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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이 국군의 주역이 되지 못한 이유

  • 입력 2019.09.18 15:55
  • 수정 2021.03.06 13:48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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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의 한중 대표들의 기념촬영. 중앙에 김구 주석 왼편에 총사령 지청천 장군(1940.09.17. 충칭)

▲ 광복군 성립전례식 방명록의 서명. 중국 홍군의 주은래의 서명도 보인다.

▲ 광복군 문장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 전례가 거행됐다. 그로써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21년 만에 임정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통해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천명했다.

비록 타국에서 세운 임시정부였지만, 임정은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해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에 따라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한 바 있었다. 임정은 1919년 말 상하이에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해 군사 간부를 양성하고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관리하려고 했지만, 이는 지역적 차이와 재정의 어려움 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윤봉길 의거(1932)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김구는 1934년에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해 군사 간부를 양성했다. 또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도 우리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임정의 광복군 창설 계획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이미 세워졌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가 전황에 따라 피난처를 전전하는 상황에서 이는 뜻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래 임시정부가 창사에서 광저우·루저우·치장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게 된 것은 1940년 9월이었다. 김구 주석은 중국 정부의 중앙당부 당국자와 교섭해 「한국광복군 조직계획안」을 보냈다.

“이에 계획서를 작성하여, 광복군(즉 한국 국군) 결성을 허락해 주는 것이 3천만 한족(韓族)의 총동원 요소임을 설명하여 장개석 장군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즉시로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에 임명하고, 미주·하와이 동포들이 원조한 3~4만 원 등 모든 역량을 다하여 중경 가릉빈관에서 중국·서양 인사를 초청하고 우리 한인을 총동원하여 광복군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 김구, 『백범일지』 하권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중에서

광복군은 총사령 지청천(1888~1957) 장군 아래 이범석(1900~1972)을 참모장으로 모두 4개 지대로 편성했다. 이때 광복군은 병력과 부대 편제를 갖추지 못해 중경에서 동원 가능한 30여 명으로 총사령부만을 구성했다.

▲ 광복군 제3지대 성립경축전례촬영(1945.06.30.)

▲ 광복군 사열식 ⓒ한중문화협회

광복군 총사령부는 이어 병력을 모집하는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를 설치해 산시·쑤이위안·저장·안후이성 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거기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공작을 전개했다. 그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광복군에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요구했다. 이는 중국이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는 조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 광복군은 중국군 참모 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통수권을 갖는다(제1·2항)

② 광복군은 한국이나 한국 변경에 근접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반드시 중국군과 연합해서 행동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광복군의 중국 내 군사 훈련은 해당 지역의 중국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제3·9항)

③ 중일전쟁 종결 이전에는 설혹 광복군이 한국 내로 진격하여 들어간다 하더라도 별도의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한다(제8항)

④ 중일전쟁이 끝난 뒤 광복군이 한국 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 안에 있을 경우 광복군의 운영 문제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정책에 의해 처리한다(제9항)

준승에 따르면 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돼 인사·경리·훈련·공작 등 모든 사항에서 중국군의 명령과 지배를 받아야 했다. 특히 8항과 9항은 모욕적인 조항으로 중국 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광복군의 작전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준승의 접수 여부를 두고 임정과 광복군 간부들은 의논이 들끓었으나 불합리한 조건은 뒷날에 시정하기로 하고 우선 접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의 편제는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과 재무과장은 중국인, 고급참모 최용덕, 한인 참모장 왕일서(김홍일의 중국식 이름), 제1지대장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로 이뤄졌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1942년 4월 20일 임정 국무회의에서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합편하기로 결의했고 5월에 약산 김원봉(1898~?)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하기로 결정됐다.

창설 초기부터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 활동에 주력한 광복군은 한국청년훈련반·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설치해 모집해온 한인 청년들에게 일정 기간 군사 훈련을 받게 한 뒤 광복군으로 편입했다.

중국 정부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던 광복군의 재정은 광복군을 유지하는데도 부족했다. 중국이 재정 원조의 대가로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으로 광복군 활동을 규제하자 임시의정원에서는 9개준승 폐기 문제가 제기됐다.

▲ 훈련 중인 광복군 ⓒ우리역사넷

▲ 훈련을 마친 제2지대 대원들이 공작임무를 띠고 과업완수를 위해 선서하는모습 ⓒ한중문화협회

이 문제로 임정과 중국군사위원회 사이에 오랜 협상이 전개된 결과 1945년 4월 4일 양국 사이의 새로운 군사 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체결됐다. 협정은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에 있으며 재정 원조는 차관으로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무르익어 가면서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 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한국인 포로를 대상으로 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 설치, 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한편,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돼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 훈련을 시행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44년 ‘조선인 학도육군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가 시행되면서 4,385명의 한국 청년이 일본군에 편입돼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됐는데 이들 중 일부가 탈출해 광복군으로 넘어왔다.

안후이성 푸양에 있던 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 도착한 탈출 학병들 가운데 50명은 1945년 1월 말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애국가를 부르며 충칭에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장준하(1915~1975)와 김준엽(1920~2011)도 포함돼 있었다.

광복군과 OSS는 특수 훈련 문제를 협의해 제2지대와 제3지대를 중심으로 특수 공작훈련을 시행했다. 그 뒤 1945년 8월 4일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친 제1기생들이 배출됐다.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이른바 ‘국내 진공 작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됐다.

임정은 광복군 창설 이듬해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해 “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다”라고 하는 자주독립 노선을 내외에 천명하고 조국 광복 실천의 3단계를 제시한 바 있었다. 1기는 대적혈전기, 2기는 국토 일부를 회복해 임시정부가 국내로 이전한 시기, 3기는 국토를 완전탈환하여 복국을 완성하는 시기였다.

강령 실천을 위해서는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실현돼야만 하는데 실현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으므로 전후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 임시정부의 발언권도 없어진 것이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김구 주석이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백범일지)이라고 기술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 광복군 인면전구 공작대9명.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 미얀마전선에 투입되어 2년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한국광복군은 1943년 8월 인도에 파견돼 영국군대에 합류해 임팔(Impal, 북동 인도 마니푸르주의 주도) 전선과 버마 탈환 작전에 참여, 최전선에서 대일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만 2년 동안 임무를 수행한 이들 인면(인도·미안마)전구 공작대는 1945년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복귀했다. 비록 9명에 불과했지만, 광복군의 활동이 인도·버마 전선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점, 광복군이 연합군과 합작해 직접 대일전쟁에 참전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일본 항복 이후 광복군은 중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온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군정 당국은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무장 해제 상태로 귀국해야 했던 광복군은 미 군정의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으로 해산했고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 5월 중국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백선엽 등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인맥이 중심인 남조선 국방경비대로부터 비롯한 국군의 주축이 될 수는 없었다. 또 육군사관학교도 미 군정이 군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가 모태였다.

군사영어학교는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 가운데서 각 20명을 뽑을 예정이었으나 광복군 계열이 명분이 없다며 지원을 꺼리면서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채워졌다.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의 장성이 23명에 이르지만[아래 표 참조], 최용덕과 김신이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것을 빼면 육군에서는 단 한 명의 참모총장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에 비기면 일본군 출신은 정일권, 박정희 등 다섯 명의 대장과 여섯 명의 육참총장, 네 명의 공참총장을 배출했다.

우리 광복군의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가 국군·육군사관학교와 단절된 연유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육사도 그 뿌리를 독립운동에서 찾기 시작했다. 육사는 자신의 모체로 신흥무관학교를 언급했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독립군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을 제작해, 육사에 설치하기도 했다.

현행 국군의 날은 육군 제3사단이 휴전선을 돌파해 북진한 1950년 10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사단장은 일본 육사 출신의 정일권과 이종찬이었다. 현행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군 일(9월 17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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