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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가전사> 소탐대실 평양성 전투

  • 입력 2014.07.26 15:00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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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보1호 평양성

일제 강점기때 일본의 한 관리는 그런 얘기를 했어.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란 참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그 이유로 그는 조선 어디에 가나 ‘문록 경장의 역’ 즉 임진왜란을 기억하는 비석이며 전설이며 사당이며 등등이 너무도 많다는 점을 들었지.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고려 때 몽골과의 전쟁과 함께 가장 파괴적인 전쟁으로 기록될 거야. 그만큼 양반들의 기록에서나 민중들의 사연에서나 임진왜란의 악몽은 선명하게 남았을 밖에.

1592년 7월 22일 (양력)에는 평양성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다. 양력 5월 중순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으니까 단 두 달 만에 조선의 주요한 세 도시라 할 한양, 개성, 평양이 다 떨어진 거지. 부산에서 유람하며 올라왔다 해도 사람 걸음으로는 평양에서 부산까지라면 한 달은 걸릴 거야. 하지만 일본군은 전투도 하고 쉬기도 하고 성도 빼앗으면서 단 두 달만에 평양까지 다다랐지. 이런 붕괴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이런 의심까지 품게 해. “조선이하고 일본이 하고 짜고 우리 사람 치려는 거 아니야 이거? 조선은 군대도 없냐 이거.”

그런데 평양성은 대동강을 끼고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성이었어. 옛날 고구려는 이 성을 근거로 당나라군의 포위를 몇 번이나 견뎌냈고 고려 시대에는 묘청과 조광이 이 성에서 1년 넘게 농성을 벌였던 거 기억하겠지? 즉 싸우고자 하고 준비만 잘돼 있다면 평양성은 쉽게 떨어질 성이 아니었지. 그런데 이 평양성 싸움에서는 제대로 된 공성전 한 번 없이 일본군은 콧노래를 부르며 입성하게 돼.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임기응변은 뛰어나고 머리도 좋았던 임금 선조는 그 머리를 백성을 위해서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주로 썼어.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임금은 평양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이었어. 원래 ‘피양 박치기’의 전설에서 보듯 이 서북쪽 사람들의 기질은 괄괄하기로 유명했지. 정도전인지 대원군인지 얘기했다는 조선 팔도의 기질 설명에서 평안도를 표현하는 말은 “맹호출림”, 즉 맹호가 숲 밖으로 나온다는 거였어. 이때의 평양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나 봐.

일본군이 대동강변에 출몰하고 임금이 또 도망을 한다는 소문이 돌자 대번에 인심은 흉흉해지고 성이 비었다고 할만큼 사람들이 흩어졌다고 해. 오갈데없이 평양성만 의지하고 들어온 백성들에게 임금의 피난 소문은 일종의 배..배.. 배신이었지. 하지만 유성룡과 윤두수가 동인서인 합작으로 평양성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자 임금은 마지못해 이에 응하고 세자를 내세워 민심을 수습하려 든다. 하지만 평양 사람들은 좀 달랐어. “우리레 상감 마마 말씀을 좀 들어야갔습네다.” 결국 선조가 나서야 했어. 역시 “불쌍한 백성들아. 내가 미안하다~~~~~” 류의 말을 하고 도망가지 않는다고 선언했지. 그러자 백성들이 대거 몰려들어 평양성을 채웠다고 해. “왜놈들 한 번 붙어 보자마."

그런데 일본군이 대동강에 나타나자 선조는 또 맘이 바뀐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고 새누리당 선거 전과 후가 판이한 법이지. 선조는 도망갈 궁리를 하고 먼저 종묘에서 피난온 신주를 성 밖으로 빼돌리려는데 이것이 평양 사람들의 눈에 발각된다. “이 종간나들이 고저 도망갈 궁리구나야.” 백성들은 들고 일어났어. 성난 ‘맹호’들은 평양성 거리를 휩쓴다. “아 길세 이럴거문 와 우리를 속여 이 성에 들어오게 한 거이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민란 상황이 된 거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몽둥이를 들고 기세가 등등했다니 역시 피양 박치기들.

유성룡이 나선다. 그는 민란의 주도자로 보이는 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성을 지키자고 말씀드렸고 전하께서도 쾌히 그러겠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난리냐? 네 말이 좀 통하는 거 같으니 어서 해산시키도록 해라.” 그러자 주도자는 이렇게 얘기해. “내레 그 말이 듣고 싶었을 뿐입네다.” 피양 박치기도 결국은, 높은 사람이 한 번 말하면 눈에 띄게 기가 죽고 별로 그를 의심하지 않는 버릇을 지닌 단군의 자손들. “전하께서 싸우신답네다.”

하지만 임금은 피난을 결정하고 있었어. 그놈의 가만히 있으라 이후 윗대가리들이 빠져나가는 전통은 정말로 유구하다. 결국 왕은 떠나고 윤두수 이원익 등이 남아 평양성을 지키게 됐지. 막아서던 백성들 몇몇은 목이 잘려 나갔고 말이야. 백성들은 싸우자는데 임금은 도망간다. 이미 싸움의 기세는 꺾인 셈이지. 그럭저럭 성만 튼튼히 지키고 농성을 했다면 괜찮은데 도원수 김명원, 단 한 번도 이긴 적 없는 이 도원수는 엉뚱한 작전을 구상한다. 한 번 기습을 했더니 효과가 나쁘지 않안던 점에 착안, 또 한 번 심야에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가서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한 거야.

그런데 착오가 발생한다. 원래는 자정 무렵에 배를 건너가야 했는데 새벽 서너시에야 군사들이 집결하면서 짧은 여름밤이 끝나고 먼동이 틀 때에야 대동강을 건너가게 된 거야. 조선군은 잘 싸운다. 평안도 맹호들 아니겠어. 순식간에 대동강변에 잠들어 있던 일본군 수백명이 시체로 변해. 그런데 한바탕 기습이 끝날 즈음 일본군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해. 일본군은 새까맣게 몰려왔고 조선군은 후퇴를 해야 했지. 그런데 강 중앙에서 대기 중이던 사공들이 일본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겁을 먹고 배를 제대로 대지 못했어. 배가 오지 않는다! 대군 앞에서 뜻하지 않은 배수진을 친 셈. 하지만 평양 출신들은 살 길을 알고 있었어.

“왕성탄으로 뛰라우.”

왕성탄은 대동강 상류의 여울이었는데 병사들이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얕았어. 병사들은 당연히 살려고 뛰었고 태반이 살아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허겁지겁 걸어서 왕성탄을 건너는 모습은 대단한 스펙타클로 일본군 수천 명의 뇌리에 남게 되지. “저기노 얕은 데가 있다데스” 한 번 상상해 보렴. 넓은 대동강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일본군 앞에서 첨벙첨벙 강물을 걸어서 건너는 수백 명의 조선군들을. 야습해서 수백 명을 죽인 건 좋았지만 그 댓가로 조선군은 평양성의 열쇠를 전해 준 셈이 됐지.

일본군이 왕성탄을 건너자 난공불락의 요새 평양성은 순식간에 헝겊 막대가 돼서 무너진다. 이원익과 윤두수는 평양 성문을 열어 백성들을 피난시키지. 한때 부지깽이를 들고 “상감 나오라우”를 부르짖던 백성들은 무기력한 양떼가 돼서 울부짖으면서 성문을 빠져나가 종종걸음을 쳤지. 모든 무기는 연못에 던졌지만 10만석의 군량미는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바쳐지고 말았고.

평양성 전투는 허무하게 끝났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오류와 결점을 여럿 내보인다. “가만히 있으라”고 지들만 빠져나가는 웃대가리들이야 이젠 익숙하다 못해 정겹고, 기세가 좋게 타오르지만 감언이설에 쉽게 꺼져 버리고 되레 차갑게 식어 버리는 마음들도 그렇고, 객관적인 조건이 안되면 결행하지 않아야 할 일을 ‘기왕지사’ 라 여기고 질러 버리는 (즉 먼동이 틀 시간에 야습을 감행하는) 어리석음과 일본군 전초병 몇 명 잡다가 결국은 왕성탄이라는 중대한 열쇠를 적에게 헌납하고 마는 비극에 이르기까지 어디서 많이 봤던 풍경들일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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