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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이력' 때문에 수백년 산 것 같은 이 남자

  • 입력 2019.09.11 15:34
  • 수정 2020.08.30 01:33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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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8월 8일에 타계한 일서 김홍일의 묘는 서울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2묘역에 있다. ⓒ두피디아

일본과 싸웠던 김홍일 장군 떠나다

1980년 8월 8일 중국군 제19사단장 대리와 광복군 참모장으로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일본과 싸웠던 일서 김홍일(1898~1980) 장군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해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으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으로 일본과 싸웠고 뒷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했던 이였다. 향년 82세.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그는 군 역사상 처음으로 장군(준장)으로 임관해 육군사관학교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1주일간 방어하고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탈환작전에 이르기까지 세운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김홍일은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다. 본관은 김해, 호는 일서, 별명은 최세평, 중국식 이름으로 왕웅·왕일서·왕부고 등 여럿을 썼다. 이는 그가 독립군과 중국군을 넘나들며 일제와 싸운 이력의 흔적들이다.

일찍이 15세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 봉천에 있는 중국소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 18세에 정주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재직 중 오산동문회가 항일단체로 몰려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군관학교 나와 독립군 가담

상하이에서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강무당(군관학교)를 졸업해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된 뒤 바로 한국독립군에 가담했다. 그는 무관학교의 생도대장·교관·중대장·대대장, 독립군의용군단 대장(1921), 조선의용군 부사령관(1923) 등을 거치면서 일본군 소탕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헤이허사변으로 독립군이 참변을 겪은 데 큰 충격을 받고 1926년 장제스의 북벌 작전에 중국국민혁명군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국민혁명군에서 총사령부 병기감, 상해병공창 군기처 주임, 육해공군 총사령부 군기처장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장교로 있으면서 김구의 뜻에 따라 한인애국단의 거사에 비밀작전 참모로서 크게 활약했다.

▲ 윤봉길 의거 때 폭탄 제조와 교섭을 맡은 중국인 왕백수(왼쪽), 김구와 함께 한 김홍일

“나는 돈을 준비하는 이외에 폭탄 두 개를 구입하였다. 하나는 왕웅(王雄)을 시켜서 병공창(兵工廠)에서 구입하였고 다른 하나는 김현(金鉉)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劉峙)에게서 구입하여 몰래 감추어 두게 하였다. 하나는 일본 천황을 폭살하는 데,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중략…]

나는 죽시 서문로(西門路)의 왕웅(김홍일) 군을 방문하고 상해 병공창장 송식표(宋式驫)에게 교섭하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어깨에 메는 물통과 도시락을 사서 보낼 터이니, 속에 폭탄을 장치하여 3일 이내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 김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백범일지>(돌베개, 2014) 중에서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기술한 두 의거의 전개 과정에 등장하는 왕웅이 곧 김홍일로 그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여러 변성명을 사용했다. 이봉창의 거사는 일왕 히로히토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윤봉길의 대의거는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를 비롯한 10여 명의 일본 요인을 살상하는 등 일제에 비상한 타격을 가했다.

김구의 한인애국단 비밀참모로 윤봉길 의거 지원

중국군 상해병공창 주임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19로군 후방 정보국장을 겸임하며 일본 해군기함 이즈모호의 폭파와 일본군 무기창고 폭파계획도 아울러 진행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홍일은 1937년 동로군사령부 참모를 비롯해 집단군 참모처장·사단장, 병단 참모장, 청년군사령부 부참모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939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중앙군 소장(한국군 편제로 준장)에 이르렀고 1943년에는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1945년 5월에 중국군 중장(소장)으로 승진될 때까지 김홍일은 20여 년 간 항일전은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적극 지원했다.

“그리하여 총사령부를 중경에 설치하고,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중국인, 재무과장 중국인, 고급참모 최용덕, 한인참모장 왕일서(王逸曙), 제1지대장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3지대장 김학규를 임명하였다.”

- 김구, ‘해방 전후의 대륙’, <백범일지>(돌베개, 2014) 중에서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한인 참모장이 됐다. (당시 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돼 있어서 주요 부서 간부도 중국군을 두고 중국군의 명령과 지배를 받아야 했다.) 김구가 임명한 한인 참모장 왕일서가 바로 변성명한 김홍일이었다.

해방된 1945년 12월 김홍일은 중국 동북보안사령장관부 고급참모 겸 한교 사무처장에 취임했다. 그는 광복 당시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교포의 보호와 본국 송환에 힘썼고 1946년 말에는 미 중앙정보단(CIG)의 비밀 업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의 한국군 장성들. 김신은 김구의 아들이고 안춘생은 안중근의 종질이다. 최덕신은 예편한 뒤 1986년 월북해 북에서 죽었다. 아래 ‘광복군·중국군 출신의 국군 장성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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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과 국군]


대한민국 국군은 미 군정의 남조선 국방경비대로부터 비롯했다. 국방경비대는 백선엽, 이용무, 양국진, 김백일, 유재흥, 신학진, 박동균 등 주로 일본군과 만주군 인맥들이 주축이었다. 또, 육군사관학교는 미 군정이 군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가 모태였다.


군사영어학교는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 가운데서 각 20명을 뽑을 예정이었으나 광복군 계열이 명분이 없다며 지원을 꺼리면서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채워졌다.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의 장성이 23명에 이르지만[아래 표 참조], 최용덕과 김신이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것을 빼면 육군에서는 단 한 명의 참모총장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에 비기면 일본군 출신은 정일권, 박정희 등 다섯 명의 대장과 여섯 명의 육참총장, 네 명의 공참총장을 배출했다.


우리 광복군의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가 국군·육군사관학교와 단절된 연유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육사도 그 뿌리를 독립운동에서 찾기 시작했다. 육사는 자신의 모체로 신흥무관학교를 언급했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독립군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을 제작해 육사에 설치하기도 했다.


현행 국군의 날은 육군 제3사단이 휴전선을 돌파해 북진한 1950년 10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사단장은 일본 육사 출신의 정일권과 이종찬이었다. 현행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군일(9월 17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항일투쟁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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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중국 국방부·정치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던 김홍일이 귀국한 것은 해방 3년 뒤인 1948년 8월이었다. 그는 대통령 특별지시로 육군 준장으로 임관해 당시 국무총리인 이범석의 추천을 받아 육군사관학교장에 취임했다. 이는 국군 역사상 최초임관을 장군부터 시작한 유일한 사례였다.

사단급 지휘 경험 있는 유일한 장군, 한국전 전공

그러나 이승만의 미주파가 아니라 중국에서 김구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범석과 막역한 사이였다. 이는 김홍일의 군 생활에서 상당한 핸디캡으로 작용해 이승만은 중요한 직책을 주지 않고 한직으로만 돌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그를 견제했다. 이미 집권 자유당의 제2인자로 떠오른 이범석이 이승만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전쟁기념관에 있는 김홍일 장군의 흉상

전쟁은 그런 상황에서 시작됐고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이승만은 김홍일의 경륜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던 유재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홍일은 장교들에게 전술학을 강의할 수 있고 외국군에서 사단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국군 내의 유일한 지휘관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군의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돼 한강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1주일간 방어하고 곧 육군 1군단장이 돼 후속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고 미군과 협조해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포항 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견제로 1950년 개교된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듬해 3월에는 국방장관 신성모의 모략으로 조선민족청년단(족청) 계 쿠데타설에 연루돼 강제 예편당했으나 주 중화민국(대만)대사에 임명돼 10년 동안이나 근무했다.

타이베이 외교단장으로 활약하다가 그가 귀국한 것은 10년 만인 1961년이었다. 그는 동향의 장도영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권유로 5·16 쿠데타 세력에 협조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과 군정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군정에 협조한 유일한 예비역 장성이었지만,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대해서는 면전에서 반대할 만큼 강경했다.

▲ 서독을 방문 중인 한국 국회의원들과 함께한 김홍일의 국회의원 시절. 왼쪽에서 다섯 번째. 1970년

정치에 투신 박정희와 맞서다

박정희가 군 복귀 약속을 어기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하자 그는 당연히 박정희와 결별했고 1965년 한일협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정계에 투신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이 된 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을 거쳐 1971년에는 유진산이 물러난 뒤 당수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해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고 당내 김대중과 제휴해 1971년 신민당 당수가 됐으나 당 내분이 일어나자 1972년 9월 당수직을 사임했다. 그는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했고 만년에는 광복회 회장(1977)을 맡기도 했다.

▲ 김홍일이 신민당수에 뽑힌 사실을 전하는 당시 일간지 기사

장례는 사회장으로 하려 했으나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져 그는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2묘역에 안장됐다.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1962), 한국전쟁에서의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1956)을 받았다. 또 20년 이상 중국군에 복무한 공로로 중국(대만) 정부로부터 충근·대수운마·대수경성 등의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국방개론>(고려서적, 1949), <대륙의 분노>(문조사, 1972) 등을 남겼다.

일서 김홍일 장군은 중장으로 예편했다. 당시에 그게 최고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국군 대장은 1954년에 승진한 백선엽(1920~)이다. 그는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독립군 소탕 부대인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인물이다.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기를 기념해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하려다 시민사회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그의 친일 부역 사실 때문이다. 존경의 표시로 5성 장군(중국군 2성+국군 3성)으로 불리기도 했던 김홍일 장군이 진정한 원수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독립을 위한 그의 헌신 때문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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