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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처단 실패’ 후 형장의 이슬 된 조선 청년

  • 입력 2019.09.14 15:12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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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의사의 거사를 보도한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1909. 12. 23.)

1910년 9월 13일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이재명(李在明, 1887~1910) 의사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순국했다. 1년 전(1909) 12월 그는 이완용을 찔렀지만 실패해 체포됐고 1910년 5월 일제의 법정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칼끝에서 살아남은 이완용은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 관저에서 매국 문서(한일합병조약안)에 서명했고 합병은 일주일 후 발효됐다.

이재명은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어릴 때 평양으로 이주해 개신교계 사립학교인 일신학교를 졸업했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이민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로 가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재명, ‘국적 이완용’을 찌르다

을사늑약(1905)과 한일신협약(1907)이 체결된 뒤 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의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하고 그해 10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중국과 노령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제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들을 처단할 동지를 규합하고 때를 기다렸다.

1909년 1월 순종 황제의 서도(평안도) 순시 때 이토 히로부미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을 처단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함께 평양역에서 대기했다. 그러나 거사는 안창호의 만류로 중지되고 말았다. 도산은 이토가 제 신변의 위험을 염려해 순종 곁을 떠나지 않으니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 발포를 말린 것이었다.

▲ 이재명 (1887~1910) ⓒ 독립기념관

그러나 이재명은 이토 처단에 대한 뜻을 꺾지 않았다. 그는 동지 김병록(1884~?, 1963 독립장)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들보다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 데 앞장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먼저 처단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9년 11월 하순, 이재명과 동지들은 평양 경흥학교 안 야학당에서 이들 매국적에 대한 처단 계획을 확정했다. 이완용의 처단은 그와 이동수(1883~1944, 1963 독립장)·김병록이 맡고 김정익(1891~?, 1962 독립장)과 조창호(1881~1936, 1963 독립장)는 일진회의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했다.

거사를 준비하던 중 신문 보도로 이완용을 비롯한 국적들이 12월 23일 오전 종현 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았다. 12월 23일 오전 11시 30분께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이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그의 앞을 지나갈 때 이재명은 비수를 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지하려는 인력거꾼을 한칼에 제압한 다음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혼이 나간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떨어지자 그는 이완용을 타고 앉아 어깨 등을 사정없이 난자했다.

▲ 경술국적 이완용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했고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그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순사의 군도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이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유유자적하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빌려 태웠다고 한다.

그를 가로막은 인력거꾼 박원문은 절명했으며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는 등 치명상을 입었으나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의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거사 소식은 이내 전국에 알려졌다. 두 달 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소식에 쾌재를 불렀던 사람들은 이재명의 실패한 의거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구례의 선비 매천 황현(1855~1910)은 이 거사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23일(음력 10월 11일 정사)에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찔렀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이재명은 평양 사람으로, 이때 나이 21세였다. 6년 전 미국에 유학 갔다가 돌아온 뒤로 언제나 국치를 생각하며 분을 풀지 못했다. 이때 합병론이 일어나자 탄식하며 말했다.

“이용구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뒤에 다시 말했다.

“화의 근원은 이완용이다.”(후략)

- <매천야록> 제6권 중에서

일찍이 백범 김구는 이재명이란 젊은이가 총을 쏘고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실은 이완용을 죽이겠다는 자신을 아내가 만류하자 이재명이 나라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이었다.

이재명을 만나보고 그를 ‘시세의 격변 때문에 헛된 열정에 들뜬 청년’으로 보았던 백범 김구와 노백린은 그를 설득해 후일을 도모하자며 총과 칼을 맡아뒀다. 그러나 이재명의 의거 소식을 들은 뒤 백범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뉘가 알았으랴., 그가 며칠 후 경성 이현(泥峴)에서 군밤 장수로 가장하고서 충천하는 의기를 품고 이완용(李完用)을 저격하여 조선 천지를 진동하게 할 이재명 의사인 줄을. 그는 먼저 인력거를 끄는 차부(車夫)를 죽이고 이완용의 생명은 다 빼앗지 못하고 체포되어 순국하였던 것이다.

(중략)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 <백범일지> 상권 중에서

이재명은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 박원문 살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지방재판소의 공판 중에 그는 방청석을 향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부르짖었다.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 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또 재판장이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2천만 민족이다”라고 대답하자 창밖에서 “옳다!”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다. 그는 재판장에게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하고 호령하기도 했다.

▲ 명동성당 입구에 세워진 의거 터 표석

▲ 이재명 의사가 거사한 의거 터. 명동성당 입구다. ⓒ독립기념관

1910년 5월 18일 이재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그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재판장을 꾸짖었다.

불꽃 같은 생애, 광복의 밑거름이 되다

의거에 동참한 동지들 가운데 조창호·이동수·김정익 등은 징역 15년, 김병록은 징역 10년, 나머지 동지들에겐 징역 1년 6개월에서 징역 7년까지를 선고받았다. 이재명에 대한 사형은 1910년 9월 13일에 집행되었다. 향년 23세, 짧았지만 불꽃 같은 생애였다.

망국민의 삶은 애국과 매국의 선택에서 극단으로 엇갈렸다. 이재명의 칼끝에서 살아남은 이완용은 피습 이후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하고 그 매국의 상급으로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20년 후작에 올라 안락하게 살다가 1926년에 69세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한국사에서 추악한 매국노로만 기억될 뿐이다.

1962년 정부에서는 이재명 의사의 공훈과 희생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 의사는 2001년 12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9년 서울시에서 의거 현장인 명동성당 입구 쪽에 의거 터 표석을 세웠다.

이재명 의거는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장인환·전명운 의거(1908)를 이은 의열투쟁이었다. (관련 글: 샌프란시스코의 총성, ‘의열투쟁’의 첫 장을 열다) 이후, 의열투쟁은 대한광복회(1915), 의열단(1919), 한인애국단(1931) 등 눈부신 성과를 내면서 이어졌고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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