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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 MBC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 입력 2019.06.10 11:08
  • 기자명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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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6월 10일 작성된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1987년에 6월 10일 오후 9시에 방송됐던 MBC <뉴스데스크>는 아홉 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오늘 열린 제4차 민정당(민주정의당, 신군부 세력이 창당한 제5공화국의 집권 여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습니다'라는 앵커의 설명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땡전 뉴스'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유래됐습니다. 아홉 시를 알려주는 땡 소리와 함께 항상 전두환 씨의 근황이 먼저 보도됐기 때문입니다. 이날 <뉴스데스크>의 주요 뉴스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당시 대표가 선출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노태우 씨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던 1987년 6월 10일 대한민국 국민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6월 10일 열릴 예정이었던 ‘6·10대회’ 행사장 입장을 막기 위해 경찰 160개 중대 2만 2,000명이 행사장 주변과 거리에 배치됐습니다. 입장이 가로막힌 시민들은 오후 1시부터 거리로 나왔습니다. 서울 시내를 비롯한 전국 18개 도시에 시민 24만여 명은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날 학생과 시민들은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는 노래를 부르며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고, 서울, 부산을 비롯해 마산과 대구, 포항, 울산, 안동, 경주,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천안, 춘천, 목포, 군산, 인천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진행됐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재임 중 대통령 후보가 선출된 날 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을까요?

1987년 1월 13일 자정 하숙집에 있던 서울대생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됩니다.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분실에 도착하자마자 박종운의 소재를 자백하라며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14일 오전 11시 45분 물고문 도중 남영분실 509호실에서 사망합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14일 오전 6시 40분 연행, 오전 11시 45분 사망으로 발표됨.)

ⓒSBS뉴스 캡처

박종철이 사망하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초등학생도 믿지 못할 사건 브리핑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민당과 재야단체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미사에서 ‘치안감 박처원,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 간부들이 사건을 축소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5월 23일 재야단체와 시민들은 예정됐던 ‘박종철군 국민추도’의 이름을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으로 바꾸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날 전국 22개 도시마다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는 전두환 ⓒMBC뉴스 캡처

6월 10일 거리에 모인 시민들이 ‘호헌 철폐’를 외친 이유가 있습니다. 박종철을 고문·살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두환 군부 독재가 고수한 대통령 간접 선출제(간선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대통령 간접 선거는 말 그대로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대리인들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박정희 유신헌법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방식이라면 전두환 신군부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문제는 총선거인단 5,277명 중 민정당 소속이 3,675명이었던데다 무소속 1,123명도 대부분 전두환을 지지했다는 점입니다. (1981년 12대 대통령 선거 기준)

전두환이 밝힌 ‘4·13 호헌조치’는 말 그대로 기존 헌법에 따라 소위 ‘체육관 선거’, 즉 깜깜이 투표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8~11대 대통령 선거(당선자 8~9대 박정희, 10대 최규하, 11대 전두환)는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됐습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당선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집니다.

ⓒMBC뉴스 캡처

이런 연유에서인지 1987년 6월 10일 MBC <뉴스데스크>는 노태우 대통령 후보에 대한 영상을 대통령 당선인급으로 보도했습니다. (편집자 주: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군부 통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

- 나레이션: 국민은 신뢰를 먹고 삽니다. 따라서 정치인은 국민의 신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안정은 기초며 바탕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안정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갈등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대화하는 자, 타협하는 자는 비겁자가 아닙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은사 및 동창들의 이야기]

- 앵커: 부드러움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 참을성이 많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경청하는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 이런 얘기들을 지금 많이 합니다만 노 후보와 오랜 시절을 함께 보낸 은사, 동창 등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서 한 번 보죠.

[대구시 신용동, 노태우 후보의 생가]

- 기자: 대구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 이 집이 바로 민정당 노태우 차기 대통령 후보가 태어난 생가입니다.

통일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수도장으로 알려진 팔공산 기슭에 자리 잡은 노 대표의 생가인 신용동 마을은 여느 산촌과 마찬가지로 집 앞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녹음이 우거져 있습니다.

당시 MBC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인물을 가리켜 ‘신뢰’를 이야기했습니다. 상관을 총칼로 위협했던 자를 ‘부드러움’을 갖춘 사람이라고 합니다. 찬양과 칭찬을 하다가 이제 통일신라 시대 김유신 장군을 끌어다가 위인전에 나오는 영웅으로 둔갑시킵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은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열린 시위 도중 최루탄을 머리에 직격으로 맞아 사경을 헤맵니다.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정병수 MBC 해설위원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의 수립’이라 칭찬하며 이는 ‘민주주의 발전의 요체라고 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신념과 의지가 실천된 것이다’라며 군부독재자 전두환을 찬양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노태우 대통령 후보 확정에 샴페인을 마시며 손뼉을 치고 축하를 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수십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목이 터져라 ‘우리의 소원은 민주’를 부르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더는 대한민국의 아까운 젊은이들이 물고문과 최루탄에 맞아 죽지 않게 만들겠다며 그들은 잔인한 경찰의 진압봉과 최루탄에 맞섰습니다.

6·10을 민주항쟁이라 부릅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섰던 4·19 혁명처럼 혁명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분열과 기회주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국민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언론 또한 그들 세력을 비호하며 권력 유지에 일조했습니다.

직썰 필진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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