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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과 ‘바보’ 노무현, 그들을 증오했던 사람들

  • 입력 2019.05.21 14:22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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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2월 10일 작성된 글입니다.

▲ 온달산성은 온달과 평강 공주의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오늘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에서 엽서를 띄웁니다.”

이 문장은 쇠귀 신영복 선생의 글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갑니다>(나무야 나무야, 2001)의 첫 문장이다. 내가 가족과 함께 단양의 온달산성을 다녀온 것은 2007 이맘때, 대통령 선거일(12월 17일)이었지만, 오늘은 같은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 쇠귀 신영복 선생이 쓴 엽서를 모든 책이다.

온달산성이 있는 충북 영춘은 내가 사는 데서 100여 Km쯤 떨어진 한적한 시골이다. 이 조그마한 시골 언저리에 길게 누운 427m의 성산에 세워진 길이 922m, 높이 3m의 반월형 석성이 온달산성이다. 중3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이 글을 내리 세 해 동안 가르쳤지만 정작 이를 가르친 교사였던 나는 거기 가보지 못했었다.

문학작품 속의 배경을 굳이 찾아볼 까닭은 따로 없다. 그러나 어쩐지 나는 온달산성에 가보고 싶었다. 대통령 선거일에 길을 떠난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오전 10시께 우리 가족은 인근의 투표소에서 투표를 끝냈다. 날씨는 쾌청했고, 짧은 겨울 해지만 시간은 넉넉했다.

삼국시대에 쌓은 돌성 온달산성은 쳐들어오는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온달이 전사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삼국사기> 온달전에는 온달(?~590)이 죽은 장소를 아단성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성을 아단성으로 여기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는 6세기 중반 한강 유역과 중원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 중에 온달이 이 지역에서 활약하면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듯하다.

▲ 온달산성 입구에 세워진 온달 장군상

온달은 이 성을 지키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장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은 결정되었습니다. 자, 돌아갑시다’하고 달래자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기록이다.

온달설화에 숨은 역사·사회적 의미

쇠귀 선생은 이 산성에서 띄우는 엽서를 통해 당신이 산 중턱의 정자 사모정(思慕亭)에서 나머지 길을 ‘평강 공주’와 함께 올랐다고 말한다. 그는 평강 공주와 온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사랑의 이야기를 믿는 것은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함께 만들어 전해 온’ 이 이야기가 ‘어떠한 실증적 사실(史實)보다도 당시의 정서를 더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시골에서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평민 청년이 지엄한 신분의 왕녀와 혼인한다는 이 이야기는 구태의연한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설화의 화소는 <무왕설화>와 비슷하다. 그리고 갈등구조의 유형으로 보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과 유사하다.

이 설화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 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을 보여준다. 그것이 여성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성취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설화문학이 갖는 민중적 역사의식은 만만하지 않다.

엄격한 신분제가 기능했던 고대국가에서 평민과 왕족의 혼인이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바보’로 조롱받던 미천한 시골 청년과 공주의 혼인이란 언감생심의 문제였다. 쇠귀 선생은 이 전설의 사랑 이야기,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에 숨어 있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읽고 있다.

“온달과 평강 공주의 이야기는,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과정에서 부유해진 평민 계층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던 사회 변동기였다는 사료(史料)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보 온달’이라는 별명도 사실은 온달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지배 계층의 경멸과 경계심이 만들어 낸 이름이라고 분석되기도 합니다.”

-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갑니다> 중에서

나는 선생의 글에서 유독 “’바보 온달’이라는 별명도 사실은 온달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지배 계층의 경멸과 경계심이 만들어 낸 이름이라고 분석”된다는 데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노모 봉양을 위해 걸식하던 우스꽝스러운 용모의 청년을 가리킨 ‘바보’가 ‘지배계급의 경멸과 경계심’의 다른 이름이라고?

▲ 삼국시대에 쌓은 이 돌성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온달이 전사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처음 윗글을 가르치던 때가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였다. 집권 1년을 넘기면서 보수언론과 야당, 반대자들로부터 비롯한 ‘노무현 증오’가 무르익기 시작하던 때였다. 전혀 다른 의미의 낱말이었는데도 나는 아주 자연스레 그것을 ‘바보’ 노무현과 겹쳐 보았다.

지배층의 경멸과 경계심… 온달과 노무현

‘바보 노무현’은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지지자들의 열광적 경도의 다른 이름이다. 이 이름의 함의는 물론 우직하게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신념을 실천해 가는, 정치인답지 않은 정치인 노무현에게 바치는 경의와 찬사다. 그러나 변화를 희구한 대중의 지지로 집권한 뒤 그가 보인 정치적 선택과 행보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는 적지 않았다.

그것은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보수언론과 정당의 노무현 증오가 초래한 정치공세는 전체 사회의 집합가치처럼 되”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정치인 노무현이 책임질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무차별적으로 확산한 ‘노무현에 대한 조롱과 증오’가 ‘바보 온달’에 대한 지배층의 경멸과 경계심에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땅의 정치적 지배그룹 교체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러나 그것은 간간이 일어난 군부 쿠데타를 빼면 일방적 얼굴 바꾸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비록 호남-충청연합의 형식을 띠긴 했지만, 1997년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한 것은 그 견고한 성채에 첫 균열을 가한 것이었다.

▲ 보수세력의 대표였던 이회창 ⓒ연합뉴스

상대는 이 땅의 최고 엘리트 계급을 대표하는 이른바 KS 라인(경기고-서울대), 대법관 출신의 이회창. 그러나 정치적 박해의 대명사였던 이 호남 출신의 정치인은 상대를 거꾸러뜨렸다. 고졸 학력밖에 없었지만, 김대중은 수십 년 동안의 정치 활동을 통해 단련한 경륜과 카리스마로 IMF 구제금융 시대의 국민적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5년, 지배그룹의 대표 선수 격인 이회창은 권토중래를 꿈꾸며 대선에 출마했고, 상대는 잽 거리도 안 되는 ‘바보 노무현’이었다. 그는 뚝심으로 지역감정에 도전해 당락과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한 첫 정치인이었다. 수차례의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보’라는 애칭을 얻게 된 연유다. 그것은 지지자들이 바치는 ‘경의와 사랑’, 그 반어적 수사였다.

노무현의 존재감은 김대중과 비기기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질시와 정몽준의 연대 파기 등의 우여곡절을 겪고도 그는 보란 듯이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이 됐다. 그건 그 자신의 신념에 대한 지지자들의 헌신, 변화에 목말랐던 대중의 정치적 요구의 결과였다.

노무현의 당선은 연거푸 고졸 출신의 정치인이 경기고-서울대 출신인 지배 엘리트 계급의 이회창을 꺾은 파란의 사건이었다. 김대중의 경우는 수십 년 동안의 정치 활동을 통해 쌓은 경륜과 카리스마가 그의 학력을 상쇄해줬지만, 노무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노무현은 김대중처럼 상고를 나온 고졸 학력에다 부산에서 죽 활동한 ‘촌놈’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을 빼면 모두 시골이다. 그가 사법시험을 거친 변호사였다는 사실도 어쩌다 이룩한 가외의 행운쯤으로 치부됐는지 모른다.

▲노무현 증오의 본질은 무엇일까 ⓒ연합뉴스

노무현이 갖고 있었던 이런 조건들은 그나마 그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 동안은 수면에 떠 오르지 않았다. 부산 출신의 촌놈에게 권력을 내줘야 했던 지배 엘리트들은 앙앙불락하고 있었을지언정 품위를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노무현이 자신을 지지한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회전하게 되면서 상황은 급전직하한다. 사사건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흘겨보던 보수언론들의 돌팔매가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거봐, 저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출신’을 속일 수는 없는 거라니까…

품위 때문에 말을 아꼈을 뿐,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지 않았을까. 부산 촌놈이 청와대에 들러앉았다고? 서울대는커녕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천민’이? 그들이 과연 노무현을 국가수반이나 지배 권력으로 여기고 대우했을까?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자기 계급(층)과 그 기득권과 이해에 기반한 배제의 논리는 핏줄보다 훨씬 견고한 것이다.

정치적 반대나 불신이 증오나 적대로 전이되거나 동일시될 수 있는 이 땅의 묘한 정치문화는 노무현에 대한 증오를 자연스럽게 키워 갔던 듯하다. 결국 ‘국민 스포츠’라는 ‘노무현 씹기’는 앞서 지적한 대로 “보수언론과 정당의 노무현 증오가 초래한 정치공세가 전체 사회의 집합가치”가 되는 데 일조했다.

보수언론과 야당의 노무현 증오의 본질은 ‘느닷없이 빼앗긴 지배 권력’이나 승복할 수 없는 ‘권력 교체’에 있다. 이 증오의 흐름에는 결코 승복하고 싶지 않았던 전임 ‘김대중 정부에 대한 증오’까지 덤으로 얹혔다. 거기다 근거 없는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영남사람들과 노무현의 기대를 접은 지지자들까지 합류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사회현상이 돼 버린 것이었다.

그런 뜻에서 나는 노무현에 대한 기득권의 증오와 ‘온달에 대한 지배계급의 경멸과 경계심’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6세기께 고구려의 지배계급은 중앙 정계로 진출한, 쫓겨난 왕녀가 달고 온 사내, 온달을 ‘바보’라는 이름으로 능멸하고 빈정대는 데 그쳤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반열로 달려든 낯선 사내가 불편하고 고까웠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을 온달에 비길 순 없다. 그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자신들이 누려온 권력을 가당찮은 촌놈에게 고스란히 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난 김대중 정부에 이어서 연거푸 말이다. 그들의 인내심의 한계는 자신들 권력의 들러리로나 기능해 온 주변부 권력에 지나지 않았던 김대중 정부까지였다.

빼앗긴 권력은 증오로... 노무현은 배제된 권력

그들의 경멸은 빼앗긴 권력 때문에 증오로 전이됐고, 그것은 노무현 집권 내내 권력과 그 주변을 물어 뜯어대는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발현됐다. 모든 것을 ‘반노무현’이라는 가치와 방향으로 수렴하면서 그들은 내내 우경화의 길을 걸었던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절대 권력의 자리에 있었던 통치자는 노무현이었지만 그들의 의식 세계에서 노무현은 배제된 권력에 불과했다. 형식상 그들은 야당이었고 권력에서 배제돼 있었지만, 권력과 통치에 대한 일관된 거부와 저항을 통해 자신들 지배그룹의 기득권과 이해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쇠귀 선생은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로 우리 사회를 설명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적 지배그룹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언론과 자본, 법조, 사회문화적 토대 등을 장악한 강력한 보수 권력 집단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소외당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 그들은 권력을 잠시 내어주고 있었지만, 언론과 자본·법조·사회문화적 토대를 한 번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경멸과 폄훼를 통해 자신들의 동질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그들만의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를 공고히 지켜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대선에서 ‘가소로운 좌파’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것이다.

▲ 청계천 물맞이. 2005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서울시장과 청계천을 걷고 있다.

정권을 되찾고 나서도 이들 보수 지배세력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전임 정부 10년을 부정하고 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부분적으로나마 이뤄진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과 복지의 가치들은 지금 이들 세력에 의해 ‘과거의 유산’으로 부정되고 있다.

그들은 제도와 정책뿐만 아니라, 정권과 무관하게 교육돼야 할 역사조차 부정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역사학자들과 교사들, 역사학도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를 고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 저들은 자신들 지배 권력의 영속성을,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을 통해 보장받고 싶은 것일까.

현 정부(이명박 정부) 들면서 바야흐로 퇴행적 변화의 길로 가고 있는 검찰, 경찰과 국정원 등 권력 기관의 모습에서 읽히는 것은 일종의 지배 동맹의 조짐이다. 중립성을 천명하면서 예전의 ‘권력’에서 멀어졌던 기관들은 보수 정권의 출범과 함께 그 충실한 노복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종부세 파동이 시사하는 것은 지배동맹의 공고화

종부세 파동이 시사하는 것은 그런 지배 동맹의 한편을 고액의 부동산 부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는 것을 통해 그 동맹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종부세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우리 사회의 정의가 불과 2%를 위한 것이라는 걸 증명한 셈이고 종부세를 내는 8명의 헌법재판관 중 일곱이 위헌에 표를 던진 게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 사회가 가져야 할 건강성의 지표는 기득권이 아니라 다수 대중의 이익에 대한 사회적 지향이 전통을 통해 견지되는 형식으로 드러나야 마땅하다. 이는 헌재나 대법원의 단위 판결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에 대한 고려와 천착이 필요한 까닭이기도 하다. 헌법이 계급적 이해를 넘는 이 사회의 공공선의 기준이어야 하는 까닭도 다르지 않다.

이번(2008년 11월 13일) 헌재의 종부세 위헌·헌법불합치 판결은 결국 우리 사회가 이룬 소수의 파당적 지배의 일단을 드러낸 것일지 모른다. 정부가 앞서가며 제도와 정책을 통해 그들의 이해를 관철하고 한 번도 기득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보수 세력과 헌재가 법적 제도적 추인을 통해 그 정당성을 완성해 가는 기막힌 동맹과 연대 말이다.

“내년 초 청년실업과 중소기업의 부도 사태 가능성을 현 정부나 체제가 위협받을 수도 있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는 대통령실장의 언급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현 정부를 지칭하는 ‘강부자’ 또는 ‘고소영’ 정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기 인식이다.

노무현 증오가 저들의 권토중래를 가능케 해

영속적 지배를 꿈꾸는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에 균열을 낸 노무현을 다시 생각한다. 그는 실패했는가. 그의 정부는 대중의 지지와는 어긋난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통치는 보수 지배세력의 추인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좌파’로 매도당하면서 ‘정치적 증오의 일상화’만 불렀을 뿐이다.

그의 실패는 보수 세력의 성공으로 갈음할 수 있다. 정책에 대한 대중의 실망과 분노, 팍팍한 삶에 겹친 노무현 증오는 저들의 권토중래를 완성하게 했다. 그리고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그들에 의해 다시 우리 사회의 지향과 목표는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거기 답해야 하는 다수 대중은 침묵했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고단한 삶에 지쳐 발언을 멈췄다. 그러나, 노무현, 혹은 비주류에 대한 기득권과 주류의 경멸과 증오가 그들의 지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현재까지 드러난 저들이 그리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이들 대중의 바람과는 너무 멀어 보이는 까닭이다.

노무현이라는 한 정치인에게 집중된 지배 엘리트의 경멸과 증오에 편승했던 다수 대중의 에너지와 정치적 지향이 이르러야 할 지점은 어디쯤일까. 그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들의 계급적 이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닐는지. 그리하여 그 이해를 바탕으로 새롭게 우리 사회의 지향과 미래상을 그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이하 2008.12.14. 추가)

퇴임했지만 여전히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반응은 그 호불호를 떠나서 자못 뜨거웠다. 내가 쓴 기사로는 드물게 수십 건의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비난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들이 내 글을 오독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오독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애당초 내 기사의 제목은 위의 것이었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바꾼 제목은 맨 아래쪽에 있는 대로 <[주장] ‘노무현 증오’에서 벗어나야 희망 그릴 수 있다>였다. 그건 내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과는 꽤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나는 기사 제목의 정정을 요청하려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기사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거였고, 기사가 그런 뜻으로 읽혔다면 그 역시 나의 책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무현에 대한 기득권 세력과 보수언론의 경멸과 증오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한 번도 내주지 않았던 지배 권력을 빼앗긴 이들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정적에 대한 경멸과 증오로 보상받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집권 기간 내내 권력에 대한 부정과 부당한 공격으로 점철됐다.

권력을 되찾은 이들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편 가르기’는 그 반증이 아닌가 싶다. 전방위적으로 이뤄지는, 지지 계급에 대한 배려와 퇴행적 정책, 심지어는 교과서조차 입맛대로 바꾸려는 것 등은 이들이 다시는 권력을 잃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거기 편승한 영남 지역 등을 중심으로 한 대중들의 노무현 증오였다. 나는 그들의 증오가 김대중 증오의 연장선 위에 있는, 이른바 ‘지역감정’의 정치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그 증오의 근저에는 노무현을 부산사람으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제의 논리마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실패는 스스로가 부른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대중의 지지를 저버리고 집행한 정책과 노선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증오는 정당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증오와 분노로 몸을 떨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희망’을 말한 것은 따로 덧붙이지 않으려 한다. 집권 9개월, 현 정부가 그리고 있는 세상이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것은 더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난 정치적 선택이 대선 승리의 핵심이었다는 이 반어 앞에서 나는 다만 우울할 뿐이다.

직썰 필진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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