대 경비병력으로 근무하던 사병 1명을 사살한 후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이들은 국방부 청사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 그를 대통령 최규하에게 끌고 갔다.

▲ 쿠데타 후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 12월 14일 보안사령부에서 찍은 기념사진

전두환은 노재현을 앞세워 다시 최규하에게 육참총장 체포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구했다. 결국,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5시에 사후 재가가 이뤄졌다. 오후에 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루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관련 일부 장성을 구속했으며,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육군 대장이 임명됐다고 발표했다.

전두환 신군부 군권 장악하다

결국, 전두환은 자신의 의도대로 군권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은 사실상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는 등 군 인사권을 장악하고, 박정희의 유고로 빚어진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로 떠올랐다. (관련 글: 1979년 오늘-중앙정보부장은 절대권력의 심장을 쏘았다)

10·26 이후 전개된 합동수사본부 수사를 통해 정승화 총장의 무혐의가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대통령 재가 없이 계엄사령관을 전격 연행한 군사반란을 감행한 것은 일종의 선제공격이었다. 전두환은 육참총장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을 동해경비 사령관으로 전보하는 ‘인사 조치안’을 실행하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출신 고급장교들의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권력을 좇던 일부 정치군인들이 벌인 군권 장악과 숙군 쿠데타였다. 이후 이들 신군부는 이듬해 5·17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신군부의 실세 전두환은 1980년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한 달 후 11대 대통령이 됐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부분이다. 광주학살로 권력 찬탈에 성공한 전두환의 공포정치 속에서도 개헌과 민주화에 대중의 열망과 투쟁은 1987년 6월항쟁을 끌어냈다. 이어진 개헌과 선거 국면에서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실패함으로써 군부의 집권이 이어진 것은 그 시대 우리 역량의 한계였다.

3당 합당으로 집권당 후보가 된 김영삼이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해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이의 단죄에 들어갔다. 그러나 검찰은 1994년 12·12가 군사반란이긴 하지만 국내 혼란이 우려된다며 이를 기소 유예 처분했다.

▲ 법정의 12·12 쿠데타의 주범들. 전두환, 노태우는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특별사면됐다.

헌법재판소도 이 기소 유예 처분 취소 청구에 대하여 각하, 기각 결정을 내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그것은 기득권 세력의 역사 청산에 대한 저들의 일관된 논리였다. 이후 국회에서 5·18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결국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핵심은 내란 혐의(5·18)와 반란 혐의(12·12)로 구속기소됐다.

이들은 1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으로 감경되었고 이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그러나 1997년 대선 다음 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2월 22일 김영삼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 사면했다.

외견상 이들 신군부의 쿠데타는 마무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단죄는 형식상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형사 처벌을 받으면서 이들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지만, 아직도 이들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권위와 특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 쿠데타에 대한 단죄는 끝났는가

박근혜 정부 후반에 전두환에 미납 추징금 50%를 환수하는 데 19년이나 걸린 것은 그 좋은 예다. 전두환이 자신이 가진 돈이 29만 원에 불과하다고 강변한 것은 이 웃지 못할 희극의 절정이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해 퇴임한 이들을 일러 ‘단군 이래 최악의 도적’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 사회 일부의 평가일 뿐이다.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여전히 ‘각하’고 각하로서 영예와 존경을 받기도 한다. 전두환은 자신의 출신 고교 동문회에서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후배들의 큰절을 받고, 일선 군부대 지휘관으로부터도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각하로 칭송된다.

육군 야전부대는 역대 부대장 사진을 부대 현관에 걸어놓는 게 관례인데 단 한 사람,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만 예외다. 대법원이 반란수괴, 내란 목적 살인 등을 저지른 것으로 판결한 전두환·노태우의 사진은 그들이 거쳐 간 부대에 봉황문양 표지와 함께 걸려 있다. 이들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던 자들의 사진도 다 걸려 있다.

이런 상황을 일러 ‘육군이 역사를 인식하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 중 하나’(<경향신문> 박성진)라고 하지만 그게 어찌 육군에 그치겠는가. 여전히 전두환을 ‘전통’으로 부르면서 그의 철권통치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고 이들에 의해 광주항쟁이 여전히 ‘사태’로 불리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전두환 근황

ⓒ연합뉴스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지난해 5월 재판에 넘겨진 뒤 건강상의 이유로 한때 법원에 불출석했던 전두환이 ‘건강하게’ 골프를 치는 모습이 공개됐다.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가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전두환은 강원도의 한 골프장에서 건장한 모습으로 골프를 치고 있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며 공판에 불출석하고 있는 그는 의사소통도 자유로웠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제 진압의 책임과 발포 명령도 부정했다. 미납 추징금과 체납 세금의 납부 의사를 묻자 임 대표에게 대신 내달라고 답하기도 했다.

당일, 그의 경호에는 4명의 경찰이 동원됐다.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됐지만, 대통령경호법에 따라 경호 인력을 지원받는 것이다. 이 법은 전직 대통령의 경호를 최장 15년까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그 이후에는 경찰 직무집행법에 따라 경호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여전히 제대로 된 단죄는 멀기만 하다.

직썰 필진 낮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