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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괴롭힌 ‘색깔론’, 여전히 ‘빨갱이’ 외치는 사람들

  • 입력 2019.08.16 11:57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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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8월 21일 작성된 글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화보. 2009년 8월 24일 한겨레 12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는 박정희와 유신독재가 만든 지역감정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최대 피해자이자 희생자였다. 그는 국민의 절반에게는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로 추앙받았지만, 나머지 절반으로부터는 경원당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뛰어난 경륜을 가진 정치인이었지만, 그것을 인정한 주권자는 절반에 그쳤다. 그는 일평생 지역감정과 반공 이데올로기와 싸워야 했고 영남사람들의 편견과 멸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역감정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피해를 봤고 편견과 멸시를 당했지만, 그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가 감내해야 했던 지역감정과 이데올로기, 편견과 멸시는 어떤 합당한 근거도 없는 가해 측의 일방적인 재단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DJ에게 가해진 왜곡과 멸시의 원천은 지역감정의 포로가 된 영남사람들의 ‘맹목의 저주와 증오’였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과 멸시의 감정을 학습하고 내면화했다. 그 진실을 자각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들이 견고한 ‘마음의 감옥’에 갇힌 수인들이 된 이유다.

2009년 DJ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죽음으로 우리 지역 사람들의 반 김대중 정서와 평가가 마감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미워하거나 경멸할 대상이 없는 증오와 멸시의 감정은 사라질 수 있으리라고 보면서 이 글을 썼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 10년, 다시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영남사람들의 ‘묻지 마’ 지지를 받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금 감옥에 있다. 2016년 총선에서는 30년 만에 대구에서도 ‘김대중 당’, ‘전라도 당’으로 폄훼해 온 민주당 국회의원이 뽑혔다.

정권교체 3년째, 그러나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겠다고 절치부심하는 지역 기반 보수정당의 행보는 기막히게 퇴행적이다. 이들은 다시 죽어가던 이데올로기를 불러내어 다시 전가의 보도로 다듬고 있다. 지역 출신의 민주당 국회의원을 ‘빨갱이’로 적시하는 일탈도 재현되고 있다.

DJ가 떠난 지 10년 세상은 변한 듯한데 정작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하 2009년 8월 21일 작성된 내용입니다.)

▲ 김대중(192.4.1.~2009.8.18.) 전 대통령

공교롭게도 2009년에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5월에 노무현(1946~2009.5.23.) 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고 하며 슬픔과 충격을 감추지 못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불과 석 달 뒤에 85세를 일기로 영면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가 국장이라며?”

9시가 넘어 귀가한 딸애가 제 동생에게 묻는다. 아들 녀석은 의심 없이 받는다. 아내도 옆에서 거든다.

“그럼, 당연하지.”

“국장을 치러야 마땅하지.”

셋의 대회를 듣다가 나는 아이들이나 아내가 내 정치적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 가족들의 정치적 성향은 비교적 일치하는 편이라고 해야 한다. ‘일치하는 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우리 가족은 모두 같은 후보와 정당에 표를 던졌다. (물론 공개투표처럼 서로의 선택을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100% 사실로 볼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던 1997년 대선 때 아이들은 각각 초등과 중학생이었다. 당연히 투표권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저희 엄마를 통해 나름의 정치적 판단을 관철해 냈다.

그해 대선에서 나는 김대중이 아닌 다른 진보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투표에 앞서 아내와 어머니께 나는 같은 선택을 해 줄 것을 요청(?)했고 당연히 식구들이 내 의견을 존중하였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훨씬 뒤에 나는 아내가 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던졌고 그게 아이들의 종용 결과라는 걸 알았다. 아이들은 다음과 같이 저희 엄마를 협박(?)했다는 것이다.

“엄마, 안 될 사람에게 투표해선 안 돼! 알지? 2번이 아니면 절교야!”

▲ 1997년 대통령선거 포스터

물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고, 내가 지지한 후보는 당연히 낙선했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정권교체의 감격 때문에 한동안 현실감을 잃기조차 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기간에 내가 몸담은 전교조가 합법화됐고 절차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내용으로 의미 있는 민주화가 이뤄졌다.

꼭 그래서였을까. 그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나는 모처럼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춰 매고 출근했다. 오늘 정장한 까닭을 알 것 같다는 학교장의 말에 속내를 들켰다 싶어서 서둘러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던 기억이 새롭다.

2000년 6월 15일에 이뤄진 남북 정상의 공동선언에 대해서는 더 보태고 뺄 게 없다. 그것은 냉전 반세기를 끊고 새로운 민족화해의 길에 대한 7천만 남북 겨레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6·15선언 등의 남북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과 결단은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TV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따라 북측에서 조문단을 파견할 방침이라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현재 꽉 막혀 있는 남북 관계와 며칠 전 현대 그룹과 북측의 합의사항을 언뜻 떠올리면서 혼잣말을 뇌까렸고 아내가 얼른 되받았다.

“DJ는 죽어서도 남북의 화해에 이바지하네.”

“그러게 말에요,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우.”

그의 서거에 붙이는, 그를 지지했든 지지하지 않았든 간에 대중들의 추모와 애도는 마땅히 전직 국가 원수의 죽음에 대한 예의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일부 정당과 정치인들과 보수 언론이 보여주는 민망한 찬사 앞에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DJ의 행보에 대한 보수진영의 반발과 폄훼는 기실 지금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에 비추면 믿기지 않을 만큼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한 인간의 죽음에 바치는 인간적 예의라 보더라도 여전히 씁쓸함은 가시지 않는다.

죽음은 DJ에 대한 애증의 경계를 흐려놓았다. 살아서는 껄끄러운 걸림돌이고 적이었던 그는 더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남으로써 다시는 적은커녕 걸림돌로도 되살아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장해제당한 적장에 대한 예우야 어떤 장수인들 못 하겠는가.

▲ 2000년 12월 김대중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겉으로야 내가 사는 영남, 정확히 말해 경북 북부지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그들(편의상 구분하지 않고 쓴다. 여기서 지칭하는 이들은 ‘지역감정’이나 반 DJ 정서에서 자유롭지 않은 영남인, 혹은 기타 대중을 가리킨다)은 이 서거 정국에 걸맞은 표정과 엄숙을 가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나는 영남의 대중들이 평균적으로 지니는 DJ와 그가 관여했던 정당을 바라보는 시각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게 떠오르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해직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 고향마을에서 일찍이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영달한 이가 있었다. 촌수를 헤아리기는 어려운, 집안 아저씨뻘의 이 양반이 오랜만에 고향에 왔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다고 우리 집에 들렀는데 인사를 드렸더니 무얼 하냐고 물었다. 형님이 대신 웃으면서 전교조 하다 어찌 되었다고 하니까 이 양반 망설임 없이 내뱉은 말이 걸작이었다.

“음, 김대중이 똘마니구먼.”

내 주변의 지인들은 설사 그가 극우 보수라 할지라도 내 앞에서 함부로 DJ(그를 포함한 개혁진영)를 헐뜯거나 폄훼하는 일은 없다. 내가 거기 불쾌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차원에서다. 그러니 주변에서 노골적으로 DJ를 비난하는 이들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복직하고서다. 하회마을에 들렀다가 들머리의 식당에서 헛제삿밥을 먹는데 옆자리의 사람들의 화제가 정치로 옮겨가나 싶었는데 일행 중 60을 갓 넘은 듯한 안노인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리가 불편해 종종걸음을 치는 DJ의 걸음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조롱과 폄훼도 진화한다. 원색적인 비난이나 욕설보다 은근히 점잔을 가장한 능멸이 훨씬 더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그들은 단 한 마디의 욕설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의 반들반들한 얼굴에 득의만만하게 번지는 조롱기와 과장되게 벌이는 다리 저는 흉내와 폭소 속에서 나는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 듯한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다.

이 두 가지 기억은 경상도 사람들의 DJ 증오가 얼마나 뿌리 깊고 일반화된 현상인가에 대한 방증이다. 그러나 짐작했겠지만, DJ에 대한 그 노인의 증오와 조롱은 학습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나 혐오가 이성적인 판단과는 무관한 원시적이고 맹목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혹시 직접 김대중이나, 호남사람에게서 어떤 피해를 보았나요?”

“아니요.”

“그럼 주변에서 그런 피해를 보는 걸 목격하셨나요?”

“아니요.”

“그를 미워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왜 김대중과 호남사람을 그렇게 미워하지요?”

“그냥. 그냥 싫어서 그래요.”

근거 없는 자신의 맹목적 증오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강화한다. 그래서 그의 증오심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치명적으로 바뀌어 간다. 증오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정치적 선택은 요지부동으로 굳어가고 그것은 다시 자신의 증오와 적개심을 정당화해 준다. 결국, 그들은 이 뿌리 깊은 증오의 악순환의 포로에 불과하다.

영남인들의 DJ에 대한 증오와 반호남 정서는 멀쩡한 경상도 사람인 노무현조차 ‘비 경상도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의 조상이 원래 호남사람이었다는 헛소문도 결국 그들의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한 졸렬한 흑색선전(마타도어)에 불과했다. 민주당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정서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정작 DJ에 대한 거의 병적인 증오와 선동(프로파간다)로 일관하는 일부 극우 파시스트들의 행보는 별로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싶다. 그들의 병적인 적개심과 증오는 오히려 드러나 있어 다수 대중의 검증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하니 말이다.

▲ 한겨레 그림판(2009.8.20.) ⓒ장봉군

한겨레 그림판의 장봉군 화백은 8월 20일 자 만평에다 ‘석방’이란 제목을 붙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그림을 지긋이 바라봤다. 만평은 머리를 깎은 DJ의 영혼이 옥문을 나서는 장면을 잡았다. 감방 위에는 ‘색깔론 등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의 감옥’이란 글씨가 붙었다.

신문을 접으면서 나는 자신에게 되물어 봤다. 정녕 DJ는, 노벨평화상조차 ‘북한에 퍼 주기 한 공로’로 받았고 심지어는 노벨상위원회에 뇌물을 쓴 결과라는 음해까지 창조해 내는 한반도 남동부 지역 사람들의 저 ‘맹목의 저주와 증오’로부터 벗어났을까.

▲ 김대중은 분단 사상 처음으로 북의 정상을 만나 6.15선언을 끌어냈다.

▲ 1971년 대선 시기의 김대중. 그는 박정희에게 패배했지만, 강력한 대안으로 국민에게 각인되고, 가장 두려운 박정희의 정적이 되었다.

DJ는 일찍이 최대의 정적인 자신을 제거하려던 독재자 박정희의 공작에도 살아남았다. 그 대신, 영구집권을 꿈꿨던 박정희는 자기 심복의 총에 맞아 숨졌다. 또 DJ는 대통령 당선인의 신분으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전두환·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함으로써 자신의 은원을 가장 이성적으로 정리한 이다.

그가 85년, 그 간난의 삶을 마치면서 자신을 가뒀던 이 전근대적 정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예민하고 아픈 시기를 끌어안고 거기 정면으로 맞서면서 자신의 정치적 삶을 불살랐다.

그가 지향했던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는 화석이 아니라, 대중들의 일상적 삶의 가치로 내면화하게 되었다. 이루지 못한 조국 통일의 대업은 우리, 남은 사람의 몫이 되었다. 그가 뿌린 씨앗은 여전히 거칠긴 하지만 가능성의 이름으로 이 땅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다.

지금 DJ는, 그의 죽음은 오히려 우리와 우리 사회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닐까.

“나의 죽음으로 영남사람들은,

혹은 나를 증오하고 폄훼했던 대중들은

그 ‘맹목의 저주와 증오’에서, 그 견고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대중이 답할 차례다. 그리고 대중들이 그 답을 찾는 일은 곧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이 될 터이다. 그가 추구한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와 민족 통일은 한 정치인의 정치적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동시대인 모두가 기꺼이 져야 할 역사적 과제인 까닭이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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