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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가전사> 청일전쟁의 시작

  • 입력 2014.07.29 15:44
  • 수정 2014.07.29 15:56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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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모습

그런 농담이 있어. 전 세계에서 중국인을 무시하고 일본인을 깔아보는 사람들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일본은 그렇다고 치고, 한반도의 주민들이 요즘처럼 중국을 무시하고 살았던 적은 드물 거야. 요즘 중국이 미국에 맞설 만큼 커지면서 양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90년대, 전쟁 이후 다시 만난 중국은 보통 한국 사람들에게는 ‘후진국’ 또는 ‘싸구려’의 인상으로 다가왔었으니까. 유사 이래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대륙을 차지한 주인이 한족이든 이민족이든 일단 그 땅의 지배자에게 비위를 맞춰 주면서 생존을 도모해 온 민족으로서는.

우리의 조상들이 택한 사대(事大)에 대해 불만이 많을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야. 삼국지 시절처럼 중국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운신의 폭이 좀 생겼지만 누군가 대륙을 틀어쥐고 동서남북을 쓸어보면 이건 세계 최대의 괴물이 먹잇감 찾아 입맛 다시는 형국이라. 고구려 멸망할 때 인구가 67만호였다는데 수 양제가 들이민 게 113만 대군이었잖아. 몇 번은 이겨도 결국은 두 손을 들게 마련이라. 그래서 “너 상국(上國)해라. 대신 우리 사는 거엔 간섭 말아라.” 는 타협(?)이 사대였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생활의 지혜’가 세월이 흐르고 굳어지면서 되레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생활의 질곡’이 되는 일은 흔하지. 임기응변으로 취한 대책이 관례로 굳어지고 나중에는 그 관례에 지배당하는 일 우리 많이 보잖아. 사대도 그랬지.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치고 남한산성에 처박혀서도 “임진년 명나라가 천하의 군대를 동원해서 우리를 도와 준 은혜”를 들먹이는 덜떨어진 모습은 그 일면이겠지. 그때 청 태종이 내지르는 한 마디는 시원하기조차 해. “천하란 무한히 큰 것이고 또 천하에는 많은 나라가 있다. 너희의 어려움을 구원한 것은 오직 명나라 하나 뿐인데, 어떻게 천하의 군대가 이르렀다고 말하느냐.” (이 꽉 막힌 조선놈들아)

또 한 번 하지만, 중국 대륙의 지배자들도 크게 반항하지 않는 한 한반도 정부의 내정에 미주알고주알 간섭하지는 않았어. 조공국이자 속국이기는 하되 자기들끼리 알아서 사는 나라. 그게 명나라나 청나라 정부의 생각이었지. 그래서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 정부에 와서 “니들 속국이라매. 말빨 좀 세워 봐.”라고 요구하면 “조선은 비록 조공국이지만 국사는 자주(自主)하고 있다” (청 말기 공친왕 혁흔)는 말로 대꾸하곤 했지. 실상 그랬고. 그런데 청나라가 조선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게 된 건 청나라가 망해가던 무렵이었어. 그들을 끌어들인 건 다름아닌 조선 사람들이었고.

1882년 7월 24일(양력) 임오군란 이후 지방으로 도망간 민비는 김윤식 어윤중 등을 보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다. 집안 일에 바깥 해결사를 불러들인 거지. 열강들에 허구헌날 줘 터지던 청나라도 모처럼 힘을 과시할 기회를 얻는다. 병자호란 이후 처음으로 청나라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된 거지. 청나라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대원군을 낼름 납치해서 청나라로 끌고 가면서 간단히 임오군란을 진압해. 민비가 환궁할 때 그 호위를 선 건 조선군이 아니라 청나라 군대였다. 이미 이 여자는 자기 신민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저버리고 있었지.

구한말 구식군대

청나라는 이후 조선을 식민지 취급하기 시작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무력 개입해서 개화당 정권을 3일천하로 끝나게 한 것도 청나라 군대였고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은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 생각도 했다고 해. 그 대리자로 조선에 나와 있던 원세개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조선 천하를 주무르는 총독 노릇을 했지. 하지만 일본도 자기들이 침 발라 놓은 조선을 “썩어도 준치”랍시고 청나라가 해먹는 꼴을 보기는 싫었고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한다. 양쪽 군대 철수, 유사시 군대 파병하면 상대방에게 즉각 통보하고 해결되면 즉시 철수 등등의 내용이었지.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조선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이 터진다. 관군이 패하고 전주성이 함락되고 한 도의 감영이 농민군에 의해 떨어지자 민비와 고종은 또 좌불안석이 된다. 더구나 동학군이 대원군을 들먹인 사실을 알게 된 민비는 당장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려 하지. 이때 수하가 반대하자 민비는 이렇게 호령한다. “동학의 무리들을 내 어찌 왜놈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일을 다시는 참을 수 없다.” (매천야록)

청나라 입장에서야 그러문입쇼 도와드려야죠였고 당장 9백명의 선발대가 인천에 들어온다. 일본으로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 일이었지. 그들은 톈진 조약을 들먹이면서 즉각 군대를 출동시킨다. 이 상황을 가장 우려한 건 왕과 왕비가 아니라 그들이 무지랭이에 비적이라고 경멸하던 농민들이었어. 동학 농민군은 서둘러 관군과 화의를 맺고 해산한다. 자신들을 빌미로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우려한 거지. 하지만 왕과 왕비가 엎지른 물을 농민들이 주워담을 수는 없었어.

일본군은 1894년 7월 23일 짧은 총격전 끝에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다. 임오군란 때 성난 군인들이 궁궐을 범한지 꼭 12년째 되던 날. 그 난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왕비는 그 외국 군대가 불러들인 또 다른 외국 군대가 자신의 대궐을 장악하는 꼴을 봐야 했지. 남은 것은 두 외국의 충돌이었어.

1894년 7월 25일 서해안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함대와 수송선을 기습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의 막이 오른다. 전투에서 처음 포문을 연 건 순양함 요시노 호였지. 그런데 청나라는 이보다 훨씬 나은 배를 구비할 기회가 있었어. 남미의 칠레가 영국에 주문해서 완성시켰지만 여건상 인수하지 못했을 때 청나라에 그 인수 기회가 주어졌는데 서태후 환갑연 비용 때문에 포기해야 했었거든. 청나라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다. 요시노, 그리고 후일 러일 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휘하는 나니와 등 일본 순양함대에 의해 1200명의 병사가 서해 바다에 수장되고 만 거야. 이게 풍도해전.

이후 중국 북양함대의 주력이 총출동한 압록강 해전에서 청나라 해군은 박살이 나고 육지에서도 연전연패해 청나라는 이제 동북아시아에서조차 그 패권을 완연히 상실한 무기력한 거인으로 전락한다.

오늘날 인천발 여객선이 닿는 중국의 웨이하이(威海)는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군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전멸당한 곳이야. 북양함대의 기지가 있던 궁도라는 섬에 가면 중국인들이 청일전쟁의 치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 ‘수사(水師·옛 해군)광장’ 변에는 ‘나라 잃은 치욕을 잊지 말고 해양강국을 이루자’는 글귀가 대문짝만하게 써 있고 그들의 옛 과오를 명기해 놨지. “북양해군 군함은 군사훈련은 하지 않고 오히려 여객과 화물이나 실어 나르느라 여러 항구를 오갔다.” “청나라 정부는 해군 경비를 유용해 이화원을 증축하면서 북양해군에는 군함 한 척, 대포 한 문 늘리지 않았다.”

이들이 청일전쟁을 기억하는 이유는 또 있어. 바로 전쟁을 끝낸 시모노세키 조약에 이런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야. “‘대만 및 부속 도서를 일본에 할양한다.” 대만이야 중국인들에게 돌아왔지만 이 ’부속 도서‘는 지금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지. 바로 일본식으로 하면 센가쿠 열도, 중국식으로 하면 조어도 (댜오위다오) 문제가 그거야. 중국 사람들이 시모노세키 조약 풍경을 밀랍 인형으로까지 만들어 전시해 두고 있는 이유를 짐작하겠지?

1996년 중국인들은 압록강 해전에서 포탄이 떨어지자 일본군을 향해 배를 돌진시키다가 전사한 등세창의 이름을 딴 세창호를 건조했다. 중국 해군은 배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데 딱 두 배가 예외라고 해. 하나가 중국 유수의 원양 함대를 지휘하며 아프리카까지 갔다 온 명나라 시대의 정화. 그리고 바로 청일전쟁의 영웅 등세창. 중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조선총독부

청나라는 전쟁에 졌을 뿐이지만 조선은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셈이 됐어. 시모노세키 조약 1조가 그거다. “조선은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이 말은 즉 더 이상 청나라는 조선에서 놀지 말라는 선언이었고 아울러 조선은 우리 거라는 선언이었으니까.

올해는 청일전쟁이 일어난지 120주년이 되는 해다. 바로 올해가 ‘갑오년’ 아니겠니.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지만 태반의 전투는 우리 영토와 영해에서 일어났어. 평양 전투에서는 청나라 군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숱하게 죽었다. 그 빌미를 준 건 자기 이익에 눈 먼 우리 지배층이었고.

120년 뒤 중국은 ‘역사를 명심해 경종을 크게 울림으로써우리 바다를 강력히 지키고 우리 바다의 권리를 키운다.’ (銘記歷史 警鐘長鳴 强我海防 興我海權)’면서 (웨이하이 옛 북양함대 기지에 세운 간판) 절치부심하고 있고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선언했다. 자국민 보호를 위해 군대를 파견할 수도 있고 (이건 120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 자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라가 공격을 당했을 때 피공격국을 원조하여 공동으로 방위할 수 있는 권리인 ‘집단적 자위권’의 경우는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군이 “청나라군이 출동하니 우리도 간다.”고 들어왔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지. 한국 국방부는 “한국 정부 허락 없이 그럴 일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120년 전에도 일본군은 조선의 ‘허락’ 같은 거 받지 않았었거든.

반복되지만 재연되지는 않는 게 역사라고 했지. 워낙 우리 현대사는 다시 반복하기조차 끔찍한 것이라...... 사족으로 하나 더 얘기해 볼까? 너 ‘풍도’란 이름 들어 본 적 있어? 어디 붙은 섬인지 알아? 행정 구역 상으로는 안산시 단원구에 속하는 서해안의 섬이야. 모르지?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 풍도를 교과서에서 배운다. 청일전쟁의 승전지로. 도고 헤이하찌로 일본 제독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 “일본해 (동해)에서는 다케시마, 황해 (서해)에서는 풍도를 장악해야 한다.” 좀 으스스해지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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