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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단톡방’에 초대받은 후 벌어진 일

  • 입력 2019.05.10 15:32
  • 기자명 부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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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라는 책을 펴낸 엄마 페미니즘 탐구모임 ‘부너미’에서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질문을 나눕니다.

승리(이승현)와 정준영 ⓒ연합뉴스

가수 승리와 정준영 등이 참여한 ‘남자들의 단톡방(단체대화방)’에서 성범죄가 일어났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는 이와 유사한 사건이 꾸준히 보도됐다. 남학생들의 ‘성희롱 단톡방’이 대표적으로, 최근에는 교대에서 관련 사건이 있었다. 이들의 단톡방에서는 특정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고, 성희롱하고, 불법으로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공유하고, 강간을 ‘농담’으로 모의하는 일이 공통으로 벌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온 남성이라면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일상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물론이고 학교 선배, 군대 선임, 직장 상사 등 위계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그렇다. ‘그 남자들의 단톡방’ 같은 공간과 커뮤니티는 어디에나 있고, 나 또한 남성으로서, 남성이라는 이유로 자주 초대받았다.

그곳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행위는 ‘재미’, ‘농담’, ‘본능’, ‘의리’, ‘사회생활’ 등으로 해석되며,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이를 주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강화된다. 사적, 공적 커뮤니티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일이다. 이는 미투 운동과 일련의 사건들이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와중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나는 ‘여자들의 단톡방’에 초대받았다. 열 명의 기혼여성들과 함께 책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후 반년 동안 단톡방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지켜봤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특히 결혼하고 애를 낳은 여성으로서 ‘나’로 살아가기 위한 고군분투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만 각기 여자와 남자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전혀 모르게 된 누군가의 세상에 공짜로 입장한 것 같았다.

모든 담론이 그렇듯 윤리적, 실천적으로 정확하고 완벽한 페미니즘은 불가능하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그랬다. 삶과 앎이 모순되고 갈등과 저항이 거셌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나아가고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오늘 하루를 좀 더 잘살아 보려고, 스스로와 자신의 곁을 조금씩 바꿔 내고 있었다.

이들이 유별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가 결혼한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나누는 대화를 가끔 들려주는데, 그들의 얘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나와 함께 일했던 여성 동료들은 자신이 겪는 차별과 폭력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불평만 늘어놓는 ‘수다’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킬 힘을 지닌 맹렬한 이야기다.

물론, 여성들이 속한 모든 단톡방이 그런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성들의 단톡방이 항상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여자들과 남자들의 단톡방에서의 상반된 경험을 통해 새삼 차이를 느꼈다. 단톡방에서, 소셜미디어에서, 집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문학에서, 영화에서, 방송에서… 여성들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동안 남성들은 무엇을 하는 걸까?

여성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남성들도 분명 알고 있다. 스스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예전처럼 쉽게 불법 영상물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예전처럼 가볍게 성적인 농담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을. “이건 남자의 본능인데?”, “”우리끼리만 보는데 뭐가 문제야?”라며 신세를 한탄한들 세상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조용히 단톡방을 나가고, 폰을 초기화하고, 디지털 포렌식 업체에 문의하고, 텔레그램으로 망명하는 것이 아닌가?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이제 그만 바뀌어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바뀌지 않으면 뒤처지고 낙후될 것’이라는 경고이기 때문이다(얼마 전 래퍼 김효은이 발표한 싱글 트랙 ‘머니 로드(Money Road)’가 더 이상 ‘스웨그’가 아닌 이유다. “메갈X들 다 강간”이라는 가사가 담긴 해당 노래는 결국 음원 서비스가 중단됐다).

ⓒ김효은 인스타그램 캡처

한국 남성들이 그동안 ‘정상’이라고 여겼던 세상은 돌아오지 않는다. 늦은 밤 골목과 상가 화장실에서 공포를 느끼고, 저임금과 가사노동에 시달리며, 피해자로서 오히려 비난받고, 성적인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여성은 이미 ‘저 멀리’ 갔다.

지나간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고민할 때다. 오래전 내가 ‘그 남자들의 단톡방’과 같은 커뮤니티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침묵이었다. 이제는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이런 글을 여럿 보았다. 단톡방에 ‘버닝썬 사건’ 관련 동영상이 올라오자 이를 올린 이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다시는 그런 영상을 올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 냈다는 남성들의 글이었다. 여성들과 함께, 조금씩 세상을 바꿔 가는 남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거품이 꺼질 때가 됐는데 왜 꺼지지 않냐?”는 질문을 들은 적 있다. 간단히 답하면, 그것은 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단톡방에 초대한 열 명의 기혼여성들이 자신들이 쓴 글을 모아 책을 냈다. 아이를 돌보며 일과 가사노동까지 하느라 글 쓸 시간도, 체력도 없던 우리 주위의 여성들이 자기 말을 하고 있다.

여성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세상은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성들이 선택할 차례다.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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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필진 부너미

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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